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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민 Jul 27. 2023

내가 추앙한 단일한 축구선수

완벽하지 않아서 아름다웠던 영화. 굿바이 조던 헨더슨

슬픔이 찾아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도무지 없다고 느껴질 때, 글을 쓸 수 있음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누군가 나에게 리버풀에서 가장 좋아하는 축구선수가 누구냐고 물을 때면,

의심의 여지없이 늘 조던 헨더슨이라고 답했다.


축구선수 치고 꽤나 투박한 선수다.

그에게 음바페의 폭발력이나 데브라이너의 천재성 같은 근사한 수식어는 없다.

A매치 77경기 3골이라는 초라한 스탯이 이를 증명한다.


21살의 어린 나이에 리버풀로 이적해 와서 자신과 맞지 않는 포지션에서 뛰며 욕이란 욕은 다 들었지.

투박한 원터치 패스로 제기차기 선수가 아니냐부터 해서,

스티븐 제라드라는 전설적 인물의 후계자가 되기엔 턱없다는 비판이 떠나질 않았다.

 

하지만 헨더슨에게는 그 누구에게도 찾아볼 수 없는 무언가가 있지.

그것은 말로 표현하기가 힘들지만...

디에고 코스타를 표정만으로 압살 하는 깡다구,

미나미노같이 겉도는 동료들의 우승컵 세리머니를 챙겨주며 보인 미소.

무엇보다 챔스 우승이라는 약속을 지킨 뒤, 기진맥진한 채 클롭에게 눈물로 안기는 모습에서.

그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



그런 거 말고, 진짜 이유를 말해보라고?


늘 그래왔듯, 내가 사랑했다고 자부하는 극히 몇 안 되는 것들엔, 모두 이유가 없었다.

헨더슨도 마찬가지다.

그를 사랑하는 특정한 이유가 있었다면, 그 자질을 갖춘 다른 축구 선수로 내 최애를 바꿀 수 있겠지.

하지만 그는 그런 선수가 아니다. 축구력은 한창 부족하지만, 내게 유일무이하다.




그토록 나에게 특별한 한 선수가 리버풀을 떠난다고 한다.

우울해하는 내 모습을 본 프랑스 친구들은, 이제 이강인이 있는 PSG를 응원하라고 영업을 하기도 했다.


축구 선수 한 명이 응원하는 팀을 떠난다고 이토록 우울해진 다는 건 스물 중반을 먹은 성인 남자에겐 꽤나 유치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온갖 슬픈 구절들이 뇌 속을 떠돌아다니는 것이 누군가에겐 오글거리는 처사일 수 도 있겠지. 하지만 그게 진짜 나다.

그리고 난, 늘 가슴 깊이 사랑한 것을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고 과몰입하는 그런 내가 좋다.


리버풀의 홈구장 안필드에는 대문짝 하게 적힌 문구가 있다.

We are Liverpool. This means more.


군대에서 체력시험 특급을 받으려고 오래 달리기를 한창 연습할 때가 떠오른다.

챔스 바르셀로나전 추가시간에 개처럼 뛰어다니던 핸더슨의 모습을 못 봤다면, 난 해내지 못했을 거다.


축구나 영화처럼.

인생에 거대한 변화를 일으키진 않더라도, 삶 속의 작은 것들을 변화시키는 것들은 얼마나 위대한가.

축구는 어쩌면 축구 그 이상이다.

내게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의미한다.




몇몇은 헨더슨이 돈 보고 떠난다고 손가락질한다.

늘 그렇듯 보고 싶은 대로 보는 거겠지.

그런 추태를 정죄하기 전에, 내가 먼저 그런 사람이 되지 않아야 함을 이젠 안다.


내가 비기거나 지고 있을 때에도 늘 리버풀을 응원하듯,

사람들이 아무리 욕을 해도 나는 이 남자를 미워할 자신이 없다.

정말 먼발치에서 아무런 욕심 없이 응원할 수 있다.

추앙한다.



이젠 내가 안필드에 가더라도, 주장 완장을 달고 고함을 지르는 그 선수는 거기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헨더슨도 이젠 내게 잔존하는 것들의 부재가 되었다.

어쩌면 어른이 된다는 것은 이런 것들에 익숙해진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 기억 속에 무수한 사진들처럼,
사랑도 언젠가 추억으로 그친다는 것을
난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만은 추억이 되질 않았습니다.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해 준 당신께 고맙다는 말을 남깁니다.

-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중


어떻게 이별까지 사랑하겠어, 널 사랑하는 거지.

과연 맞는 말이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좋은 이별이란 없는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건 받아들이기 나름이라고, 이제의 나는 생각한다.






리중딱 팔버풀 시절을 묵묵히 견디다,

마침내 리그와 챔스 우승을 모두 일궈낸 리버풀의 캡틴에게.

내가 추앙한 단일한 축구선수에게.

리버풀의 응원가 You will never walk alone만큼 그의 서사를 잘 표현한 곡은 없는 것 같다.

그는 폭풍 속을 묵묵히 걸어가, 마침내 미운 오리에서 백조가 되지 않았는가.


내 마음속의 바다엔 평생 잊지 못할 사람의 이름이 늘 떠다니고 있다.

조던 헨더슨도 늘 그곳에 있을 것이다. 영영 살아 있을 거다.


When you walk through a strom Hold your head up high
폭풍 속을 걸어갈 때에는 고개를 들고 걸으세요.
And don't be afraid of the dark
그리고 어둠을 무서워하지 마세요.
At the end of the storm Is a golden sky
폭풍이 끝난 뒤엔 황금빛 하늘이 있답니다.
And the sweet silver song of a lark
종달새의 아름다운 은빛 노래와 함께

Walk on through the wind
바람을 헤치고 걸어가세요.
Walk on through the rain
비를 헤치며 걸어가세요.
Though your dreams be tossed and blown
당신의 꿈들이 좌절되거나 무너지더라도
Walk on, walk on With hope in your heart
걸어가세요, 계속해서 가슴속에 희망을 품고
And you'll never walk alone
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

You'll never walk alone.
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
You'll never walk alone.
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


<You'll Never Walk Alone> - Gerry & The Pacemakers
리버풀 응원가



어쩌면 이 노래가 단순한 응원가 일지 모르겠지만,

This means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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