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보다 더 불확실한 것)
니스에서 파리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기다리며 글을 끄적이고 있다. 체력 이슈로 인해 뇌가 잘 돌아가지 않지만.. 또 다른 형태로 변해버릴, 가변적인 나의 기억을 있는 그대로 간직하기 위해 글을 쓴다. (아 피곤해..)
칸을 또 다녀왔다. 이번엔 마침내 감격의 뱃지와 함께!
덕분에 레드 카펫도 걷고 셀럽들도 맘껏 봤거니와 무엇보다 질리도록 영화를 볼 수 있어서 행복했다.
베니스, 베를린 영화제도 모두 다녀왔지만 역시나 칸은 칸이다. 프리미어 갈라 상영의 경우, 턱시도를 입지 않고서는 극장에 입장할 수 조차 없다. 뱃지 획득을 위해서 자소서 쓰라는 영화제도 처음이었다. 칸은 뤼미에르 대극장의 위엄과 레드카펫의 규모부터 압도적이지만, 세계 3대 영화제 중 최고 위엄을 자랑하는 까닭은 바로 작품의 퀄리티라고 생각한다. 끝나고 자리에서 엉덩이를 뗄 수 없게 만드는 영화들은 한 해에 손에 꼽지만, 칸에서는 그 마법 같은 경험을 여러 번 했다.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그 작품을 만든 감독, 배우들과 한 자리에서 영화를 보고 기립박수를 보내는 것은 가슴 벅찬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이야 말로 마법 같은 순간이다. 또한 줄을 기다리며 각국에서 온 시네필들과 함께 각자의 영화관을 나누는 것도 분명 소중한 일이다. 덕분에 색다른 영화들, 감독들의 이름들도 얻어갈 수 있었다.
폐막식 다음날 길을 걷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님을 만났다! 이번에 경쟁작 심사위원으로 오셨는데, 짧은 영어를 하셨지만 역시 좋은 어른이라는 것을 느끼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함께 나눈 대화들을 영영 잊지 못할 것 같다.
'이런 영화가 세상을 바꾼다고 믿는다'는 생각을 들게 하는 감독이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바로 그런 사람이기에 나에게 그를 마주친 순간은 너무나 큰 의미다. 노트북으로 집에서 <원더풀 라이프>를 보던 그 시절의 나에게, 삼 년 뒤에 네가 칸에서 고레에다와 대화를 나눌 것이라고 말한다면 헛소리라고 했겠지? 사실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영화는 그림과 달리 초당 24 프레임의 예술이다. 그렇기에 촬영부터 캐스팅, 배우의 연기까지 이르러 수많은 우연이 개입한다. 내 인생도 마치 영화처럼, 수많은 우연과 상상의 결과로 지금의 순간을 마주했음을 인정한다. 비자를 연장하지 않았다면, 교환학생을 오지 않았다면, 사랑하지 않았다면, 재수를 하지 않았다면,... 모든 만약의 순간들을 되돌아봤다. 결론은 그 순간들 끝의 지금의 내가 좋다. 그리고 지금을 있게 한 모든 순간들의 하나님께 감사하다.
내 인생은 어쩌면 마법보다 더 불확실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기대된다.
앞으로의 내 삶도 마치 한 편의 영화 같기를 바란다. 엔딩은 <추락의 해부> 같았으면 좋겠네.
내가 본 15개의 작품 중 나를 사로잡은 다섯 편의 영화를 스포 없이 짧게 소개한다. 승민픽!
1. Kinds of Kindness - 요르고스 란티모스
이 영화는 사실 티저부터 압도적이다. 지금 보시라.
https://youtu.be/8fYtuE_ZJ4E?si=VUNqD1vd0RZd26qB
아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나는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광적인 팬이다. 그의 기괴함을 사랑한다. 보여주고 싶은 것을 보여주는 것에 대해 티끌만큼의 주저함도 없는 그 매력은, 이번 작품에서 폭발한다. 내가 그의 영화에게 기대한 거의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다.
