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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민 Mar 06. 2023

작은 것들을 위한 시__1

파리에서의 생각 조각들. 다른 말로 TMI 파티

문득 글이 쓰고 싶어졌다.


글을 쓴다는 건 피곤한 일이다. 나에게 정말 소중한 영화나 책, 사람이 아닌 이상 나로 하여금 글을 쓰게 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글이 쓰고 싶어 졌을까. 어느덧 프랑스에 온 지 벌써 6주가 넘었고 그 기간 동안 너무 많은 단어와 글감들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고 있다. 생각을 정리하는 김에 그냥 그 조각조각들을 이어 붙여봐야겠다. 나 이제 꽤나 J거든. 놀란의 메멘토처럼 잘 이어 놓고 보면 꽤나 멋질지도 모르지.


어톤먼트, 문득 이 엔딩이 좋아서


1. 작은 것들


고레에다 히로카즈에 따르면

내가 사랑하는 배우 케이트 블란쳇은 칸 국제영화제 심사위원장을 맡으며, 영화제 내내 '보이지 않는 것들'을 비추는 데 중점을 두었다고 말했다. 큼직 큼직한 사건들이 지배하는 요즘 세상에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잊고 살아 가는지. 슈퍼히어로 무비가 독점하는 영화 시장임에도 불구하고 삶 속에서 우리가 보지 않는, 보려 하지 않는 것들을 보여주는 영화들. 그것에 주목한다는 케이트 블란쳇의 말은 나의 심금을 울렸다.

 

지구 반대편에 왔다.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조차 힘든 세상이지만, 그렇게 나도 보이지 않는 작은 것들을 바라보려 했다. 보려 애쓰면 보이는 아주 작은 것들, 모먼트들. 개개인의 의지는 거대 담론에 잠식되는 듯 보이지만, 진정 사람들에게 필요한 건 지극히 작은 것들에서 비롯된다고 믿는다. 작은 촛불 하나가 대통령을 바꾸듯이,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들이마시고 내뱉는 공기는 분명 존재하듯이.


이 기차칸은 곧 사람이 붐빌 테니 저 앞쪽에 가서 타라고 말해주는 할머니,

무턱대고 자기를 따라 내리는 것 같자 하이델베르크 역에 내리는 게 맞냐고 물어봐주는 옆사람,

바이에른 패스를 끊으면 퓌센에서 버스도 꼭 공짜로 타야 한다고 말해주는 역무원.


마리엔 다리, 독일


길가에 담배꽁초가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기차역이지만. 진정 내 마음을 움직인 건 보이는 것들 너머에 있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그렇다면 오늘의 나는? 작은 것에도 미소와 함께 Merci를 건넬 수 있는 사람인가. 다행히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되고 싶은 어른이 되는 것은 힘들지만 오늘 할 수 있는 자그마한 일들이 있다는 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변화시킬 수 있는 것에 집중해야 하고 그것은 작은 것들에서 비롯된다.



2. 우연


우연과 상상, 운명. 늘 내 귀를 쫑긋하게 하는 단어들.

그리스도인에게 우연은 없지만 운명의 대척점에 있는 의미에서 나는 우연을 믿는다. 정해져 있는 건 싫거든.


늘 그래왔듯이, 여기 살면서도 너무나 많은 우연을 맞닥뜨리고 있다. 대표적인 게 바로 환율이다. 우연한 공장 사고로 뚝 떨어지는 주식의 가치처럼, 화폐의 가치에는 분명 우연이 개입한다. 그 우연으로 인해 지금 유로화가 고점이니 저점이니 부질없는 농담을 하기도 하고 월세 내기를 며칠 미루기도 한다.

여행을 계획할 때도 마찬가지다. 원래는 오로라를 보고 싶어서 북유럽으로 가려다 날씨 때문에 방문할 나라를 바꾸는 건 우연 때문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코엔 형제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나 <파고>에서 그토록 하고 싶었던 이야기도 우연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인간의 모습이었다.


물론 악마적인 우연만 존재하는 건 아니지. 계획에 없던 파리 디즈니 랜드를 가서 다시금 꿈과 동심의 세계를 떠올릴 수 있게 된 건 우연이 준 선물일 테니까.


