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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민 Jul 09. 2022

우리 일을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헤어질 결심>

마침내 그것이 단일한 '사랑'이었음을 깨달았을 때 찾아온 '붕괴'

// 스포일러가 있는 아주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 글이 깁니다. 영화를 곱씹으며 함께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


/* 들어가기에 앞서


나는 박찬욱이라는 세계를 동경한다. 최애 감독을 뽑으라면 스콜세지도, 요르고스 란티모스도 아닌 단연 박찬욱이다. 실례지만 봉준호는 끼지도 못한다. (내가 뭐라고...) 되돌아보면 그를 향한 나의 짝사랑은 수년 전 <올드보이>를 처음 접한 시절에 시작되었던 것 같다. <올드보이>의 엔딩이 내 영혼에 휘갈긴 감정 - 오대수와 미도의 모호한 시선에서 나오는 공허함 - 은 25년을 살면서 느낀 것 중 '단일한' 것이라고 자부할 수 있다. 미장센이며 플롯의 다채로움이며, 그의 예술을 예찬할 수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내가 그를 사랑하는 가장 큰 까닭은 무엇보다도 배짱이 아닐까 싶다.

<공동경비구역 JSA>로 크나큰 흥행을 거둔 직후에 찍은 영화가 <복수는 나의 것>이라니. 흥행에 눈이 멀어 개성을 잃고 싶지 않아, 대중들이 혐오하는 하드보일드 컬트무비를 만들었다는 이 남자의 예술가 의식에 나는 단숨에 매료됐던 것이다. 대중을 지나치게 의식하지 않으면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꿋꿋이 해나가는 그 발자취는 진정 존경스러웠다. 그의 평론집을 몽땅 사서 읽고 <아가씨> 사운드트랙까지 챙겨 듣는 나의 영화 세계는, 박찬욱의 지분이 팔 할 이상이라 해도 무방하다.

 

군부대 안에서 <박쥐>를 이해하기 위해 괴테의 <파우스트>를 읽으며 '구원'에 대해 몽상하던 시절이 떠오른다. 좀처럼 들려오지 않던 그의 신작 소식에 탕웨이가 캐스팅 확정됐다는 뉴스를 접하고 하루 종일 들떠있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하지만 그렇게 3년을 기다린 영화를 막상 마주하자니 덜컥 두려웠다. <헤어질 결심> 영화 그 자체가 그렇듯, 이 작품을 만나기 직전의 나에게도 사랑과 의심이 공존했다. 혹여나 평범한 숏들도 이 감독이 찍은 거라면 의도가 있었겠지, 하며 작품을 억지로 재창조해낼까 걱정하기도 했다. 또 내가 크게 관심 없는 멜로라니. 게다가 15세 관람가라니! 이 남자 초심 잃은 걸까? 해낼 수 있을까? 겁이 났다.




청불 딱지를 뗀 <헤어질 결심>은,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보여준다. 그 어떤 파격적인 정사씬도 여기서 찾아볼 수 없지만, 해준과 서래가 숨을 맞추는 씬과 같이 우아하고 기품 있게 빚어진 화면들이 전달하는 정서의 깊이는 그 무엇보다 짙다. 그리고 이 영화는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한다. '사랑한다'는 대사 하나 없지만 서래가 그것을 느꼈듯이. 정제된 화법을 관철하는 이 영화의 끝에서 관객은 헤어 나올 수 없는 절절함과 그것을 아우르는 사랑을 '체험'하게 된다.


주저리주저리 쓴 이 머리말은, <헤어질 결심>의 모든 씬을 경이롭게 바라본 스스로에 대한 일종의 변명이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쓰는 글은, 영화 리뷰가 아니고 어쩌면 찬양글 일지도 모르겠다. 나 좋자고 쓰는 글이니까 욕먹어도 상관없으니, 찬양을 시작하려 한다. */  




죄의식과 구원과 같이, 보편적인 인간의 나약함에서 비롯되는 필멸을 묘사하던 박찬욱의 영화 세계 - '복수'라는 주제로 세 편의 영화를 만든 것도 동일한 이유일 것이다 - 는 이번 작품에서 '사랑'으로 그 지경을 확장한다. 왜 하필 사랑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그는 사랑이야 말로 '인간이라는 종족이 무엇인지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관계의 유형'이라고 답했다. 그의 답변은 여전히 모호하기 짝이 없지만 이 글을 통해 조금이나마 그 장막을 들춰 내보고 싶다.


