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역사는 발전하는가?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바탕으로
소크라테스는 사형당한다. 왜 죽기까지 해야 했을까. 어떠한 삶을 추구했기에 그는 죽음을 무릅썼으며, 그 삶에는 어떠한 가치와 한계가 존재하는가. <소크라테스의 변명>은 플라톤에 의해 다시 쓰인 주관적 서술이기에, 최대한 객관적인 입장에서 소크라테스가 추구한 삶을 되돌아보고, 그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떻게 닿을 수 있을지 비판적으로 검토해 보고자 한다.
먼저, 소크라테스가 삶에서 내내 보여준 철학의 우선 지향점은 무엇이었는가? 바로 자신이 알지 못함을 알아야 한다는 데에 있다. 그가 끊임없이 타인과의 사적인 소통을 시도하고, 질문을 멈추지 않았던 이유도 그 때문이다. 면박을 주고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자신과 상대방은 정말 알고 있는 것인지를 규명하기 위해 그는 끊임없이 질문하고 대화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알지 못함을 아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인가를 안다고 믿을 때, 우리는 그것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된다. 가치에 관한 문제에서 이것은 굉장히 위험할 수 있다. 과학적, 또는 사실적 참 거짓을 떠난 가치 판단의 문제에서 무엇인가에 대해 안다고 느끼게 되는 순간 가지게 되는 확신은, 소통에 있어 장벽으로 작용하기 시작한다. 확신을 가지는 순간 상대방의 의견은 다른 것이 아닌 틀린 것이 되고, 따라서 잘 들을 수 없다. 즉, 쌍방향으로 소통하는 것이 아닌 단편적으로 ‘가르치려 들기’에 이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가르치려 드는 것이 아닌, 질문을 통해 끊임없이 상호 검토하는 소통의 삶을 살았다. 하지만 가치에 대한 검토의 행위가 사라진다면, 즉 검토하지 않는 사고가 확산된다면 그것은 큰 파급효과로 이어지는데, 이는 그릇된 거대 담론의 형성이다.
소크라테스가 처한 재판의 상황이 대표적인 예시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소크라테스가 죽을죄를 지었다고 투표했다는 점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논리적 허점 투성이인 멜레토스의 고발 –심지어 멜레토스는 기소 내용을 바꿔버리기 까지 한다- 속에서도 사람들의 투표 결과는 사형이라는 처벌의 결론으로 이끈다. 결국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맞는다. 물론 끊임없이 질문하며 자신들의 주장에 트집을 잡는 소크라테스의 태도가 언짢았을 수 있겠지만, 그의 삶은 정말 사형으로 끝나야 마땅했는가? 그릇된 거대담론이 하나의 생명을 앗아가고야 만 것이다.
실제 역사 또한 비판적 소통과 검토 없이 생성된 거대 담론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수많은 유대인들이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처참한 학살을 당했다. 이 비극은 몇몇의 소수에 의해 행해진 것이 아닌, 나치의 명령을 받든 수많은 사람들에 의한 것이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들 모두가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없는 정신적인 문제가 있어서 그러한 끔찍한 일을 저질렀던 것일까? 물론 아닐 것이다. 검토 없이 받아들여진 신념은 어느새 거대 담론으로 평범화 되어, 수백만 명을 죽게 만들었다. 악의 평범성이라고 알려진 이 개념은 소크라테스가 우려하는 삶의 태도와 직접적으로 닿아 있는 듯하다. 지식과 사유는 다르다. 주관적인 통찰에 지적 경험이 더해진 사유와, 껍데기뿐인 지식은 절대 같은 개념이 될 수 없다. 소크라테스가 죽음으로 보여준 것은, 이 껍데기뿐인 지식 만으로 안다고 말하며 담론을 형성하는 것이 아닌, 끊임없는 질문과 소통을 통해 사유를 하는 삶이었다.
둘째로, 끊임없이 검토하는 것만큼이나 소크라테스가 주요하게 추구했던 것은 자신의 철학과 신념대로 살아내는 삶이다. 위대한 이상을 속으로 품고 있다 한들 그 이상을 삶으로 실천하는 것은 얼마나 고된 일인가. 예수나 간디와 같은 성인들이 진정으로 사람들에게 기억될 수 있는 이유도, 삶으로 자신이 진정 추구하는 가치를 드러냈기 때문일 것이다. 마음먹은 대로 행동하지 못하는 인간의 이중성은 인류의 역사와 계속해서 함께해온 딜레마이지만, 소크라테스는 행동으로 논리를 대변함으로써 그가 추구하는 삶의 모습을 강력하게 드러낸다. 그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다. 사람은 살아 있는 이상, 죽음 이후에 대해 절대 알 수 없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렇기에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 체하는 것과 동일하다고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는 정말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의 신념을 관철한다. 타협하지 않는다. 재판장에서조차 시민과 멜레토스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거듭하는 대목을 통해, 소통으로 검토하고자 하는, 신념대로 살아가는 그의 삶은 다시 한번 강조된다. 잘못된 신념을 관철하는 것은 때때로 위험한 일일 수 있겠지만, 그는 알지 못하는 것을 절대 안다고 말하지 않는 자가 아니던가. 소통을 통해 끊임없이 검토하고자 하는 태도는 법의 차원에서나 미덕의 차원에서나 전혀 비판받을 수 없다. 총알로 꿰뚫지 못하는 신념은 존재하는가? 많은 사람들의 생각에 정반대 되는 대답을 내놓는 소크라테스의 삶은, 되려 이상을 실천하지 못하는 오늘날의 독자들에겐 분명 귀감을 준다.
