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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민 Apr 13. 2024

걍 글이다

의식의 흐름대로 쓰는 오늘의 일기

정제되지 않은 날 것의 글을 한 번쯤 써보고 싶었다.

맞춤법이나 기승전결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그냥 솔직한 글.

코딩하다 API라우트가 엉망이 된, 시뻘건 내 코드가 꼴 보기 싫어 쓰는 글은 절대 아니다. 암튼 아니다.


할리우드 어법에 정교하게 짜 맞춘 웰메이드 무비도 슬슬 질리지 않는가.

싸구려 소설 같은 타란티노의 <펄프픽션>도 칸 황금종려를 받았잖아, 그런 B급 감성도 가끔 필요하다.


타인의 사고방식이 궁금했던 적이 많다. 같은 상황에서 나랑 다른 MBTI는 이럴 때 어떻게 뇌가 반응할까. 몇 초 동안 만이라도 저 사람의 뇌 속에 들어가 생각의 흐름이 어떻게 이어지는지 알 수 있다면 정말 재밌을 것 같다. 나는 평생 나의 뇌 밖에 알 수 없으니.


그래서 문득 글을 읽음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작가의 뇌 속에 들어가 본 듯한 간접 경험을 일으켜 보고 싶었다. 현실에서 할 수 없는 체험을.(이라고 포장을 해보겠다.) 그러니까 이 글은 곧 나의 의식의 흐름이다. 솔직함이다.


그냥 이 영화 꼭 보시라고 대문짝만 하게 넣었습니다. 프롤로그와 무관함


뭘 주저리주저리 써놨는지 추하다.


프롤로그 요약 :  걍 글이다 인마



코딩


코딩을 한다. 물론 재미는 있지만 평생 이걸로만 먹고살고 싶진 않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계유지와 자아실현의 길은 별개인걸 어쩌겠나.

인간이란 종족은 뭘 해도 그 이상을 바랄게 뻔하다.

그러니까 줄 건 줘. 할 건 해야지..


코딩을 하면서 공식문서를 읽고 구글링 끝에 에러를 고쳤을 때의 희열은 찰나에 그친다.

이 작업을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말로 포장하기엔, 너무 간지가 없는 일이다.

숏코딩 잘하는 사람들의 멋에 대한 동경은 일차원적 감탄에 그칠 때가 많다.

이게 정말 가치 있는 일인가? 의미는 자기가 부여하기 나름이지만 뭐.


그러니까, 내가 추구하는 linchpin의 삶은 버그 수정에 시달리는 건 아니었단 말이지.

린치핀하니까 생각났는데 내 인스타 아이디

itslitulinchpin을 안 바꾼 지도 참 오래됐다.

트래비스 스캇 노래에서 매번 나오는 'it's lit!!!'에다가 세스 고딘의 책 제목 <린치핀>을 갖다 붙인 이 이름은, 대체불가능한 존재에 대한 동경을 담은 나의 중2병력이 정점에 이르렀을 때에 지어졌다.


이름대로 살아야 하는데.. <나의 아저씨> 이지안도 언젠가 이름대로 편안함에 이르렀듯이, 나도 눈을 감기 전에 생에 대한 자부심과 함께 죽을 수 있을까? 그릇이 커야 깨진 조각도 큰 법이라고, 저 이름을 바꿀 생각은 아직 없다.


이름대로 살아, 좋은 이름 두고 왜



인간의 마음


자연스레 인스타그램에 들어가 보니 총선이 화두다. 사람들의 반응을 보는 것이 참 재밌는 동시에 역겨웠다. 정치 기사나 SNS의 댓글을 마주하면 기가 막히는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인스타그램 또 지우고 싶게 만든다.


도대체 인간의 마음이란 게 있는가? 를 생각하게 한다.


우리 사회에서 거대 담론은 무척이나 중요하다지만 담론을 형성하는 몇몇 사람들을 보고 있자면 대중은 개돼지라는 <내부자들>의 말이 떠오르는 게 자연스럽다. 돼지 뇌를 가진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괴물은 누구게?' <괴물>, 2023



정말 씨알만큼의 대화조차 통하지 않는 사람들을 직접 마주하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지금 당장은 그냥 무시할 것 같다. 그렇지만 먼 훗날 나의 아이가 저런 사람들에 대한 대처를 물어보면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돼? 정답을 알려줘


정의는 법관의 영원한 짝사랑이자, 닿을 수 없는 궁극의 이데아라는 말이 있지. 그렇다고 해서 이상을 외면하고 내 눈 앞가림만 잘하는 게 어른인가? 더 현명한 어른이자 크리스천은 될 수 없나. 나는 나잇값을 하고 싶다.


이런 고민이 나를 힘들게 한다.

나는 역사는 발전한다고 믿는 사람이고 그 믿음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말에서 그치지 않고 내가 가진 이 신념을 행동으로 대변하기 위해서는, 실제로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적어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럴수록 염세주의는 나를 덮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회의감에 자주 빠지게 된다. 역시 인프피답군, 이라고 웃으며 이상주의자 코스프레 그만하고 제발 너의 현실을 살아라고 말하는 애들도 있지만, 이게 진짜 현실이잖아. 너의 현실이기도 하다. 쿨한 척 가볍게 넘기는 게 오히려 현실도피다.


그럼 도대체 역사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일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뭐가 있냐고?


윤동주는 <쉽게 씌여진 시>를 썼고,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괴물>을 만들었으며.

들라쿠르아는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그렸다


자유 평등 박애


저런 굵직한 일들이 아니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들이 뭔지 이젠 알고 있다. 그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이 이 사회에 더 많다고 해서, 그들이 기준이 되어선 안될 것이다.