남편의 변사 사건에 연루된 아내를 조사하는 형사의 이야기. 그들은 곧 사랑에 빠지고 진실은 왜곡되어, 모두가 전락할 것이라는 결말이 뻔히 예상이 가기도 한다. 껍데기만 보면 클리셰 그 자체인 이 수사 멜로극에, 균열을 만들어 내는 가장 큰 동력은 '의심'과 '관심' 사이의 팽팽한 장력이다.



먼저 편집 이야기를 해보자. 정교하게 구성된 카메라 워킹과 끊임없이 모든 것을 '낯설게 만드는' 화면 편집 없이는 이 영화를 논할 수 없다.


알프레드 히치콕이 <이창>에서 사용한, 거울과 망원경 렌즈 따위를 통해 간접적으로 인물을 비추는 모습은 이 영화에서 적극 활용된다. 서래의 첫 취조 장면에서 적나라하게 부각되듯, 카메라는 직접적으로 인물의 표정을 비추기를 거부한다. 취조실의 투명벽, 또는 거울의 반사된 모습을 통해 인물을 간접적으로 비출 뿐이다. 이것은 도대체 우리에게 비치는 인물의 실체는 무엇일까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하게 한다.



잠복 중 망원경 렌즈를 통해 서래가 마침내 운다고 판단되는 순간, 드러난 그녀의 미소를 기억할 것이다. 화장실 거울에 비친 그녀는 취조 전 향수를 뿌리며 형사를 유혹을 하려 들기도 한다. 누구냐, 넌.


그녀 집의 벽지 또한 같은 맥락에서 관객을 의심의 현장으로 끌어들인다. 류성희 미술감독은 산처럼 보이면서도 바다처럼 보이기도 하는, 푸르른 벽지를 고르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그것은 바로 서래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사진을 태우는 것은 해준의 불면증을 치료하기 위함인가, 자신의 범죄를 감추기 위함인가? 녹색 옷인지 파란색 옷인지 보는 데에 따라 색이 달라지는 옷을 입은 서래는 해준에게, 나아가 관객에게 그렇게 모호한 존재다.

산이기도 바다이기도


그런가 하면 배고픈 고양이를 보살펴주고, 까마귀 시체를 조심스레 묻어주는 서래의 모습이 병치될 때 의심은 연민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서래는, 여자 친구 때문에 파렴치한 범죄를 저지른 홍산오(박정민 역)를  '죽을 만큼 여자를 사랑한 사람'이라고 바라볼 수 있는 긍휼을 가진 여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화는 다시 한번 전복한다. 절에서의 데이트에서 서래는 해준에게 선글라스를 씌운다. 뭐든지 똑바로 보려고 노력하며, 그러기 위해 늘 인공눈물을 갖고 다니는 형사에게 그녀는 보란 듯이 그림자를 씌워버린다.


다른 영화에서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던 시체의 시선, 물고기의 시선, 나아가 스마트 폰 내부의 시선에서의 '낯설게 만드는' 시점 숏 또한 같은 맥락에 있다. 다시금 저 인물의 눈 속에 뭐가 담겨있는 진실이 무엇일까,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이야기와 그것을 구사하는 영화의 스타일이 구별될 수 없는 것이라면, 이 편집은 분명 관객들 또한 의심의 굴레에 빠뜨리기 위한 영화적 화술이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속에서도 밖에서도 계속해서 진실과 줄타기한다. 이야기 속 이포에서 시작된 안개는, 영화 밖으로 빠져나와 그 서사를 지켜보는 관객의 생각마저 가득 매워 진실을 감추어 버린다.  