그렇다면 그의 삶과 철학에는 어떤 한계가 존재하는가? 그의 순수한 의도가 대중들에게 온전히 전달되지 못했다는 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소통을 통해 계속해서 검토하고자 했던 그의 삶의 태도는 역설적이게도 사람들에게 역효과를 보였다. 그가 끝없이 질문을 내뱉는 이유는 순수한 ‘검토’를 위한 것이었으나, 시민들은 ‘약한 논변을 강화하며 그것들을 남에게 가르친다’고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것은 그의 소통 방식에 기인한다. 그가 검토할 수 있었던 이유는 소통할 수 있었기 때문이지만, 소통의 방식에서 계속해서 쉽게 받아들이지 않고 질문만을 거듭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불편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자칫 오만해 보일 수도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는 죽기 직전에 ‘변명’을 통해 왜 자신이 그러한 삶을 살았는지에 대한 논리를 펼치지만, 너무 늦었다. 이전부터 같은 목적을 달성하려 하되, 보다 유연한 방식의 소통을 택했으면 어땠을까에 대한 아쉬움은 분명 존재한다. 말하자면 ‘너 자신을 알라’라는 대목이, 무식한 것을 알아라는 것이 아니라, 진정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는 뜻이지만 사람들은 전자로 받아들이기 십상이었던 것이다.
또한 그가 주장하는 ‘정의’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규명되지 않는다는 부분의 한계도 존재한다. 그는 ‘사느냐 죽느냐 보다 정의로운가 그렇지 않은가가 중요’하며(본문 28b), 남겨진 자신의 아들들에게 끊임없는 질문을 통해 괴롭힐 것을 부탁하며 그것이 정의로운 일이라고 주장한다(본문 41e). 그의 죽음으로 부정의함을 드러낼 수 있었을지 몰라도, 결국 정의가 무엇인지, 왜 그런지에 대해 규명하지 못했던 점이 대중들에게 더욱더 부정적이게 인식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한계들은 역으로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강조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는 정말 정의가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말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며, 단순한 예의를 위해 상대방을 인정하는 방식의 소통으로는 진정한 검토가 불가능하리라 여겨 그렇게 소통했을 수도 있다. 즉, 그의 철학과 삶은 대중들에게 양날의 검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겠다. 말하자면, 그는 아테네 인들을 망치러 온 그들의 구원자 -그들의 전통적 가치관을 부단히 무너뜨림과 동시에 새롭게 세워줬기 때문- 였던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죽음 끝에, 역사는 왜 이 철학자를 죽이고야 말았는가에 대한 생각은 마지막 의문으로 이어진다. 과연 역사는 발전하는가? 오랜 역사학자들의 화두이기도 하다.
소크라테스의 삶은 오이디푸스적 투쟁으로 보이는 부분이 존재한다. 그의 최후는 신이 정해준 운명은 아니었지만, 바꿀 수 없는 거대 담론 속에서 그는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투쟁한다. 맞서 싸우고 변명한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새로운 거대 담론이 작은 촛불 하나로부터 시작될 수도 있음을 돌아보게 한다. 하나의 촛불은 수백만의 시위로 번질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것처럼 말이다. 소크라테스의 죽음 이후에 아테네 인들이 부정의를 깨우쳤다는 대목 또한 이와 일맥상통하다. 그런 점에서 그의 죽음은 마냥 허무하고 어리석은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일리아스>의 아킬레우스부터 <변명>의 소크라테스까지. 그리스인들이 생각한 영웅상의 흐름은 오늘날의 우리에게 닿아 질문을 던진다. 이 시대의 영웅은 어때야 하는가? 영웅 이전에, 어떤 삶이 이상적인지에 대한 고민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시대에 따라 추구하는 가치는 달라질 수밖에 없지만, 이 모든 흐름을 관통하는 핵심은 바로 거대한 장벽 앞에서 의지를 가지고 맞서는 인물들이 분명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의 삶을 몇천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다시 되돌아보고, 무엇이 옳은 방향일지에 대해 사고할 수 있다. 고전은 어쩌면 텍스트 그 자체가 아니라, 오늘날의 우리의 사고로 끊임없이 재탄생되는 미완성작 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고전을 새롭게 탄생시키려는 이 시대 독자들의 생각 하나하나는, 그 걸음걸음은 분명 가치 있을 것이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짐짓 퇴보하는 것처럼 보이는 시점이 분명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걸음걸음이 쌓일 때 역사는 조금씩 나아진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그 믿음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