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재우 Jun 30. 2019

#221 아름답게 사는 건, 내 마음대로 되니까

슬픔을 씻어내는 방법, 하나레이 베이

그녀는 피아노를 잘 쳤다. 악보는 볼 줄 몰랐지만 음을 들으면 따라칠 수 있는 드문 재주가 있었다. 스무살 즈음, 아이가 생겨버렸다. 아들이었다. 아이 아버지는 음악을 하던 사람이었는데, 남편 역할과 아버지 역할로 평가하자면 낙제점도 아까웠다. 마약을 했고, 마약을 하며 다른 여자와 자다가 죽었다. 그나마 다행히 사망 보험금이 나왔다. 그녀는 보험금으로 피아노가 있는 바를 차렸다. 아이 아빠를 미워했으므로, 그 아이와도 관계가 좋진 않았으나, 억척스럽게 열심히 키웠다. 아이가 자라 스무살 즈음 되었을 무렵 서핑에 재미를 붙였다. 돈을 달라고 했다. 하와이에 가서 파도를 타고 싶다면서. 그녀는 돈을 주었고, 아이는 하와이로 갔다. 그리고 거기서 상어에게 물려 죽었다. 전화를 받자 마자 그녀는 하와이로 날아갔다.  


<하나레이 베이>의 이야기다. 하루키의 단편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다. 바다처럼 새파란 포스터에 적혀있는 카피 “슬픔이 그려낸 눈부신 환상”. 그 포스터 안에는 아이를 잃은 주인공 ‘사치’가 무릎까지 파도에 잠긴 채 서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 그리고 그 슬픔을 씻어내는 시간에 대한 이야기. 감독은 절제된 시선으로 하루키의 원작을 재현했다. 파란색 물감 하나로 그린 수채화처럼 담담한 영상의 작품이었다.  


영화 가운데 이런 대목이 나온다. 아들을 잃은 뒤 매년 같은 시기에 하와이를 찾아 “하나레이 베이”에 머무는 사치. 10년 쯤 지난 후에 아들 또래의 서퍼들을 만난다. 하와이에 머무르는 일본 사람이 신기했는지 서퍼가 묻는다. “아줌마는 어떤 사람이에요?” 그러자 그녀는 친절하지도, 불친절하지도 않은 특유의 말투로 이렇게 답한다. 대강 이런 말이었다.  


“꿈이 있었는데 아이가 일찍 생겨버려서 결혼을 했어. 그런데 남편은 마약을 하고 다른 여자와 자다가 죽었어. 보험금을 타서 그걸로 가게를 차려 아이를 키웠어. 그런데 그 아이는…” 


거기까지 이야기하고 사치는 입을 다문다. 스무살 즈음의 서퍼들은 놀란 표정이 된다. 하와이의 바에서 피아노를 치는, 현지인들과 따뜻하게 인사하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여성을 보며 상상할 수 있는 ‘어떤 사람’의 내러티브와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의 주제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대사는 아니었지만, 영화관에서 나와 터벅터벅 걸어오는 내내 나는 왜인지 자꾸 그 장면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마흔 살 즈음의 사치. 꿈이 있었지만 아이가 생겨 포기했고, 결혼을 했지만 남편이 죽었고, 남편이 남긴 돈으로 아이를 키웠지만 결국 아이마저 잃었다. 파도의 손끝이 닿는 지점에 쌓은 모래성처럼, 인생에서 애써 만들어 놓은 모든 것이 차례로 허물어졌다. 그런 그녀는 어떤 심정으로 살아왔을까.  


우리는 삶의 본질이 누적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적어도 누적이 되어야 ‘정상’이라고 생각한다. 나이가 들수록 돈이 모이고, 아파트 평수가 커지고, 그밖에 삶에서 중요한 모든 것들이 점점 늘어나는 거라고 말이다. 여기에는, 가족이나 친구, 직급이나 사회적인 성공도 당연히 포함될 것이다. 보석들을 하나하나 주워모아 나만의 보석함을 채워가는 삶. 그렇게 굴곡없이 순탄하게 우상향하는 인생 그래프를 우리는 ‘성장’이라고 부른다.  


