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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 HAN Sep 27. 2023

이야기, 퀼트, ... 지겹도록 이어붙여야 하는 무언가

- 마거릿 애트우드, 『그레이스』, 이은선 옮김, 민음사, 2019

“과연 그녀는 영악하고 잔인한 살인마일까? 아니면 가혹한 누명을 뒤집어쓴 순결한 희생양일까?” (책 소개 中)


  ‘그레이스’를 규정하는 이분법적인 구조는 이미 우리에게 익숙하다. 오랜 세월 여성들에게 꼬리표처럼 뒤따라다닌 성녀 혹은 마녀의 프레임이기 때문이다. 소설을 읽다보면 끝부분에 이르러서 그녀를 규정하고 싶어진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녀를 구출해야 한다는 욕망이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슬그머니 고개를 내민다. 반동적이고, 입이 거칠고, 심심한 도련님의 농간에 바르게 처신하지 못해 결국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메리 휘트니라는 마녀로부터 말이다. 메리 휘트니에게 조종당한 것이기 때문에 결국 그레이스는 착하고 순결한 처녀였다는 결론을 내리며 그레이스와 메리 휘트니를 각각 성녀와 마녀의 프레임 안에 안착시키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러나 소설은 그레이스가 잔혹하게 낸시 몽고메리를 살해하고 순진한 척 연기를 하는 것인지, 아니면 메리 휘트니의 망령에 씌여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인지 끝내 알려주지 않고 끝난다. 또한 토머스 키니어와 낸시 몽고메리 살인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였던 그레이스의 해리성 정체성 장애 여부도 그녀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한 법적 근거로 사용할 수 있을 뿐, 아이러니하게도 그레이스와 메리 휘트니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부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에는 다소 부족해보인다. 그레이스는 개혁운동가 알렉산더 매켄지를 지지하고 주인님이든 마님이든 신분에 상관없이 냉소적인 평가를 내리는 메리 휘트니에게 매력을 느꼈고 친언니처럼 의지했다. 지옥 같은 아버지 곁을 떠나 수감생활을 하기 전까지 메리 휘트니와 지낸 날들이 그레이스에게 있어서는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저는 삼각형을 뱅 둘러가며 무늬와 잘 어울리게 빨간 실로 갈지자 수를 놓을 거예요.
그러면 우리 셋이 하나가 될 수 있겠죠.  (pp.669~670)


  메리 휘트니의 영혼에 이용당한 ‘순진하고 착한 처녀’가 과연 그레이스의 진짜 모습일까? 그레이스는 퀼트를 꿰매며 조던 박사에게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처음에는 곤란해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이내 능숙한 재담꾼처럼 이야기를 풀어나가는데, 소설의 중반부 이후로는 그녀가 조던 박사가 흥미로워할 만한 방향으로 이야기를 편집하고 과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레이스는 그녀의 변호를 담당했던 케네스 매켄지가 표현한 것처럼 술탄을 재밌게하기 위해 밤새 이야기를 지어내는 ‘셰에라자드’ 같다.


돌아오면 어떤 이야기를 해드릴까? … 어떤 부분들은 머릿 속에서 뒤죽박죽으로 헝클어져 있지만, 그를 위해 이런저런 것들을 집어낼 수는 있다. 색감을 넣고 싶을 때 헝겊 주머니를 뒤져 쓸 만한 천 조각을 골라내는 것처럼 말이다.  (p.517)
나는 조던 박사님한테 이렇게 이야기할 것이다. 그가 이런 이야기를 좋아해서 늘 받아적으니 말이다.  (p.520)


  그러니 그레이스는 기본적으로 눈치가 빠르고, 상대방을 파악하는 능력이 뛰어나고, 다소 영악하다. 펠런 할머니가 말해준 사람이 죽으면 창문을 열어 영혼을 내보내야 한다는 풍습, 메리 휘트니가 죽었을 때 창문을 깜빡하고 늦게 열었고, 메리 휘트니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는 이야기, 파란 니겔라 무늬의 손수건을 두른 낸시 몽고메리가 나오는 꿈에 대한 이야기 등은 과장하거나 지어낸 것일 수 있다. 조던 박사가 이러한 류의 이야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마치 그레이스에게 정신질환의 낌새가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고, 이것이 조던 박사가 원하는 그레이스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지어내는 그레이스의 모습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어느 인물과 닮아있다. 보따리장수 제러마이어이면서, 자칭 의료 전문가인 제롬 뒤퐁 박사이면서, 신경 최면과 독심술 전문가인 제랄도 폰티이면서, 유명한 남자 영매인 제럴드 브리지스이기도 한 그레이스의 오랜 친구. 제러마이어는 그레이스에게 그들이 같은 부류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리고 둘 사이에는 어떤 비밀이 있다.(아닐 수도 있지만.) 제러마이어는 그의 많은 이름이 상기시키듯 일종의 사기꾼이다. 하지만 다른 각도에서 본다면 제러마이어는 이곳저곳을 자유롭게 다니며 세상의 시선이나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보헤미안이다. 그는 원하는 삶이 있다면 원하는 동안만 잠시 가면을 쓰고 흉내를 내면 된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가 의도한 대로―동시에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그를 받아들인다. 제러마이어는 흉내내기를 통해 사람들을 조롱하고 그들이 믿는 가치체계와 질서의 절대성을 전복한다.
  그레이스의 ‘이야기’도 제러마이어의 흉내내기와 유사하다. 상대방이 원하는 이야기를 들려주기 때문이다. 처음 시작할 때는 상대방의 흥미를 돋워주고, 원하는 바를 충족시켜주지만, 점차 상대방에게 자신이 의도한 이미지를 각인시키고 원하는 바를 얻는다는 점에서 그레이스의 이야기 또한 전복적인 행위다. 조던 박사와 그레이스의 관계가 ‘물어보는 자 : 대답하는 자’에서 ‘듣는 자 : 말하는 자’로 역전된 것처럼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힘의 상하관계가 뒤집힌다.
  그러나 제러마이어와 다르게 그레이스에게서 처연함이 느껴지는 것은 왜 그럴까? 단순히 개인적인 감상 때문일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유를 생각해보자면, 그레이스의 처연함은 그녀가 이야기를 멈출 수 없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사면 후 미국으로 건너가 제이미 월시와 결혼한 이후에도 그레이스는 이야기를 멈추지 않는다. 아니, 멈출 수 없다. 과거 법정에서 진술한 것 때문에 제이미 월시는 그레이스가 겪은 모든 불행이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자책하고, 자신의 여생을 그레이스의 평안을 위해 바치기로 결심한다. 제이미 월시는 아마 그레이스가 겪은 고통이 심하면 심할수록 자신이 그레이스에게 베푸는 모든 것들, 심지어 자신의 존재조차 뉘우침과 희생이라는 이름 아래 비로소 가치를 획득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레이스는 그런 제이미 월시의 바람대로 “교도소나 토론토의 정신병원에서 있었던 이런저런 일들을 이야기해주는 수밖에 없”다.(p.664)
  여전히 그녀는 뉴욕의 작은 마을, 자신의 집 베란다에 앉아 조던 박사와 함께 있을 때 그랬던 것처럼 퀼트를 꿰맨다. 아직 1870년대, 삼십 년에 가까운 수감생활을 마치고 나온 중년 여인의 몸으로 별다른 도리가 있을리 없으니까. 한땀 한땀 지겹고 지지부진하게 끊이지 않고 이어가는 것. 어쩌면 ‘이야기’는 그레이스가 터득한 생존 방법이자, 당시 여성들의 삶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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