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와 개념이라는 양극단을 탐색하며 현대 미술과 미학에서 활동하는 작가는 그 관계에 대하여 각자의 이론을 발전시켰다. 뒤샹은 선행된 개념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개념과 현대 미술의 본질적 관계를 상기시켰는데, 이러한 측면에서 현대 미술을 감상하는 관객은 작품에 얽혀 있는 시간성을 고려해야 하는 처지에 처하게 된다. 특정한 개념을 기반으로 하고 그것이 이끌고 가는 현대 미술은 두 가지의 시간, 즉 작품이 창안되고 작업 되는 이전의 시간이 있는 반면에 작품이 이로 인해 도래할 개념을 향해 가는 이후의 시간으로 나뉜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대 미술의 관객은 분리된 시간을 함께 끌어안지 못하고 전체적인 이해가 불가능해진 무력한 상태에 처하게 된다. 마치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정사≫ 속 인물들이 이야기 속 사건을 뒤늦게 이해하거나 파악하여 후회를 느끼고 멜랑콜리아에 이르듯이, 현대 미술 작품을 마주한 관객도 그 작품을 이해하기에는 자신이 너무 이르거나 늦게 도착했다고 생각하게 된다. 즉 작가가 착상부터 시작해서 밟은 개념적 변환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늦었고, 이 작품이 앞으로 새롭게 관계를 맺을 개념을 예측하기에는 너무 이른 모호한 공간에 처하게 된다는 것이다. 되려 현대 영화나 소설은 이러한 관객의 무력한 상태를 활용하려 하였고 그 예시로 알랭 로브그리예라는 작가는 독서라는 행위가 소설 속 세계를 만드는 과정에 이바지한다는 점을 강조하며 독자가 스스로가 주어진 대상을 창조적으로 받아들이는 훈련을 하게끔 했다. 이는 곧 개념적인 현대 미술이 관객이 창조에 참여할 것을 요구하고, 이를 기반으로 관객 스스로 세계를 창작하며 자신의 삶까지 창조할 힘을 배양하게 되는 것과 같다.
칸트는 『판단력 비판』에서 이미 미의 논의에서 다룬 이미지와 개념 사이의 공간에 관하여 숭고라는 개념을 통해 기존의 미의 법칙과 기준으로 설명되지 않는 경우에 대해 논한다. 그는 단적으로 큰 것을 숭고하다고 일컫는데, ‘단적으로 크다’라는 말은 ‘절대적으로 크다’라는 말과 같다. 모든 비교나 상대성을 넘어서서 큰 것으로, 마음속에 내재해있는 기준을 넘어설 정도의 크기의 대상을 가리킨다. ‘Apprehension’과 ‘comprehension’은 대상의 크기를 포착하는 데 필요한 것으로, 전자는 무한히 진행될 수 있으나 후자는 전자가 진행되면 될수록 곧 최대 범위, 즉 한도에 도달한다. 인간의 마음은 하나의 통일된 대상을 그리고 포착할 수 있는 범위를 지니고 있는데, 어떤 대상이 그 범위를 넘어서면서 ‘comprehension’이 불가능해지는 순간 숭고라는 감정이 튀어 오른다. 칸트는 숭고를 수학적 숭고와 역학적 숭고로 구분했고 수학적 숭고는 분량과 성질, 크기의 범주에서 느껴진 숭고를 뜻하지만 역학적 숭고는 양상과 힘의 범주에서 느껴진 숭고를 뜻한다. 전자는 대상의 양적 크기를 중심으로 한다면 후자는 대상의 위력의 크기가 압도적일 때 느껴진다. 즉 숭고란 거대하거나 압도적인 힘 앞에서 위축되고 작아지면서 느꼈던 불쾌와 고통이 쾌감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수반한다. 숭고의 순간에서 상상력은 마비되면서 상상력과 지성 사이의 조화는 파열되지만, 새로운 인식 능력의 능동적인 활동이 시작되며 오히려 인간은 무한성의 이념을 그리게 된다.