물론 그런 평탄하게 성장하는 스타일의 삶을 바라지 않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상대적으로 드물지 않을까 하고 조심스럽게 예상할 뿐이다. 혹은 젊은 한 때 잠깐 ‘화끈하게 살거야’라고 생각했다가 머지 않아 접게 되거나. <하나레이 베이>에서 하와이 현지인으로부터 ‘골빈 서퍼들’이라는 욕까지 들은 긴 머리의 젊은이도 도쿄로 돌아와 롯폰기의 스타벅스에 앉아 있을 때는 '잘 다린 랄프 로렌 셔츠에 신상품 면바지’를 입고서 이렇게 말했다. “이래 보여도 저는 할 일은 다 하고 다닌다니까요. 서핑은 가끔씩 주말에 하고 있긴 한데 취직 문제도 있고 해서 슬슬 그만두려고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삶의 본질은 우리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 그렇게만 되었다면 천국을 꿈꿀 이유도, 기도를 할 까닭도 없을 것이다. 웃었다가 싸웠다가, 얻었다가 잃었다가,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반복하는 것이 삶인데 그 변덕에는 상한가와 하한가 마저 없다. 사치처럼 삶의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무수히 존재할 뿐만 아니라, 우리들 자신도 언제든 사치가 될 수 있다. 듣기에 달콤한 말은 확실히 아니지만, 단호히 부정할 수 있는 말 또한 결코 아니다. 쌓았던 모든 모래성이 허물어지고, 모아 왔던 모든 보석들이 사라졌을 때 ‘성장’을 바라며 살아온 우리는 삶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나는 사치의 태도를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진정한 성장이란 우리의 ‘내면'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사치는 우아하다. 단호하고, 강하며, 정이 있고, 우아하다. 다소 무뚝뚝해 보이지만, 그것은 그녀가 사랑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가지고 있는 큰 사랑이 표면으로 배어나오지 못할 만큼 힘들게 살았기 때문이다. 그 모든 그녀의 ‘내면’의 총합이 평소 그녀의 태도가 되어 드러나고, ‘한 성격 하는 아줌마’라는 평과 피아노 가게 주인의 환대와, 하와이 경찰이 10년 동안 해마다 그녀를 찾는 따스함으로 보답 받는다. 꿈, 결혼, 아이. 그녀의 인생에서 갖고 싶었을 모든 것이 때로는 아름답고, 때로는 그렇지 못한 형태로 왔다가 사라졌지만, 그녀에게는 아무 것도 남지 않은 것이 아니다. 사치라는 한 사람의 성숙하고 깊이있는 내면이, 남았다.  


어릴 적에 시골 외할머니 댁에 가면 컴컴한 광에 시루가 있었다. 콩나물을 기르는 시루였다. 할머니는 그 시루에 천을 뒤집어 씌워놓곤 했는데, 나에게 그 천을 걷고 물을 주라고 시키시곤 했다. 하루에 몇 번이나 말이다. 콩나물을 집에서 키워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거기에 주는 물은 난초나 꽃처럼 분무기로 조심스럽게 주지 않는다. 바가지에 물을 떠서 콩나물 위에, 한여름철 등목을 하는 사람에게 물을 끼얹듯 그렇게 붓는다. ‘쏴아’ 하고 쏟아부은 그 많은 물은 고스란히 밑으로 빠지지만, 그러는 사이 신기하게도 콩나물은 자란다. 작은 콩이 길고 굵은 콩나물로 변해있다. 


어쩌면 삶의 본질은 ‘누적’이 맞을지도 모른다. ‘성장’하는 것이 ‘정상’인지도 모른다. 다만 그 성장의 대상이 내면의 보석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말이다.  <데미안>의 헤르만 헤세는 대단한 명성을 얻은 작가였지만,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에 공식적으로 반대했다. 그 때문에 전쟁의 광분이 뜨거웠던 독일에서 ‘조국의 배신자’라는 딱지가 붙었고 모든 저서가 판매금지 당했다. 이어 부친이 사망했고, 아내에게 정신분열증이 왔고, 아이를 잃을 위기에 처했다. 보석함의 보석들이 모두 흩어져갈 때 헤세는 칼 융으로부터 정신치료를 받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의 나이 마흔살 때의 일이다. 헤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유감스럽게도 쉽고 편안하게 사는 법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한가지만은 늘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었는데 그건 아름답게 사는 것이다. "













매거진의 이전글 #220 '하고 싶은 일'로 뛰어내리는 3가지 방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