<가여운 것들>로 엠마스톤에게 오스카 트로피를 안긴 란티모스, 그는 디렉팅의 대가인가? 올해 이 작품으로 제시 플레먼스는 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엄숙함이 강조되던 그의 영화 세계는 최근 들어 코미디 코드들이 많이 섞이는 쪽으로 변해가고 있는데, 그 마저도 난 마음에 든다. <Kinds of Kindness>는 세 편의 단편을 엮어놓은 옴니버스 구성으로, 인물들의 기괴한 신념 아래서 각자가 베푸는 친절의 향연들이 이어진다. 167분 동안 몰입이 단 한순간도 깨지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불호를 외쳤지만 나에겐 그저 훌륭했다. 난 이 영화 쿠키 영상이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2. Anora - 션 베이커
이번 황금종려 수상작. 션 베이커는 얼굴만 봐도 기분이 좋아지는 매력을 가진 감독이다. 보이지 않는, 어쩌면 애써 우리가 보려 하지 않는 사회의 소외된 것들을 비추는 감독. 그 시선이 너무나 소중하다. <Anora>는 현대판 신데렐라 서사로, 여성 성 노동자가 러시아 재벌의 아들을 만나며 벌어지는 결혼소동을 그린 작품이다. 시종일관 경쾌한 리듬 속에 웃음을 유발하지만, 그 끝에 기어코 묵직한 한 방을 터뜨린다. 마치 이 엔딩을 위해 앞서 2시간을 왁자지껄 달려온 듯 말이다. 아노라는 꼭 극장에서 보시길 바란다, 아마 못 일어날걸?
3. Bird - 안드레아 아놀드
주인공은 오빠 Hunter, 아빠 Bug와 함께 무단 점거를 하며 살아가는 사춘기 소녀다. 아빠는 아이들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그녀에게 Bird가 나타난다. 좁은 화면비, 지독한 헨드헬드 촬영. 여성 감독 안드레아 아놀드가 들려주는 한 소녀의 성장기.
개인적으로 Bird를 맡은 프란츠 로고스키의 연기가 올해 칸에서 가장 좋았다. 그가 내뱉은 'Everything's gonna be alright..' 이라는 유치한 대사에서 나는 울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4. Parthenope - 파올로 소렌티노
이탈리아 영화는 해봐야 루카 구아다니노 작품 정도밖에 보지 못했던 나인지라 부끄럽게도 파올로 소렌티노 작품은 처음이었다. 사실 파르테노페 티켓도 없었는데 구걸 끝에 운 좋게 볼 수 있었다. (티켓 구걸은 칸의 전통 아니던가?)
나폴리 도시의 역사를 두고 파르테노페라는 신화 속 인물을 재해석한다. 그녀의 외적 아름다움과 남성의 시선적 권력 간의 관계에 대해 갑론을박이 벌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난 적어도 파르테노페라는 여성 캐릭터가 서사를 위해 희생당하지 않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도시의 역사를 다룬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렇다. 때로는 쓸데없이 유려하다고 보이는 연출도 많았지만 화면과 음악은 정말 아름다웠다. 꼭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 생각이 드는 영화는 대게 훌륭한 법이다.
5. Emilia Perez - 자크 오디아르
악명 높은 보스가 여성이 되어 영원히 사라지길 원한다. 그토록 꿈꿔왔던 여자가 되면 그는 조용히 완전히 영원히 사라질 수 있을까? 시놉시스부터 일단 재밌잖아..
뮤지컬 영화지만 장르적 특성이 영화의 몰입을 전혀 방해하지 않는다. 단순한 교훈극으로 이어지나 싶다가도 끝내 날카로운 칼을 뽑아 든다. 올해 심사위원상, 여우주연상 수상작. 이의 없음!
영어 듣느라 불어 자막 보느라 힘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해 칸에서의 기억은 내 생에 손꼽힐 행복이다. 영화가 세상을 구원할 수는 없을지 몰라도, 분명 세상을 바꿀 수는 있다. 인류가 쌓아가는 어둠의 역사에 우리는 가끔 좌절하기도 하지만, 여전히 <아노라> 같은 영화는 만들어지고 있지 않은가.
누군가 인류에게 더 이상의 희망이 있냐 묻거든 고개를 들어 고레에다의 영화를, 션 베이커의 영화를 보게 하라. 영화가 일으킬 수 있는 것은 대단한 것이 아닌, 일상 속 작은 변화이기에. 더욱더 가치 있다.
그러니 시네마여, 영원하라. Vive le Ciném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