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란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에 대한 기록이다. 하지만 모든 역사적 사실이 기록될 수 없다는 점을 생각해보니 궁금해지는 것이 있다. 많은 사건들 중 선택되어 기록된 것들은 과연 누가 무엇을 기준으로 간택된 것일까?
역사는 승리자의 기록이라는 말이 있다. 벤야민은 심지어 모든 역사는 야만의 역사라고 이야기한다. 역사적 승리자들을 시간의 선분을 그어놓고 과거로 거슬러 가며 자신들의 승리를 나타내는 변곡점들을 발견해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건들을 이어 스토리를 만들어내면 역사가 탄생한다. 선택된 사건들은 가장 진보된 '지금'을 형성해내는 원인이다.
우리가 역사를 기억하고 바라보는 방식과 개인이 자신의 역사를 기억하는 방식이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 자신의 역사를 떠올릴 때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간다. '이때 뭐했지?' 라는 질문을 던지고 과거를 역추적해간다. 초등학생때, 중학생 때, 고등학생 때를 상기해본다. 우리의 기억에 떠오른 사건들을 가지고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낸다.
벤야민은 의지적 기억이 아닌 무의지적 기억을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힘을 들여서 기억해낼 수 있는 시건들은 의지적인 기억에 해당된다. 무의지적인 기억은 우리의 의지로는 기억해낼 수 없는데 안간힘을 쓰려고 해도 떠오르지 않는다. 어떤 시공간을 만나 섬광처럼 떠오르는 기억이다.
벤야민은 베를린에서의 유년시절을 회상할 때 두 가지 방법을 쓴다. 첫 번째로는 시간적인 회귀이다. 즉 유년시절로 돌아가는 거다. 하지만 그는 시간적인 선분을 그어 다시 현시점으로 거슬러 올라오지 않는다. 그러니까 과거로 돌아갈 뿐 그 다음엔 어떤 사건이 일어나 지금의 자신이 됐는지를 복기하지는 않는다.
그는 베를린이라는 공간을 배회하며 과거로 돌아간다. 이것이 바로 두 번째 방법이다. 아주 느린 거북이처럼 베를린을 산책 한다. 산책을 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았던 공간들, 기억의 저편으로 보내져버린 기억들을 소환해낸다.
벤야민은 주로 두 번째 방법을 이용해 기억한다. 건물들 간의 관계를 읽는다거나 자신과 건물의 관계를 떠올리며 공간을 매개로 대상들간의 관계를 기억해내는 것이다. 시간이라는 것은 누군가와 함께 보낼 수는 있다. 하지만 시간의 주체가 둘이 될 수는 없는 것처럼 누군가와 시간을 공유할 수는 없다. 자신이 겪은 동일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타인과 공유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우리는 각자의 시간을 살아갈 뿐이다. 시간을 거슬러 자신의 역사를 기억해내는 것은 '나'라는 개인에게 몰두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공간을 기준삼아 기억을 떠올린다는 것은 내가 맺고 있던 관계가 무엇인지를 떠올려볼 수 있는 거다.
벤야민이 시간과 공간을 모두 통과하며 자신의 유년시절을 떠올린 것을 기억한다. 우리는 공간적으로 사유하면서도 기억에 있어서만큼은 시간을 기준으로 소환한다. 나도 역시 공간을 기준으로 무언가를 기억해낸다는 게 낯설게 느껴진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항상 '공간'에 있으면서 공간에게 아름다운 배경 이상의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
벤야민은 이야기꾼이란 전체를 볼 수 있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한다. 개인의 일화를 역사적으로 구성해낼 때 우리는 이야기꾼이 될 수 없는 거다. 전체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승리한 사건만이 위상을 얻기 때문이다.
위화 작가의 『인생』에 나오는 푸구이가 생각난다. 당시에 책을 읽을 때는 푸구이가 절망적인 사건들을 겪고도 어떻게 죽지 않을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벤야민의 기억법을 읽고 나니 푸구이에게는 승리와 패배의 기억을 나누는 기준이 없었음을 알게 되었다. 승리와 패배를 나누는 기억의 기준이 없었고 그로 인해 스스로 우월감을 느끼거나 자기 연민을 하지 않을 수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시간과 공간을 모두 활용해서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본다면 우월한 기억만으로 역사를 써가는 것을 넘어서 자기 삶 전체를 온전히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