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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irewriter Dec 24. 2020

10월 12일

제주소방교육대로 입교하는 날

1

최종합격을 하면 다 끝인 줄 알았다. 이것은 새로운 고난의 시작의 다른 말일 뿐이다. 허겁지겁 챙긴 짐이 차에 가득 찼다. 엄마는 울상으로 “잘 다녀와”라고 했다. 10여 년 전, 내가 군에 입대할 때 제주공항에서 헤어질 때의 그 표정이 오버랩 되었다. 불편했다. 하지만 나는 엄마가 지은 표정에 대해 생각해내야만 한다. 저 일그러진 얼굴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이다. 얼른 달아나고 싶었다. 그래야 엄마를 안 볼 수 있으니까. 곧 엄마도 별다를 바 없는 일상을 보내게 될 테니까. 아침은 제법 쌀쌀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따스했던 날씨는 온데간데없다.


2

부사관 훈련을 받게 된 시점은 12월이었다. 그때의 악몽 때문인지 교육대를 들어가는 게 두려웠다. 공군교육사령부의 겨울은 혹독했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힘들 때였다. 물론 정신적인 고통이 훨씬 컸다. 부사관 교육대대에서 있었던 일들이 어렴풋하게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맞지 않는 동기들과의 15주 훈련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나보다 어린 동기에게 멱살을 잡힌 적이 있다. 또, 조롱당하는 날도 많았다. 참을 수밖에 없었다. 문제를 일으키는 순간, 퇴교를 하게 되기 때문이다. 훈련을 받다가 다치는 것도 아니고 나약한 마음 때문에 퇴교하는 건 정말 수치스러운 일이다.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하사로 임관할 수만 있다면, 당분간은 아쉬운 소리 안 하고 살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가난한 삶에 대한 증오는 되레 죽도록 싫은 그 지옥의 15주를 견디게 해준 가장 큰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너희들 따위와 보내는 15주는 내 인생에서 찰나와 다르지 않다'고 자위하면서 겨우 이겨냈다. 증오는 나의 힘이었다.


3

이 모든 것은 결국 정신의 문제다. 군대보다 훨씬 호화로운 환경에서 훈련을 받게 될 터인데도 무기력한 것은 내가 나약한 까닭이다. 물론 앞으로의 체력훈련은 상상하는 것 이상이라고들 하지만, 아직 그런 것들을 시작하기도 전에 나는 지쳐있다. 이미 이런 비슷한 환경을 여러 번 겪어서일까. 사람은 거기에서 거기고, 이 생활은 쳇바퀴처럼 몇 달 반복되다가 끝날 거라고 나는 속단해버렸다. 매너리즘에 빠진 게 틀림없다. 안이한 생활은 무섭다. 새로운 환경에 거부감이 들게 한다. 이곳에서의 생활이 익숙해져야 한다. 새 사람들과 만나서 우정을 나눠야 한다. ‘우리’라고 할 수 있을 때까지.


4

자기소개 시간에 ‘미혼’이라고 말한 것은 내 인생의 얼룩으로 남을 것이다.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분위기를 어쭙잖게 띄워보려는 얄팍한 심산에서 비롯된 거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키득거렸지만, 나를 비웃었는지도 모른다. 사람들과 친해지기 전에 내 본모습을 보이는 걸 극도로 꺼렸던 나인데 말이다.


5

K교관이 로프를 양손으로 당기면서 ‘소방은 로프로 시작해서 로프로 끝난다’고 말했다. 내가 오늘 배운 가장 값진 말이다. 그것은 경험에서 나오는 말이다. 이 말은 얼마나 시적인가. 내가 원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생활에서 나오는 말의 깊이, 그것이 문학이 될 수 있고 시가 될 수 있다.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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