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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민 Aug 08. 2021

여자배구, 올림픽 그리고 김연경

어떻게 이별까지 사랑하겠어, 널 사랑하는 거지

/* 영화 리뷰가 아닙니다. */


주전 레프트와 세터는 불미스러운 일로 대표팀에서 제명됐다.

유일하다 했던 아포짓 스파이커 김희진은 5월 무릎 뼛조각 제거 수술을 받았고,

주전 미들블로커였던 김수지도 복근 부상을 당했다.


발리볼 내셔널 리그(VNL)는 올림픽 직전 대표팀의 전술을 마지막으로 확인하는 대회지만,

라바리니 감독이 이끄는 우리 대표팀은 최정예 6명 중 4명이 바뀐 상황으로 VNL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3승 12패로 처참했다.


김연경의 마지막 올림픽으로 이목을 끌었던 이번 대회는, 그렇게 우려와 불신 속에서 시작됐다.


첫 경기 브라질전, 1세트부터 어마어마한 점수차로 패했고, 다들 무기력했다.

공격을 책임져야 할 라이트 자리에서 단 5점 만을 기록한 김희진에 대한 비난이 거셌다.

김수지도 이렇다 할 유효블로킹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하지만 케냐전 김희진은 보란 듯이 20점을 기록하며 반등했고 팀은 3대 0으로 대승했다.

반드시 잡아야 했던 도미니카 전도, 5세트 듀스 접전 끝에 3대 2로 승리했다.




다음 경기는 8년 전 런던 올림픽 동메달 결정전에서 우리에게 뼈아픈 패배를 안긴 일본과의 경기.

그들의 심장 도쿄에서 벌어지는, 8강 진출을 위해 서로를 반드시 꺾어야 하는  단두대 매치.

 

이 경기를 5세트 듀스 접전까지 가서, 매치 포인트를 내주고도 연속 4득점으로 역전승한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세계랭킹 4위의 터키를, 또 5세트 접전 끝에 제압하며 4강 진출.


이런 대본으로 영화 시나리오를 쓰면 신파라고 욕먹는다.

하지만 현실에선 진짜 그런 일이 일어난다. 어쩌면 이렇게 공교로운 일이, 벌어진다.


올림픽 4강. '기적'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우리 대표팀에 너무나 실례일 것이다.

기적이란 하나의 단어로 우리 선수들의 피 땀 눈물을 치환하고 싶지 않다.

나는 그들의 노력을 알지 못한다. 그것은 간접적으로도 알 방법이 없다.

단순히 TV 앞에서 눈물을 글썽인 게 다였다.


김희진 선수의 아픈 다리 신발에 적힌 문구.


나는 사실 애국심이라는 감정의 모호함에 항상 관심을 가져왔다.

이성적으로 한 국민이 애국심을 가져야 할 완벽한 도덕적 근거는 없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서사적 존재이기에, 이를 인정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단순한 감정이라고 단정 짓곤 했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해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 있었다.


김희진의 절뚝거리는 무릎은, 염혜선의 다이빙 디그는, 김연경의 눈물은,

나의 오만과 편견을 바꾸어 주었다.

이해하려 하지 말고 느끼라는 것. 그것을 이번 올림픽에서 체험했다.



대한민국 여자배구의 최종 성적은 올림픽 4위다.

영화가 아닌 현실에서 영웅이 나타나기 힘든 이유는, 인간이 초월적 힘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영웅 서사가 끝난 이후의 허무감을 감당하기 힘들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올림픽은 끝났고, 이 뜨거움은 점차 사라져 갈 것을 알고 있다.


그렇게 우리는 물결을 거스르는 배처럼,
끊임없이 과거 속으로 밀려나면서도,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위대한 개츠비>-


올림픽이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갈 우리는 다시 쓴 맛을 맛보고 계속해서 뒤로 밀려날지도 모른다.

그럴 때마다 이번 여름 우리 대표팀이 보여준 감동이,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게 할 동력이 되어 줬으면 좋겠다.

나는 스쳐 지나가는 한 여름밤의 꿈같은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이 글을 썼다.


김연경을 비롯해 김수지, 양효진 등 태극마크를 가슴에 달고 지난 십 년을 넘게 달려온 선수들이,

이제는 국가대표를 은퇴한다고 한다.


어떻게 이별까지 사랑하겠어, 널 사랑하는 거지.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기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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