나는 영화에서 인물이 잘못된 선택을 하고, 자신의 과오를 바로잡기 위해 뒤늦게 보여주는 그 타락 속의 도덕적 투쟁을 좋아한다.

추락하면서 동시에 위를 바라보는 그 시선, 용서받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이어가는 그 발버둥이 늘 나를 사로잡는다.

박찬욱 영화 <친절한 금자씨>의 금자의 선택과 같다고나 할까. 끝내 구원받지 못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인간의 눈에서는 애썼다고, 수고했다고 말할 수 있는 그 숭고함은 나에게 그토록 와닿는 이유는 뭘까.


멍청한 선택을 했던 순간들 때문인 걸까.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그 결핍을 메우려는 발버둥이 쌓일 때, 결핍은 가능성이 되리라 믿어서일까.


오늘도 되뇐다.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을 믿어보자.

난 별처럼 흠없는 존재가 될 수 없지만

흔들리는 촛불도 결국 어둠을 밝히는 법이야

비록 때 묻었을지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다정함을 보여주면 되는 거야.




내가 할 수 있는 다른 작은 일은 시나리오를 쓰는 일이다. 사실 취미라고 하는 것이 맞겠지만 언젠가 많은 사람에게 울림을 줄 수 있길 바라며 여러 줄을 썼다 지웠다 하는 중이다.

작은 이야기로 무한의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각본을 쓰고 싶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같은 이야기.


며칠 전에 영화 프로덕션 디자인 하는 친구가 추천해 준 영화를 보고 큰 좌절감에 빠지는 일이 있었다. 1944년 빌리 와일더의 <이중 배상>이라는 영화다.


여자의 질문
남자의 대답


시작한 지 10분이 지나서 나오는 저 대사에서 나는 커다란 벽을 마주했다. 저런 대사 나는 못쓴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 나는 한 번 더 좌절했다.

거머쥘 수 없는 것에 대한 욕망의 신기루. 로맨스와 스릴러 사이의 밸런스. 되돌리고자 하는 인물의 투쟁. 자욱한 느와르, 끝나지 않는 서스펜스.


그냥 이거 뭐 내가 하고 싶은 거 다 해놨잖아?

다 섞으면 이도 저도 아닌 개밥 같은 글이 될 줄 알고 글감에만 묵혀 두었던 것들이 하나의 근사한 각본으로 탄생할 수 있다는 사실. 그것은 나에게 희망이지만, 동시에 80년 전에 저 걸작이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큰 절망이기도 하다.


평론가들은 자신이 원하는 영화를 만들지 못해 평론가가 되었다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은 아닌가 보다. 그래도 저 영화랑 내가 구현하고 싶은 영화적 세계는 적어도 비슷했다고, 애써 위로하며 넘겼다.


쉬운 거 없다~



갱생


이 글의 촌스러운 제목 '걍 글이다'는 래퍼 씨잼의 곡 타이틀 ‘걍 음악이다’에서 따왔다. 씨잼이 마약을 했다고 해서 한순간에 팬심을 꺾고 싶진 않았다.

실망은 했지만 더 나은 사람이 되겠지라는 믿음을 가져본다, 나는 갱생을 믿는 사람이니까.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종교를 믿는다고 떠드는 것은 이중 잣대가 아닐 수 없다. 사람이 변할 수 없다면 죄 사함과 회개도 불가능하단 말인가?


남의 티끌이 아닌 내 눈의 들보를 보게 된다.

난 위선자가 되기 싫다. 구원과 변화를 믿는단 말이지.


슬램덩크 정대만을 봐라, 돌아온 탕아의 투쟁에서 느껴지는 폭풍간지에 너는 감탄한 적 없어?



없다면 그저 안타깝지 뭐.

너네들의 그 잘난 상식은, 내겐 통하지 않는다고 ~



인수분해


윤동주가 말했듯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글이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쓰다 보니 넋두리가 돼버린 것 같다. 해내고 싶은 건 많지만 현실의 높은 벽을 체감하는 영혼이 여기 있다.


그래도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보단 낫지. 불어력 코딩력 영화력 생활력 정도면 챙길 건 챙겼잖아. 늘 그래왔듯이 난 답을 찾을 것이다. 어설프게 뛸 바에 멋지게 걸어~


글을 돌아본다. 나의 사고흐름은

코딩-인스타아이디-총선-거대담론-친절한 금자씨-다정함-이중배상-씨잼-정대만 이구나.


나의 마음속 모든 생각들을 수식으로 인수분해 한다면 저 단어들은 그 인수가 될 것이다.


삶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마음은 너무나 복잡한 수식과 같아서, 전개시켜 놓고 보면 나 스스로도 알아볼 수가 없다. 몇몇 순간들, 몇몇 단어를 통해 간신히 설명될 뿐이다.


저 단어들로 나라는 사람의 사고회로를 설명하기엔 '리버풀', 그리고 가장 소중한 것 하나가 빠진 것 같은데, 그게 뭔지 다 밝히면 재미없으니. 미결사건으로 남겨두는 맛도 있어야지.




NBA 전설 르브론 제임스가 헤이터들에게 말했다.

They have to get back to the real world at some point


수많은 욕을 얻어먹은 발언이지만 나는 충분히 뱉을 수 있는 팩트라고 생각한다. 현실을 살아야지.


나에게도 시간이 왔다. 이 싸구려 글을 마무리 짓고 리얼 월드 속 서버 라우팅을 하러 갈 시간 !

(글 어떻게 끝낼지 몰라서 그냥 르브론 호출했다)


이 글만 읽고 내가 글 쓰기로 밥 벌어먹기 힘들겠다는 헤이터가 있다면 언젠가 명문으로 다시 돌아올게^_^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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