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을 차려보니 당신과 함께 살고 있었다. 내 인생에는 당신이 함께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눈을 뜨면 당신이 있었고, 어떤 식으로든 당신과 떨어지는 것은 절대 불가침 영역으로 치부됐다. 그러던 2019년 4월의 어느 평범한 날, 당신과 나 사이에는 하루아침에 8,378km라는 물리적 틈이 생겼다. 그로 인한 7시간의 시차는 한정된 시간에만 서로에게 닿게 하므로 이전의 무자비한 사생활 침해로부터 해방되었다. 당신의 자리는 수없이 다양한 사람들로 대체되었다. 우린 삶에 대해서 논의하며, 약자, 인종, 환경, 전쟁, 기득권 등의 문제를 놓고 깊이 토론했다. 당신이 채워주지 못했던 대화의 한계는 점점 줄어갔다. 모든 인격체는 나와 다른 존재였지만, 서로를 인정하며 보완했다. 다름은 갈등이 아닌 풍성함을 상징했다.
만나는 관계를 선호하는 나에게 느닷없는 코로나 시국은 걸림돌이 되었다. 공교롭게도 악재가 겹쳤다. 다른 도시로 주거를 옮긴 시기와 독일에 코로나 확진자가 급속히 확산하던 시기가 맞물렸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도시에서 누군가를 알아갈 통로가 모두 차단되었다. 이사 이전의 도시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어 내 날것의 감정을 나누기엔 큰 용기를 무릅써야 했다. 그들과 난 이 힘든 유학 준비기간을 버틸 수 있게 도와주는 역할을 수행하는 관계였고, 이별이 예정된 관계였다. 학교에 합격했다는 것은 서로의 역할이 끝났다는 것을 의미했다. 나 없이도 충분히 행복할 사람들의 일상을 내가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난 당신을 찾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내가 침범할 수 있는 사람은 당신뿐이었다. 당신이 날 그렇게 대했으니까. 코로나로 인해 벌어졌던 당신과 나의 틈이 다시 가까워질 징조를 보였다. 당신은 다시 나의 경계를 침범하기 시작했고, 난 그로 인한 감정적 소모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당분간 당신과의 연락을 차단하기에 이르렀다.
평범한 어느 저녁. 온종일 붙잡고 있던 과제를 마치고 핸드폰을 확인했다. 카톡이 몇 개 와 있었지만, 내가 가깝게 여기는 사람들로부터의 연락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필요한 일이 아니면 나를 찾지 않았다. 한국시간으로는 새벽 4시라 당장 연락할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외로웠다. 시시콜콜하지만 소중한 일상을 누군가와 지속적으로 나누고 싶다는 이 강렬한 욕망은, 한편으로는 소박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거대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 누군가가 당신은 아니었다. 창문 밖 거리엔 적막이 가득했다. ‘모두 안락한 집에서 가족들과 휴식하고 있겠지?’ 긁히기만 하면 하얀 가루가 발아래 후드득 떨어지는 기숙사의 하얀 시멘트벽은 내 등에 서늘한 기운을 내뿜었고, 쓸데없이 거대한 내 방은 마치 광야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것 같은 막연함을 선사했다. 스스로 몸을 해치지 않을 것이란 것을 잘 알았지만, 이 정적인 상황이 나를 해칠 것 같았다. 두려웠다. 이 적막을 깨부수고 날 구하러 올 이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만 같은, 설령 삶을 마치게 되어도 내가 먼저 알리기 전에는 아무도 내 죽음을 알 길이 없을 것이란 생각이 나를 잠식했다. 뺨에 뜨겁게 흐르는 짠물을 소매로 훔치다가, 눈에 초점 없이 멍하니 있기를 한참 반복하다가 내가 사는 도시에 유일하게 동갑인 한인 친구에게 용기를 내어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내게 “무슨 일이야? 너 울어? 내가 지금 갈게”라고 얘기했다. “갈까?”가 아닌 “갈게.”라는 말이 위안이 되었다.
운이 좋았다. 그 친구가 살던 집에 방이 하나 남았던 덕에 하루 만에 짐을 싸서 도망치듯 그 집에 들어갔고, 한국에 계신 심리치료 선생님과 인연이 닿아 상담을 시작했다. 코로나 블루, 끝없는 과제, 향수병이 내 우울의 이유라고 단순하게 정의한 내 사고체계를 놀리듯, 내 감정의 원천은 상담을 통해 하나둘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난 적막함이 주는 공포와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못하는 어려움에 대해 줄곧 이야기했는데, 선생님은 자꾸 나와 엄마 사이의 관계를 물어보셨다.
어렸을 적부터 사유하기를 즐겼던 나에겐 '삶의 이유', '신의 존재 여부', '부는 어떻게 재분배되어야 하는가'가 보통의 관심사였다. 이런 질문들은 엄마에게 부담일 수밖에 없었다. ‘저 사람이 진짜 본인을 싫어하는가?’, ‘직장동료와의 관계는 어떻게 유지해야 하는가’ 같은 주제가 엄마의 주 고민거리였기 때문이다. 대화의 맥락을 읽어내지 못하는 엄마에게는 어려운 문제였다. 12살의 아이는 자신의 고민을 스스로 해결하는 건 물론 43세의 혼란 또한 고스란히 떠안았다. 모범답안을 본 적 없는 아이는 여러 공식에 값을 일일이 대입해가며 답을 확인해야 했다. 답을 찾아갈수록 엄마의 고민이 그 나이에는 적절하지 않으며, 엄마가 자신감 부족으로 점철되어 많은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열심히 답을 찾아내도 엄마는 듣지 않았다. 그녀는 처음부터 답을 원한 적이 없었다. 그녀의 편이 필요할 뿐이었다. 나는 곧 사춘기를 맞이했고 내 결핍을 해결하기에 바빠, 엄마의 질문에 더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 사고의 방향성을 점검해 줄 사람이 필요했고, 내 기준에 적합한 어른을 찾았다. 가족 이외의 사람에게 갈망하는 분량만큼 충족받기는 어려웠지만, 신중하고 학구적인 어른들과의 만남은 가뭄의 단비 같은 역할을 했다.