이제 영화 속으로 돌아가 보자. 줄타기 끝에 해준은 어떤 선택을 하는가. 그는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기로 한다. 사랑이라고 믿었던 여자는 살인의 주인공이었고 경찰로서의 자부심은 무너졌다. 그는 붕괴됐다.


깊은데 빠뜨려서 아무도 못 찾게 해요.


해준의 헤어질 결심은 이 대사 하나로 압축된다. 핸드폰의 행방을 확인하지도 않고 여자에게 맡긴 뒤 홀연히 그는 퇴장한다. 즉 사건의 마무리를 여자에게 떠넘겨버린다. 이는 그의 상실감을 대변함과 동시에, 영화를 이끌어가는 주체를 서래로 바꾸어 두 번째 큰 이야기를 열어젖히는 것이기도 하다. 늘 그래 왔듯, 박찬욱의 영화에서 여성은 여전히 서사 전개의 주인공이다. 그렇게 이야기는 산에서 시작돼 안개를 거쳐 바다를 향해 간다.


13개월 뒤. 같은 형사의 관할 구역에서 동일한 여자의 남편이 살해되는 '공교로운' 일이 발생한다. 이제 해준에게 중요한 것은, 서래 보다 서래가 이포에 온 이유가 돼버렸다. 옛 기억의 아픔 때문일까? 그는 서래가 범인이어야 하는 이유에 집착한다. 모둠 스시는 핫도그로 바뀌었고, 그는 다짜고짜 내가 그렇게 만만합니까, 를 외치는 남자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서래는 여전히 의문투성이의 여인이다. 아니 감독님. 그래서 안개 투성이인 이 이야기를 도대체 어떻게 맺으시려고요.



박찬욱은 영화의 엔딩 장소인 사자바위 해변으로 가기 직전, 두 인물을 호미산으로 데려간다. 왜 이포에 왔는지 꼬치꼬치 캐묻는 해준과 대비되게 서래는 뜬금없이 산 이야기만 줄줄 늘어놓는다. 외할아버지의 산이라고만 알려진 이곳이 서사적으로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극 중에서 유일하게 눈이 내리는, 안개가 덮여있지 않은 장소. 말하자면 모호함이 걷히고 온전한 진실만이 존재하는 곳임과 동시에, 극 중에서 서래가 '가졌다'라고 할 수 있는 유일한 어떤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녀는 끝내 해준을 품지 못했으니까. 그러한 상징적 공간에서 서래는 해준에게 유일무이한 키스를 선물한다.

 

제 손으로 지어미를 죽일 수밖에 없었던 사람.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준 단일한 사람이라는 이유로 폭력적인 남자에게 자신의 인생을 바친 여자. 마침내 듬직한 남자를 찾았지만 그 남자와 헤어질 결심을 하기 위해 또 다른 망나니와 결혼한. 늘 정착하지 못하고 헤어짐을 반복한 그녀는, 이제 어미의 뼈를 뿌릴 힘조차 없다. 영화 중 단일한 키스씬의 배경이 '호미산'이라는 것은, 의문투성이었던 서래의 진심은 결국 해준을 향한 사랑이었음을 마침내 드러낸다.


관객이 서래의 처지를 이제 막 이해하기 시작하려 할 때쯤, 영화는 곧장 그 마지막을 향해 직행한다. 사자바위 해변 앞에서, 그녀는 해준을 향한 최후의 고백을 늘어놓는다.



"날 사랑한다 말하는 순간 당신의 사랑은 끝났고,

당신의 사랑이 끝나는 순간 나의 사랑은 시작됐어요."


