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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 HAN Jun 02. 2024

사람의 조건

- 영화 <가여운 것들>, 소설 『프랑켄슈타인』에 대한 단상

- 요르고스 란티모스, <가여운 것들>, 2024

- 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 앤의서재, 2024

-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문학과지성사, 2015


※ 각 작품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음.


 메리 셸리의 고전소설 『프랑켄슈타인』의 여성 버전이라고도 평가받는 <가여운 것들>은 근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SF 영화다. 의사들 사이에서도 괴짜로 불리는 갓윈 백스터가 자살한 여성의 시체를 우연히 발견함으로써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갓윈은 그 뱃속의 태아가 살아있음을 발견하고 태아의 뇌를 여성에게 이식한다. 그렇게 벨라 백스터가 '만들어진다.' 갓윈은 벨라의 후견인이자, 아버지이자, 그 이름처럼 'GOD(신)'이다.

 영화를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한 여성의 성장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벨라는 일반적인 성장단계, 즉 외적인 면과 내적인 면이 일치하는 성장단계를 거치지 않는다. 이미 몸은 완성형이지만 뇌는 태아의 것이기 때문에 사고, 언어, 사회적 질서 등 모든 부분에 있어서 어린 아이와 같다. 갓윈은 그런 벨라를 집 안에서만 키운다. 갓윈의 조수인 맥스가 기록하는 데이터에 따르면 벨라의 정신연령은 몸에 맞춰 빠르게 성장한다.

 그러나 벨라가 진정한 성장을 겪는 때는 집 안에만 머무르면서 갓윈에게 모든 걸 의존하는 시기가 아닌 덩컨 웨더번을 따라 세상을 여행하면서부터다. 벨라가 욕구를 참지 못하고 그대로 드러내는 당혹스러운 상황이 빈번히 발생하지만, 많은 사람을 만나고, 책도 읽고, 세계를 경험하면서 어엿한 성인으로 성장한다. 벨라가 어린 아이에서 벗어나 완전한 성인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장면은, 덩컨의 돈을 모두 선원에게 주면서 밖의 불쌍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라고 하는 장면이다. 더는 숙박비를 지불하지 못하게 된 덩컨과 벨라는 배에서 쫓겨나 무일푼으로 파리에 상륙한다.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스스로 있게 벨라는 비로소 독립된 개체, 자아를 지닌 한 사람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벨라의 성장과정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가여운 것들>에서 말하는 '사람'의 기준은 뇌, 즉 이성이다. 여전히 인간과 인간이 아닌 동물을 구분할 때 강력한 기준으로 작용하는 이성은 생존 본능, 자연법칙에 따른 사고방식이 아닌 그보다 고차원적인 윤리적 성질을 포함하는 사고방식을 의미한다.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 우리는 특정 대상이 사람에 해당되는지 여부를 판단하려는 경향이 있고, 이 기준은 어느 정도까지는 옳은 것으로 보인다. (영화에서는 이를 표현하기 위해 다소 극단적인 방식을 택하는데, 벨라가 뇌를 이식받기 전 남편이었던 블레싱턴 경은 염소의 뇌를 이식받게 되고, 이후 벨라의 정원에서 염소처럼 풀을 뜯어 먹는다.)

 그러나 이성적 사고가 사람의 조건이라고 할 때 발생하는 몇몇 문제들이 있다. 우선 수많은 범죄자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특히 살인, 강간 등 강력범죄를 저지른 범죄자에 대해 '사람의 탈을 쓴 악마'라거나, '사람도 아니다'라는 표현을 쓰지만, 해당 범죄자에게서 정말로 사람의 지위를 박탈하지는 않는다. 범죄자가 법정에서 처벌 받고, 감옥에 수용된다는 사실이 이를 잘 말해준다. 또 다른 문제로는 유인원을 생각해볼 수 있다. 사람과 DNA가 유사하다는 특성 때문에 유인원을 교육시키고, 지능의 성장을 관찰하는 실험은 예전부터 계속되어 왔다. 만약 유인원이 정말 사람의 언어를 구사하고, 문화를 습득하고, 사고능력이 발달한다면, 우리는 유인원에게 사람의 지위를 부여할 수 있을까? 마지막으로 선천적 또는 후천적으로 사고능력, 의사표현능력과 관련된 장애를 지닌 사람에 대해 우리는 이 조건을 재고할 수밖에 없다. (이는 블레싱턴 경에 대한 결말이 다소 극단적이라고 말한 것과도 연결된다.)

 은유적 표현을 넘어 실질적으로 사람의 조건에 대해 질문하게 되면, 명확하다고 생각했던 기준들이 많은 장벽에 부딪힌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다시 메리 셸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벨라 벡스터는 종종 발생했던 난감한 상황들에도 불구하고―등장인물인 맥스와 덩컨의 표현을 빌리자면―'완벽한' 외모 덕분인지 아무도 그녀를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그녀는 애초에 사람이 아닌 적이 없었다. 그녀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세계에서 어떻게 올바른 자아를 확립해나갈 것인지 여부다. 그러나 『프랑켄슈타인』의 크리처(creature)는 그렇지 않다. 크리처는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실험실에서 그를 눈뜨게 한 후 내팽개친 그날 이후부터, 즉 탄생의 순간부터 한 번도 사람인 적이 없었다.