상담 선생님은 엄마가 보이지 않아도 엄마가 존재한다고 인지하며, 본인과 엄마를, 즉 주체와 객체를 구분하는 아기에게는 ‘대상 항상성’이란 것이 있다고 이야기하셨다. 아동 대부분은 엄마가 부재중일 때에도 자신이 생각해 낼 수 있는 긍정적인 내적 심상을 발달시킴으로 엄마에 대한 갈망을 느끼면서도 독립적으로 기능할 수 있다고 하는데, 주 양육자와의 개별화를 경험하지 못한 나는 청소년이 되어 정서적으로 가깝게 여기는 몇 사람을 대상화했고, 한국에서는 그들과 지속적으로 만나며 ‘나’를 유지했으나, 독일 유학으로 인해 물리적으로 그들과 떨어지게 되니 무의식 중에 ‘나’를 잃어버렸다고 느꼈다.
선생님은 대상 항상성의 실패가 주 양육자의 일관적이지 않은 태도와 감정, 우울증에 기인한다고 말씀하셨다. 영아기의 기억은 없지만, 내 기억의 첫 장면부터 엄마는 변덕스러우며 감정적 널뛰기가 심했다. 예를 들자면 엄마는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쌍꺼풀 수술을 권유했는데, 난 부모님을 닮아 나온 하나뿐인 내 얼굴을 왜 바꾸라고 하는 것이며, 눈이란 기능 자체에 문제가 없으며 너무 못생겨서 모두가 손가락질하는 것도 아닌데 뭐가 문제가 되냐며 화를 냈다. 엄마는 대쪽 같은 나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다른 사람의 말에 영향을 받지 않는 나를 부러워하기까지 했다. “네가 맞다. 원래 너처럼 살아야 해. 누가 낳았는지 어쩜 생각이 그렇게 올바르니. 근데 요즘은 다른 애들이 다 하니까 네가 안 하면 너무 뒤처지잖아.” 그런데 어느 날은 또 "왜 이렇게 예쁘냐"며 일관성 없는 말을 했다. 스스로도 헷갈리는 미적 기준을 가진 엄마의 말은 그저 내게 소음에 불과했다. 내가 대쪽 같지 않으면 나도 엄마처럼 갈대같이 흔들릴게 뻔했다.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나의 생활을 방해하기도 했다. 함께 있을 때는 아무 말도 나누지 않다가, 막상 내가 방에 들어가면 5분도 되지 않아, 나에게 급히 논의할 거리도 아닌데도 거실에서 큰소리로 외치거나 굳이 빨랫감을 걷으러 방에 들어오려 했다. 무언가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은 내게 주어진 적이 없었다. 방해받는 상황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동시에 그 자극에 너무 익숙해져 방해받지 않는 상황 또한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것을 상담을 통해 알았다. 자극이 없어진 나를 어서 침해해 주길 무력하게 기다리는 나의 관성을 독일의 내 기숙사에서 발견했다.
하지만 선생님은 근본적 욕구 충족에 타인은 필수요건이 아니며, 성인인 내겐 이제 스스로 욕구를 충족하는 힘이 충분히 존재한다고 말씀하셨다. 동시에 내가 외롭고 불안하며 무서운 감정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며 깊게 호흡함으로 현실 속에 “내가 살아있구나!”라고 인지하는 것, 지금은 타국에 자발적으로 혼자 있는 것이므로 '그때와 지금은 다르다'라고 인지하는 것을 잊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혹자는 말한다. 용서란 누군가를 이해하고 사랑해서 희생하기까지 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난 더는 내 물을 다 길어내며 당신을 돌보아주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내가 당신을 떠나야 당신이 비로소 당신을 돌보며, 내가 나를 더 돌볼 것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새롭게 만들어 갈 관계에 있어서 당신에게 받은 영향을 핑계 대지 않겠다. 감정을 부정적으로 여기며 밀어내지 않고, 더 표현하며 마음을 공유할 관계도 한 명쯤은 삶에 두어도 되고, 엄마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 가졌던 완벽주의를 버려도 괜찮으며, 실수해도 괜찮다, 단순하게 삶을 살아도 나쁘지 않다고 스스로 다독이며 살겠다. 내가 나로 있을 수 있게 노력하겠다. 그게 내가 당신에게 베풀 수 있는 양만큼의 용서이다. 난 이제 숨이 가볍게 찰 정도로 달려가겠다. 무의식적으로 내가 성장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낀다면, 이 성장은 나를 대단하게 여기는 당신을 버리는 것도, 미안해할 일도 아니라고 말해주겠다. 도착지점에 반도 오지 못한 당신에게 미안해서 애써 은메달을 따는 것이 아니라 휘황찬란한 금메달을 목에 걸어도 된다고 나를 응원해주련다. “장하다, 축하받아 마땅하다”라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련다. 동네방네 플랜카드를 걸고, 케익을 사서 성대하게 축하파티를 해주련다. 또한 있는 힘껏 기대해보련다. “흙탕물을 다 퍼내면 맑은 물이 찬다”라는 상담 선생님의 말을 원동력 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