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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정연 Jul 03. 2022

인용문 단장 (4)

나는 1960년대부터 한국인과 한국문화의 기층을 신바람이라는 키워드로 풀이해 왔고 수많은 강연에서도 그에 대해 논의를 되풀이해 왔다. (…) 이번 월드컵 때의 붉은악마의 응원 모습을 보면서도 우리는 그 신바람 문화를 실감하게 되었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그 이면에 있는 '풀이 문화'에 대해서는 깊이 이해하고 있지 않은 것 같다. 해원 상생하는 푸는 문화, 가슴에 뭉친 한이나 슬픔 그리고 굳어진 그 긴장을 풀지 않고서는 신바람은 생겨나지 않는다. 신바람의 문화는 푸는 문화에 의해서만 해독될 수 있는 문화 코드인 까닭이다.


(…) 그렇기 때문에 한의 문화가 발전하면 한풀이의 '풀이 문화'가 되고 그것이 다시 발전하면 신바람의 문화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것의 종착점은 21세기의 키워드인 컨비비얼리티와 통하는 상생의 문화가 된다. 특히 젊은이들은 이러한 문맥에서 이 책을 읽어주기를 바란다.


- 이어령, 「저자의 」, 『푸는 문화 신바람의 문화』(문학사상사, 2003)




며칠 전에 있었다고 하는 김지하의 추모 문화제에 관한 기사를 나는 다소 기이한 기분으로 읽을 수밖에 없었다. 김지하의 한계를 끌어안겠다는 목적으로 열린 행사가, 실은 거기 참석한 진보진영의 인사들이 지닌 한계를 드러내 주기만 한 자리가 되고 말았다는 인상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그 자리는 화해의 장이 된 것이 아니라 힘센 이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화해를 엄포하는 자리가 된 것만 같았다.


그날의 연사들이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만 가장 큰 원인은, 역설적으로, 그들 딴에는 진실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정치적 가치관에 있었다. 그것은 여러 감정적 문제와도 얽히면서 그들의 눈을 흐렸고 결과적으로 상황을 바라보는 데 대한 최소한의 분별조차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가령 김지하가 박근혜 전 대통령을 지지했던 것이 비판받는 것은 그 이유에 김지하 말년 특유의 '개벽'이니 뭐니 하는 사이비적 논리가 끼어 있었기 때문이지, 진보를 지지하다가 보수를 지지하는 것이 죽어도 해선 안 될 일이기 때문은 아니다. 그 두 가지는 전혀 별개의 문제이며 나는 그곳의 연사들이 최소한 그 정도는 구분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닌 말로 그들은 10년 내지 30년 이상을 그런 성찰도 없이 살았다는 말인가. 자신들이 지닌 굴레조차 내려놓지 못하는 주제에 남이 가졌던 굴레를 바라보려 했으니 그날 그들이 하고자 했던 김지하에 대한 이해는 기만적 이해가 될 수밖에 없었으며 그 수준 또한 김지하 자신이 가졌던 한계와도 진배없는 것이었다고 느껴졌다.


누구나 자신의 신념과 사회적 상황에 따라 가치관을 확립하기 마련이다. 또 거기에 따라서 주변의 다른 이들을 평가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누군가를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확실한 상류 또는 하류로 구분 짓는 것에 대해서 나는 늘 막연한 거부감을 가져 왔다. 그러한 태도로써 미워하는 누군가를 이해하려 해봤자 그것은 기만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오히려 자신의 가치관마저도 멀찍이 바라볼 수 있는 자리에서라야 진정한 이해는 가능하지 않을까. 이어령이 말한 푸는 문화란 곧 그것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요컨대 나는 둘이 되어야 한다. 이른바 시대정신이란 것이 주는 사명감에 매여 있는 나와 거기로부터도 자유로운 곳에 있는 무심하도록 객관적인 나. 그 두 나의 상호 작용이 나의 균형 감각을 만들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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