 김현경의 『사람, 장소, 환대』는 이 질문에 대해 시각을 달리 할 것을 제시하는데, 사람의 조건을 개체가 지닌 고유한 또는 독립적인 속성이 아닌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적 속성으로 보는 것이다. 김현경은 어빙 고프먼의 이론을 바탕으로 사람의 개념과 조건을 정의한다. 사람―사람으로 인정되는 사람―이 지니고 있다고 생각되는 인격이란, "상호작용의 흐름 속에서 그때그때 타인들의 협조에 힘입어 표현되고 확인되는 무엇이다. … 이런 이유로 고프먼은 의례적 규칙(ceremonial rules)의 준수에 도덕적인 의미를 부여한다."(p.115-116) 즉, "사람이라는 것은 어떤 보이지 않는 공동체―도덕적 공동체―안에서 성원권을 갖는다는 뜻이다.(p.31)

 김현경 생물학적 종으로서 한 인간이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해 어떤 노력이나 대가가 필요하지 않다고 설명한다. 인간은 태어남과 동시에 사람으로 인정받고, 그 출생에 대해 부모나 국가로부터 어떠한 대가도 지불하지 않으며, 어떤 이유에서든 생명의 위협을 받거나 사람 자격을 박탈당할 위기에 처하지 않는다. 김현경은 이를 "절대적 환대"라고 표현하는데, 바로 이 절대적 환대가 사회의 구성 및 작동 원리인 것이다. 사람들은 절대적 환대를 통해 사회를 구성하고, 사회 속에서 서로의 인격을 인정하고, 또 인정받으면서 사람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미국에서의 흑인 민권 운동, 전세계적으로 일어났던 여성 참정권 운동, 현대사회의 수많은 인정투쟁 등은 사회의 구성원리라고 하는 절대적 환대가 불변의 어떤 것이 아니라 회수와 박탈이라는 위험과 대립하면서 계속해서 확립해나가야 하는 지향점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사람들은 자신과 비슷한 부류와 공동체를 구성하고, 자신들을 다른 집단과 구분짓고 특권을 부여하고자 하는 욕망을 지니는데, '비슷한 부류'를 판단하는 과정에는 우선 외적인 요소가 가장 크게 작용할 수밖에 없다.


파국을 직접 눈으로 발견했을 때의 감정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 아릅답게! 아름답게라니! 그의 노란 살갗은 근육과 혈관을 겨우 가리기에 급급했고 윤기가 흐르는 흑발은 미역처럼 출렁였다. 이빨은 진주알 같았고 눈두덩과 별반 다른 바 없던 축축하고 허연 눈알, 그리고 꾹 다물고 있는 거무죽죽한 입술까지, 눈에 띄는 놈의 외모가 오히려 그를 더 끔찍한 생명체로 보이게 만들 분이었다. (p.79)


 <가여운 것들>에서 제시한 사람의 조건, 즉 이성적 사고라는 기준을 놓고 보면 크리처는 사람이다. 성인 인간에 상응하는 지적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양심과 동정심이라는 윤리적인 사고도 가능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의 조건을 상호간의 인정으로 보는 관점에서 『프랑켄슈타인』의 크리처는 사람이 아니다. 일단 생물학적인 잉태를 통해 탄생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빅터에게 버림받은 크리처는 숲을 헤매다가 발견한 드 라세 가족의 오두막에 숨어살면서 그들의 대화를 엿들으며 언어를 익히고, 관습과 예절을 배운다. 그리고 사람에 대한 애정을 느끼게 되고, 그들과 같이 한 사회에 소속되고 싶다는 욕구를 갖게 된다. 그러나 흉측한 외모를 드러냈을 때 크리처는 그들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한다. 그들을 위해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았음에도 오히려 적대감을 보이는 펠릭스에게 크게 실망한 크리처는 오두막에 불을 지르고 떠난다.

 경솔한 욕망으로 인해 생명체를 창조한 빅터에 대한 비난은 잠시 보류하고, 과연 우리라면 이 당혹스러운 존재를 사람으로,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사회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외적인 이유로 다른 사람을 차별하면 안 된다는 의례적 규칙을 (이론적으로라도) 수용하는 현대 사회에서, 크리처의 외모가 아무리 흉측하더라도 그의 내면은 사람과 다를 바 없기 때문에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과 키가 2m가 넘고, 외부 환경에 적응력이 강하고, 암벽도 단숨에 뛰어오르는 존재를 인간에 대한 치명적인 위협으로 느껴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주장 사이에서 어느 한쪽을 택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프랑켄슈타인』이 제기하는 문제는 메리 셸리가 소설을 집필하던 1800년대도 아니고, 나치가 유대인을 상대로 역사상 최악의 범죄를 저지른 1940년대도 아니고, 오히려 지금 시점에서 유효하다. 소설에서 크리처는 상상 속에 존재할 법한 괴물의 형태로 나타나지만, 현재 우리는 실현가능한 형태의 수많은 크리처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유전자 기술의 발전, AI, 휴머노이드 등 200년 전과 비교할 수 없이 엄청난 발전을 이룬 과학 기술로 인해 이는 머지 않은 미래로 다가올 것이다. 그러나 빠르게 발전하는 기술 이면에 여전히 자연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수용할 수 있는 변화의 한계에 대해 되돌아보는 작업은 계속해서 요구되어야 하고, 분명 필요한 일이다. 과거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것은 발전가능성에 대한 인간의 욕망이고, 메리 셸리가 소설의 제목을 '프랑켄슈타인'으로 지은 이유는 이러한 인간의 오만함, 경솔함에 대한 일종의 경고를 보내기 위함이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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