디즈니가 사랑스러운 건, 여름에도 녹지 않아서


결국 우리의 일상은 '우연'없이 설명될 수 없다. 그리고 찰나의 우연은 또 다른 찰나로 이어져 일생의 중요한 한 페이지를 장식하기도 한다.


날씨처럼 환율처럼 불쑥 찾아오는, 설명되지 않는 불가항력이 우연이라면. 그것을 어떤 필터로 받아들일지, 나아가 어떤 선택을 할지에는 분명 개인의 상상이 개입한다. 나는 N 그 자체인 사람이라 몽상 -어쩌면 망상- 없이는 살 수가 없고 더욱이 여기엔 현실적인 조언을 해주는 소금쟁이도 없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상상을 한다, 때로는 너무 먼 미래에 관해서. 수많은 상상 속에서 건져 올린 하나의 선택은 우연을 만나 어떤 오늘을 만들어 낼까. 그건 분명 마법보다 더 불확실해 보인다.


나는 다만, 이젠 그러한 우연을 마주했을 때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길 기도할 뿐이다.



3. 해도 된다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말씀이 있고, 지킬만한 모든 것 중에 마음을 먼저 지키라는 말씀도 있다. 물론 온전한 믿음이 그대로 행위로 옮겨지는 것이 이상적이겠지만, 행위와 마음. 이 둘은 마치 내게 닭과 달걀과 같다. 맘만 먹고 행동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지만 그렇다고 흑심을 감춘 채 가식 떠는 위선자는 더더욱 혐오스럽다. 무엇보다 나의 선의로 비롯된, 많은 생각 끝의 행동들은 늘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마음이 온전히 전해지지 않는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사람들은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들으니까. 이 과정에서 정말 많은 환멸과 좌절을 느끼곤 했지.  

말하자면 이 세상에는 우리의 선의에 반해 작용하는 운명의 힘이 분명 존재한다. 아쉬가르 파라디의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나 박찬욱의 <복수는 나의 것> 같은 영화를 지배하는 강렬한 에너지는 그 힘에 기인한다. 애석하게도 이 세상에서 늘 주목받는 것은 절대적 진실이 아니니까.


 영화 <다크나이트>
하지만 레이첼, 망나니 같은 저 남자가 바로 다크나이트임을 넌 모르지


이 모든 딜레마의 종지부를 찍은 성경 말씀이 있다.

(잠언 21:2)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정직하여도 여호와는 마음을 감찰하시느니라


결국엔 모든 걸 초월해서 저 말씀 앞에 사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물론 투쟁이 되겠지만, 시공간의 연속인 삶에서 변화시킬 수 있는 오늘을 살아야 한다. 꼿꼿하게, 저 기준으로.


우연히 친구 한 명이 '알 바야?'라는 명언을 날렸다. 때때로 지나치게 남을 의식하는 나에게 꼭 필요한 말이었지. 내가 세상에 무관심하듯 세상도 나에게 무관심하다. '하면 된다' 보다는 '해도 된다'가 맘에 든다. 꼿꼿하다면, 가끔 권정열 노래 가사처럼 한없이 찌질해도 되고 또 엉뚱한 데에 과몰입을 해도 되지. 나는 이런 내가 좋거든. 그래서 애써 회피하지 않는 요즘이다. 그리고 할 말을 하고 산다. 오히려 좋아.


나를 향한 나의 마음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변한다.

나같은 병신은 없지 싶다가도,

그래 그래도 나만한 병신도 없다,는 확신이 있다.


누군가 말했지 나는 자의식 과잉이라고.

하지만 예술가라면 이 정도의 자의식은 있어야 하지 않겠어?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대사처럼 말이야


Frankly, my dear, I don't give a damn.




의식의 흐름대로 제목도 없이 글을 끄적이고 있었는데 마침내 글 제목이 생각났다.

작은 것들을 위한 시 어때, 너무 짜치나? 알 바야? ㅎㅎ

써놓고 보니 모두 내 작은 생각 조각조각들.


방탄을 좋아하지 않지만 저 곡은 좋아한다.

흔한 아이돌 노래 같지만, 한 사람은 저 노래를 듣고 소중한 눈물을 흘리기도 하거든. 그래서 나도 좋아.


아직 아이유의 사랑 시처럼 훌륭한 글은 되지 못했지만, 모래알같이 작은 나의 이야기들은 계속될 것이다.

Bonne journé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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