사랑한다 말한 적 없지만 분명 그는 말했다. 자부심이 대단해 늘 진실을 추구해온 경찰이, 자신이 쌓아온 모든 것을 붕괴시키면서 까지 증거를 조작했음을 고백함은, 분명 사랑임을 서래는 느꼈다. 하지만 진실이 드러나자 그는 핸드폰을 내팽개친 채 홀연히 떠나버린다. 그렇게 흘러버린 13개월. 여전히 소외된 여자는 스마 스시를 시켜먹으며, 또 남자가 마지막으로 남긴 사랑의 언어를 들으며 기억을 되뇌이고 있다. 그녀의 사랑은 현재 진행형이다. 그런 그녀의 입에서 남자와 같은 듯 다른, 또 하나의 헤어질 결심이 반복된다.


깊은데 빠뜨려서 아무도 못 찾게 해요.



 이전에 빠트렸던 핸드폰은 이제 해준의 손에 돌아왔다. 붕괴 전으로 돌아가 재수사하라는 그녀의 말과 함께. 그렇다면 깊은 곳에 묻혀버린 또 다른 것 -서래-의 곁에는 무엇이 남았는가.


쉽게 잠들지 못하는 해준을 위해 서래가 숨을 맞춰 주던 장면을 기억한다. 그는 하루 종일 있었던 일을 서래에게 밀어내며 단잠에 빠질 수 있었지만, 이제 그녀는 누구에게 무엇을 밀어낼 수 있는가.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냄새를 맡아주고,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이유 만으로 망나니 남자와 결혼을 했던 서래에게, 해준은 죽음과 바꿀 가치가 있는 단 하나의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죽음과 사랑을 맞바꾸고 자살을 택한 산오는 그녀의 마지막 헤어질 결심에 분명 영감을 주었겠지. 그렇게 일평생 가진 것 하나 없었던 서래는, 평생 해준의 미결 사건이 되어, 그의 기억만큼은 꼭 가지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헤어질 결심>은 결국 사랑 영화다. 이 영화는 사랑을 핑계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그런 류의 영화가 아니다.

물론 사람을 죽인 서래와 불륜을 저지른 해준을 마냥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 볼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늘 그래 왔듯, 박찬욱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정죄하기 위한 예술을 하지 않는다. 자신의 선택이 어떤 결말을 가져올 것인지,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인물 각각의 선택에 공감하다 보면 어느새 공허의 엔딩에 불쑥 다가가 있는 것이 그의 영화가 아니던가. 해준과 서래에게 돌 던질 수 있는 죄 없는 관객은 그 어디에도 없다.    

 

산보다는 바다를, 이야기를 전해 듣기보다는 사진으로 직접 확인하기를 좋아한다고. 다 먹은 스시 그릇을 치우는 과정이 탁탁 들어맞는다고 운명처럼 온전해지는 사랑이 어디 있으리. 죽음과 맞바꿀 용기를 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파도처럼 찾아와 일생 쌓아온 모든 가치관을 한 순간에 붕괴시키는 것이 사랑인 것을.

사랑은 삶을 송두리째 내어주게 할 만큼 숭고하면서도, 지나고 나서야 울부짖으며 깨닫게 하는 비련을 동시에 지닌 모호함의 결정체다. 해준과 서래의 두 헤어질 결심에서 드러나듯, 그것은 인간이라는 종족이 무엇인지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관계의 유형이기도 하다.



 


팽팽한 사랑과 의심의 줄타기의 끝.

마침내 그것이 단일한 사랑이었음을 확신한 순간 그 여자는 거기 없었다.

경찰로서의 자부심, 아내, 그리고 서래.

모든 것이 무너지고 깨어진 이 남자에게 남겨진 것은,

그의 헤어질 결심 -서래가 '사랑'이라고 받아들인, 단 하나의 음성파일- 뿐이다.


그리고 거기 남겨진 서래의 한 마디는,

파도처럼 밀려와 물에 잉크가 서서히 퍼지듯, 해준을 더더욱 붕괴시키고야 말 것이다.



우리 일을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무얼 바라 서래는 홀로 침전했던 것일까.


나는 이토록 사무치는 엔딩을 이제껏 보지 못했다. 앞으로도 볼 수 없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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