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승민 Oct 17. 2024

아무도 몰라서는 안되기에.
<아무도 모른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도 모른다. 이 아이들이 견뎌내야 했을 감정의 깊이를.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비극이 왜 일어나야 했는지도 알 수가 없다. 무엇보다 이 적막의 끝에서, 우리는 과연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여전히 모른다. 바로 그 지점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이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을 것이다.

1988년 도쿄에서 일어난 네 아이 방치 사건을 다루는 <아무도 모른다>는 '그저 비추는 영화'다. 무책임한 부모, 불안정한 사회 시스템을 꼬집어 비판하지 않는다. 참된 어른이라면 어때야 하는지, 법률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제언하지도 않는다. 그저 묵묵히 아이들의 공간 속에서 함께 호흡하며 그 일상을 보여준다. 성탄 케이크를 사는 씬이 대표적이다. 아이들의 눈물을 끼워 넣어 무책임한 엄마의 모습과 교차 편집했더라면, 관객의 손가락질을 통해 크리스마스까지 돌아온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엄마를 비난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카메라는 마감시간까지 추위에 떨며, 케이크 가격이 떨어지길 기다리는 아키라의 모습을 먼발치에서 비출 뿐이다.


 이 작품은 각본에서도 중립의 시선을 관철한다. 이른바 '아이의 슬픈 독백'을 활용하면 관객의 감정을 몰아세울 수 있었겠지만, 고레에다는 자신이 섣불리 쓴 독백조차 아이들의 감정을 이해하는 척하는 오만일 수 있음을 인지한 듯하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독백이 아닌 아이들 간의 대화가 주를 이룬다.

'이것도 키울 수 있을까?'

'누가 버리고 갔나 봐. 불쌍하다.' 

 버려진 자신들이 아닌, 길가의 씨앗들을 가엾게 바라볼 수 있는 긍휼이여. 아이들은 -책임지지 않는 어른들과 달리- 자신들이 먹은 컵라면 그릇에 그 버려진 씨앗을 심기로 한다. 그렇게 내내 영화는 상실 속에서도 삶을 살아내는 그들의 모습을 곡진히 전달한다.


 그 차분한 시선 덕분일까. 어른들과 사회의 괘씸함보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매들 사이에 있었을 감정의 공유들을, 그리고 그것들이 상실되어 갔을 과정들을 상상할 수 있었다. <아무도 모른다>에는 조커와 다크나이트 같은 명백한 흑백 구도가 없다. 그렇기에 어떠한 구원도, 카타르시스도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그렇게 흑백이 절묘하게 섞인 잿빛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기에, 그 시선은 영화 속 이야기를 우리의 삶으로 끌어당기는 인력으로 작용한다. 비로소 이 사회의 일부로 존재하는 나에 관해, 나아가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성찰케 한다. 


 영화가 세상을 구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영화가 삶의 작은 부분들을 바꿀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아무도 모른다>는 그것을 해내는, 작지만 큰 영화다. 영화의 제목처럼 현실의 벽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아무도 모른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하지만 마냥 탄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고레에다는 이 비극을 영화로 만들어 세상에 알리지 않았는가. 감독으로서 그 누구도 알고 싶어 하지 않은 이야기를 대중 예술인 영화로 탄생시키는 데에는 커다란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행동으로 논리를 대변했다. 이 시간 이 장소에서 우리 각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분명히 있다. 불쑥 커버려 다른 가방으로 옮겨 담겨야만 했던, 막내 유키의 눈망울을 기억하자.



작가의 이전글 구의 증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