들뢰즈는 칸트와 다른 방식으로 사유를 정의하면서 감성론을 펼쳤다. 감성에 의해 포착되는 것은 쉽게 재인식(recognize)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나눌 수 있는데, 전자에 해당하는 행위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유로 정의될 수 없다. 쉽게 재인식될 수 없는 것은 감각으로, 들뢰즈는 이러한 감각이 끊임없는 생성에 잠겨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감각의 가변적이고 현혹하는 본질을 강조하며 지성과 지성만이 파악할 수 있는 존재(being)의 세계를 중요시한 플라톤의 입장과 분명히 반대되는 입장이다. 들뢰즈는 플라톤주의를 높게 평가하면서도 그가 의도치 않게 드러낸 점들의 역전 내지는 변형을 내세우며, 감성이 세계를 포착하거나 파악하지 못하여 지성을 포함한 타 인식능력의 힘을 빌리는 현상을 가리켜 이를 인식 능력 또는 감성의 초월적 실행이라고 칭했다. 그는 인식 능력 간 초월적 실행이 일어나면서 감성은 비로소 확장되고 진정한 사유가 일어난다는 면에서 인간의 마음은 연쇄적으로 연결된 조직도에 가까울 것이라 믿었는데, 이러한 지점에서 유기적으로 작동하는 인식 능력의 조직도에 따른 칸트와 명확히 구별된다. 들뢰즈는 플라톤을 높게 평가하면서도 그와 달리 감성의 대상이 고유하게 존재한다고 했는데, 여기서 감성의 고유한 대상이 되는 것은 감각되는 질(quality) 또는 양(quantity)이 아니라 오히려 “감각되어야 할 어떤 것”이다. 근대주의의 도래와 함께 양적 세계화가 등장하면서 이 세계에 존재하는 일차적인 성질은 질적인 것이 아닌 양적이라는 환원적 사고가 나타났다. 들뢰즈는 질과 양의 대립적 구도는 피상적 차원에만 머물러 있는 논의일 뿐, 진정한 감성적인 것의 존재란 불균질성의 형식으로 온도나 속도 같은 내포적 강도(intensity)라고 주장했다. 이 크기는 외연적인 양이 아니라 특정 순간과 지점에서 포착되는 것이므로, 경험적인 질과 양을 산출하고 사라진다고 할 수 있다. 들뢰즈는 예술은 감각적인 질을 산출하기 위해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감성적인 것의 존재를 향해 나아간다는 면에서 감성에 훈련을 부여한다고 했다. 내포적 강도는 질을 산출하면서도 자기 자신은 은폐하기 때문에, ‘힘’을 포착하는 예술은 감성을 그 자신에게로 되돌리는 훈련을 관객이 수행하게 한다.
숭고가 불쾌를 동반한다는 것은 두려운 자연 현상 혹은 거대한 인공물 앞에서 상상력이 압도당하거나 자신의 무력함을 느끼게 되는 썩 유쾌하지 않은 상황을 뜻한다. 특정 대상이 우리의 감각 능력의 범위를 넘어서 있다는 인상을 주며 상상력을 압도하거나 그 대상이 스스로 무력함을 자각하게 할 정도로 강력하고 두려울 때, 자유로운 유희의 가능성은 현저히 낮아지고 오히려 불안하고 위태로운 부정성이 생겨난다. 그러나 이러한 유한성의 체험은 곧 우리의 주체성을 다시 경건하게 한다. 처음 마주했을 때의 불쾌함과 당혹스러움을 극복한다면, 무한성의 이념을 그리는 방향으로 이끄는 숭고라는 감정은 궁극적으로 즐거움의 증폭과 지성의 능력 또는 범위의 확장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러한 내부적 자각을 가장 쉽고 자연스럽게 불러일으킬 수 있는 대표적인 수단은 ‘읽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에 서점을 둘러보며 베스트셀러 항목을 살펴보니 오늘날 인기 도서 중 여럿은 현대 사회의 아편과 같은 역할을 자처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표적인 예시로 『곰돌이 푸,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라는 책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공식 도서 정보를 인용하자면, 이 책은 곰돌이 푸의 긍정적인 기운과 ‘나의 삶은 나의 방식으로 정한다’라고 말했던 독일의 철학자 니체의 말 중에서 오늘날의 독자에게 도움이 될 만한 조언을 모았다. 니체의 철학이 21세기 행복 이론이라는 새로운 언어로 번역되어 곰돌이 푸의 입으로 전해지면서 바쁜 일상에 지친 현대인에게 위로를 건네는 셈이다. 근대 자본주의가 순응주의 사회를 조장하는 것을 비판한 철학자와 상업 자본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디즈니의 캐릭터를 합체한다는 점에서부터 수상하게 느껴지는 이 책의 가장 큰 문제는 똑같은 메시지의 반복에 있다. “좋은 기억은 붙잡고 나쁜 기억은 흘려보내고.”라는 말은 아주 노골적으로 불행과의 비대면을 강조하고, 가끔 곰돌이 푸는 독자에게 “멀리 떠나라”라며 알 수 없는 면책을 권장하기도 한다. 쉽지 않은 현실은 뒷전으로 하고 행복을 찾으라는 권유의 연속은 점차 단언적 명령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놀라운 사실은 곰돌이 푸만이 홀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공감과 위로를 표방하는 ‘감성 에세이’라는 장르의 도서들은 2018년부터 폭발적 인기를 경험해왔고 모두 일상 속 삶의 의미를 찾기, 지친 나를 위로하기 등과 비슷한 주제를 다룬다.
