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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민주 Jul 23. 2023

4. 산책자의 시선으로 관찰하고 감각하기

『발터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 그램 질로크, 효형 출판

벤야민이 기괴한 이미지로 관찰한 것처럼 “불구자는 기형적 신체를 보여주는 백일몽을 즐기는 행인들을 놀라게 함으로써 즐거워한다.”

『발터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 p70




발터 벤야민은 나폴리는 자본주의가 발달된 파리와 영국에 비해 야만적인 곳이라며 나폴리의 특징을 '다공성'으로 설명한다. 다공성이라는 것은 표면에 빈틈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멍이 다닥다닥 있는 것을 상상해보면 소름이 돋는다. 분명히 우리에게 쾌감보다는 불쾌감을 주는 요소다. 


 자본주의와 정반대의 특징인 거다. 자본주의는 표면을 매끄럽게 만든다. 자본을 증식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것들을 제거하고 메꾸기 때문이다. 우리 눈에 띄지 않는 방식으로 자본은 교묘하게 작업한다. 정신질환자들은 정신병원에, 매춘부들은 밤의 거리로, 거지들은 다리 아래로, 보이지 않는 곳으로 밀어 넣는다. 직접 찾아가지 않으면 보기 쉽지 않다.


 옛날에는 지하철에 노숙하시는 분들도 꽤 많았고 필자가 초등학교, 중학교를 다닐 때까지만 해도 장애를 가진 친구들이 학급에 함께 있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소위 정상 학생과 장애 학생의 학교 자체가 분리 되었다. (지금은 시스템상 장애 학생이 한 반에 한 명씩은 배정되지만 그 뒤에 어떻게 공생할 것인가에 대한 윤리는 없다. 그냥 함께 관리한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 자본주의의 권력 덕분에(?) 우리는 아주 깨끗하고 번듯한 거리와 사람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청결하다는 것은 우리에게 쾌감을 준다. 그런데 우리는 쾌감을 '좋다'고 느끼기 때문에 청결한 것은 좋은 것이라는 헐거운 정의를 의심하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모두가 청결을 구호로 외치고 청결로 단일화가 된 만큼 우리는 청결하지 못한 것, 깨끗하지 못한 것, 뭔가 울퉁불퉁한 것들에 대해 더 심한 불쾌감을 느끼게 되는 것 같다. 거기에 코로나 바이스러스까지 가세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세균의 위생까지도 상상하게 됐다. 청결이 가져오는 폭력이랄까.


심지어 최근에는 버스 손잡이를 손끝으로 잡고 있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처음에는 왜 저렇게 위태롭게 잡고 있는지 의아했다. 생각해보니 타인과 최대한 닿는 면적을 줄이고 싶었던 마음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왠지 그 마음이 이해가 되는 건 나 역시도 그에게 공감하고 있다는 증거다. 청결하고 싶을수록 남들과 최대한 접촉하지 않으려는 마음, '나'가 아니면 이제는 섞이거나 닿기도 싫어져 버린 이 감각! 그리고 그 감각은 이제 각종 SNS에 돌아다니는 현란한, 소위 '감각적인' 감각들로 대체되어 버렸다.




'비참하고 괴상한 사람들은 현대 문명의 얄팍한 표면 뒤로 봉인되지 않고 충격적으로 전시된다.'

『발터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 p70




하지만 우리가 불쾌하다고 느끼는 것들을 제거한 채로 살아갈 수는 없다. 문득문득 마주친다. 한여름에도 겨울 외투를 입고 다니며 거리에서 잠을 자는 노숙자들, 땀에 쩔어 있는 채로 김밥을 사러 온 아저씨, 다소 헝크러진 머리에 때가 낀 손톱을 하고 있는 노동자들, 지하철 계단을 올라가기 위해 휠체어 리프트를 타야하는 장애인들, 1호선에서 보이던 혼잣말을 하며 웃던 사람. 


이들을 마주할 때 우리는 무심코 외면하지만서도 동시에 이상한 기분을 느낀다. 산책자의 시선으로 관찰하다보면 이런 낯선 감각들이 더 잘 발견된다. 산책자는 가야하는 곳이 없다. 빙빙 걷다가 시선에 걸리는 곳을 응시할 뿐이다. 길을 잃어도 좋다. 


자본주의 입장에서는 안타깝게도 모든 표면을 메꿀 수는 없다. 때문에 우리는 종종 다공성의 구멍에 빠진다. 순간 이상함을 감각한다. "어?"라는 불쾌한 순간들. 외면하고 싶은 순간들 말이다. 벤야민은 이런 낯선 감각들을 섬광이라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그 길을 따라가 산책자가 되어보는 수밖에 없다. 대체 저게 왜 나의 눈에, 나의 귀에, 나의 신체에 걸렸는지를 스스로 물으며 길을 걸어보는 수밖에.


벤야민을 공부하다 보니 문화적 현상, 사람들의 욕망이 물질 세계로 드러나는구나를 느끼게 된다. 예를 들어 자본과 소유에 대한 욕망이 '아케이드'로 드러나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산책자의 시선으로 관찰하고 감각하다보면 익숙했던 행동과 물건들이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보이기 시작하는데, 그 감각을 따라 세상을 이해해보는 것도 꽤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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