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나에게 왜 영화를 보냐고 묻는다면
당신은 왜 영화를 보나요.
당신의 삶은 영화가 아닌걸요.
뜬구름 잡는 영화를 봐서 무얼 하나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삶과 영화가 닿아있다고 믿습니다.
늘 말해왔듯, 삶은 시공간의 연속 그 자체입니다.
삶은, 내가 단순히 지금 호흡하고 있음으로 확인되는 일시적인 감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제껏 해온 모든 선택들의 결과로서, 그 자체의 지속성으로 존재합니다.
어쩌면 이것은 애석한 일 일지도 모릅니다. 과거는 바꿀 수 없는 것이니까요.
당신이 죽을 만큼 바보 같은 짓들을 했다 해도, 그 과거 조차 당신의 삶의 일부일테지요.
하지만 삶은 계속되어 왔고, 계속되고 있으며, 계속될 것입니다.
예술은, 영화는, 그 인지의 가능성을 열어줍니다.
예술은 누군가가 현실을 살아온, 견딘 과정이자 결과이고, 그 예술을 소비하는 사람의 시간 역시 흐르니까요. 말하자면 예술은 창작에서 소비에 이르기까지 그 삶이 지속되어 왔다는 증거로 존재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은 거창한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냥 살아가는 것입니다. 시간을 참고 버티는 것입니다. 언뜻 대단해 보이지만 실은 텅 비어버린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일지도 모릅니다. 이 글조차 뜬구름 투성이 이지만 이 글을 쓰기 위해 삶을 되돌아본 내가 있었고, 이 글을 끝으로 사유를 시작할 당신이 있다면, 그렇게 모든 것이 계속될 수 있다면 어쩌면 이 또한 예술일지도 모르지요.
계속되어야 하는 삶의 지속성을 지탱하는 기억에 대해 생각합니다.
기억이란 참 오묘하고도 모호합니다.
기억이야 말로 물리적인 설명이 불가한 모호함의 응집체이니까요.
동일 사건에 대한 기억은 모두 다르고, 한 뼘짜리 추억을 잊는 게 참 쉽지 않습니다.
예를 들자면 저에게 오렌지 태양 아래 땀을 뻘뻘 흘리며 내달리던 기억이 그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기억은 가변적입니다. 절대적인 진실, 그 자체는 사건의 지평선 너머로 사라진 채, 어느샌가 감정만이 남아있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사라진 모든 것들에게, 그리고 사라질 기억들에게. 그럼에도 남아있을 감정이 있다면 그 그것에 아름다움만이 남아있길. 행복하길. 그것이 전부입니다. 깊은 데 빠뜨려서 아무도 못 찾아도 좋으니, 다만 행복하길 바랄 뿐입니다. 힘들지 않게요.
사실 저도 무슨 글을 썼는지 모르겠습니다. 슬픔이 파도처럼 덮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물에 잉크가 퍼지듯이 서서히 물드는 사람도 있지요.
이제 다시 아침이 오면 난 일어나야 하는데, 변하길 바란 모든 것들이 여전히 그대로일까 두렵습니다. 난 모든 걸 망가뜨리는 나쁜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라고 묻고 싶지만, 그렇게 나쁜 사람이 맞다는 것을 이젠 압니다.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렇기에 나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을 바라지조차 않습니다. 그 조차 누구에겐 크나큰 고통일 것 또한 이젠 정말 압니다.
걸어도 걸어도 닿을 것 같지 않는 나의 이상이지만, 그래도 계속해서 걸어가야 합니다. 계속 살아가야 합니다. 걷는 듯 천천히, 먼발치에서 바라보면 웃을 수 있길 바라며.
“바냐 아저씨, 우리 살아가도록 해요. 길고 긴 낮과 긴긴밤의 연속을 살아가는 거예요. 운명이 가져다주는 시련을 참고 견디며 마음의 평화가 없더라도, 지금 이 순간에도 나이 든 후에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 일하도록 해요. 그리고 언젠가 마지막이 오면 얌전히 죽는 거예요. 그리고 저 세상에 가서 얘기해요. 우린 고통받았다고, 울었다고, 괴로웠다고요.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어여삐 여기시겠지요. 그리고 아저씨와 나는 밝고 훌륭하고 꿈과 같은 삶을 보게 되겠지요. 그러면 우린 기쁨에 넘쳐서 미소를 지으며 지금 우리의 불행을 돌아볼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게 드디어 우린 편히 쉴 수 있을 거예요."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