그러나 이처럼 쉽게 인식할 수 있는 사실이나 관찰을 반복적으로 되새기는 행위는 새로운 발견으로 이어지기는커녕 자기세뇌적 망상 내지는 퇴행에 불과하다는 불편한 사실을 외면할 수는 없다. 『곰돌이 푸,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는 니체 철학과의 친화성을 자부하는 것 치고는 그에 대한 이해도가 지극히 피상적인 수준에 이르고 특히 그의 위버멘쉬(übermensch) 개념은 아예 인지하지도 않는 것으로 보인다. 위버멘쉬란 비극적 상황 속에서도 자기 자신에 대한 경외를 잃지 않고 새로운 가치를 산출하는 자기 극복을 뜻하는 개념으로 곰돌이 푸의 따뜻한 메시지와는 거의 완벽하게 대조된다. 일상 속의 행복을 찾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폐쇄성에서 벗어나 실제 세상에서 행해지는 현실 그 자체와의 접촉과 그로부터 생겨나는 고통과 몰락, 분노에서 시작하여 전율로 이어질 수 있는 모든 과정을 느끼고 즐겨야만 “초인적인”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경계나 문지방을 넘어서려는 상태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감정으로 필자는 위버멘쉬가 쾌락으로 느껴질 수 없는 쾌락, 즉 일종의 도착적인 쾌락에 가깝다는 면에서 숭고와도 근접한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예술 작품으로부터 내 삶과 관점을 전적으로 뒤흔드는 부정성의 경험을 무조건 기대하는 것이 올바른 자세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최근 도서 업계의 경향은 심미적으로 쾌감을 가져다주는 편안함을 좇고 있고 이는 현대 사회의 거대한 문화적 흐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한병철 교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근대 미학은 ‘매끄러움의 미학’에서 시작된다. 곰돌이 푸의 핵심 또한 그 매끄러운 표면에 있다. 소소한 일상을 넘어선 판단과 해석, 성찰과 사고는 필요하지 않다. 세상은 나를 뒤흔들지 않고 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거나 반대로 내가 세상에 의문을 제기하는 부정성도 없다. ‘사리를 밝힐 논(論)’자를 쓰기에도 지나치게 피상적이고 단순한 논조는 모든 부정성과 요철을 벗겨낸 채, 유한성의 한계를 깨닫고 그 이상으로 넘어갈 계기를 전혀 제공하지 않는다. 이러한 현상이 안타깝게 느껴지는 것은 필자가 숭고함의 경험은 부정성에서 출발하지만 자기 확신을 완성하는 높은 수준의 경험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광경에 완전히 압도되어 구상력을 상실하고 만다. 하지만 그 억눌림의 반동으로 더욱 강렬하게 솟아오르는 희열감을 느낄 때 비로소 숭고를 느낄 수 있다. 지친 현대인이 진정한 안정을 찾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곰돌이 푸의 무조건 ‘괜찮다’는 피상적인 위로가 아니라, 관습적인 시선에서 벗어나 지평을 넓힘으로써 그들이 마주한 현실적인 문제들을 다층적으로 분석하고 해결할 능력의 취득이다. 고로 인간의 한계에 대한 인식을 딛고 인식 능력을 갱신하며 확장할 수 있는 숭고의 경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칸트에 의하면 “우리가 안전한 곳에 있기만 하다면 그런 것들의 광경은 두려우면 두려울수록 더욱더 우리 마음을 끌 뿐이다.” 숭고를 느끼고 표현하며 전달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고대 이집트 문명은 피라미드와 오벨리스크를 통해 하늘을 향하는 수직선을 응용했고 18세기의 윌리엄 터너는 폭풍우 치는 바다를 그렸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의 바넷 뉴먼과 마크 로스코는 거대하고 단일한 색면 회화를 그렸다. 이제 기존에 규정된 삶의 의미와 일상적이고 단순한 ‘매끄러움’의 모방에서 자발적으로 벗어나, 우리의 이해 가능성의 범위를 넓히며 예술을 포함한 모든 분야에서의 더 풍부한 사유를 가능케 하는 숭고를 느끼는 방향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