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멘지 Aug 17. 2021

누구보다 게으르게

<21년도 상반기> '한국에서의 쉼'을 돌아보며.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

 어쩌다 보니 일함과 쉼의 경계가 극명하게 나누어졌다. 독일에서는 기력을 쏟아붓고, 한국에서는 넘칠 만큼 채워 넣는다. 성취감을 쫓아 살아가는 나는 독일에서 이미 차근차근 성취감을 맛보고 있다. 심지어는 목표에 도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충분하다고도 느껴진다. 학사 졸업도 안 해놓고 입학으로 만족하는 사람이 바로 나다. ‘다 이루었다! 그러니 이제 돌아가야 하는 것 아닌가’ 라며. 그러다 보니 풍족하고, 자극적이며, 좋은 것만 보고 경험할 수 있었던 한국을 떠나기 싫은 마음은 쉬이 당연해진다.


 일 안 하고 놀기만 하면 유토피아 같은 이런 곳에서 자그마치 네 달이나 있었다. 독일에서 쏟아부은 에너지에 약 1/15 정도를 소비했다.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일, 도저히 가능해 보이지 않은 일은 손도 대지 않았다. 할 수 있는 만큼 하고, 최선을 다해 살길 지양했다. 좋아하는 사람들을 맘껏 보고, 예전보다는 좀 더 편하게 마음을 표현했다. 하고 싶은 말을 표현하기 상대적으로 쉬워 소통의 기쁨을 누렸다. 하고 싶은 게 많아서 알바를 시작했다. 큰돈이 필요하진 않아 주 2회만 일했다. 하고 싶은 것들을 뭉텅이로 정해놓고 세세한 일정은 짜지 않았다. 운전면허, 글쓰기 모임, 여행!  



 ‘이 동사는 3 격 수식을 받던가?’ ‘이 단어가 중성 명사였던가?’라는 불확신이 한가득 밀려온다. 우물쭈물 대지 않으려 노트북 메모장에 할 말을 빽빽이 적은 후에야 전화 문의하는 습관이 생겼다. 비자 신청 몇 달 전부터 서류를 준비하고 알아보는 난 점점 더 계획적인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아 내심 뿌듯했다. 일요일엔 마트가 닫으니 토요일 정오까진 장을 보는 삶, 병원을 가기 위해 문의를 하고 스케줄을 잡는 삶은 평범한 일상이 되었다.  


 전날에 부랴부랴 부산에 가는 기차를 예약하고, 당일에 호텔을 찾아보며, 오늘 당장 보기로 한 지인과 만날 장소를 정확히 정하지 않은 나를 보며 상담 선생님은 말하셨다. “너는 J 아이다. 너는 P다.” 후에 MBTI 검사를 다시 해보니 분명 독일에서는 ISTJ로 나왔는데 한국에서는 ISTP가 나왔다. 기질은 변하지 않았다. 계획적인 성향이 활성화된 것은 환경에 의해 저절로 변한 게 아니라, 환경에 적응하려는 노력이 만들어 낸 결과였다. 어떻게든 살아가려 아등바등, 꽤나 애썼던 거다.


 그러니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루는 나의 모습을 관조하는 게 얼마나 달콤했던지. 기질을 거스르지 않고 그저 생긴 대로 살아보았다. '이래도 별 일 일어나지 않는다'는 안정감이 가장 큰 선물이었다. 더군다나 모든 일이 꽤나 바쁘게 돌아가서 정신 쏙 빼놓는 한국에서 게으르게 살았다는 것은 주위 사람들의 무수한 잔소리에도 불구하고 게으름을 쟁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매일의 삶이 게으르다면 당연히 기쁘지 않았을 거다. 내가 누린 시간은 충분히 열심히 했고 또 열심히 할 미래에 대한 넉넉한 보상이다. 이러한 느슨한 행복이 또 원동력이 됨을 알고 있다. 화르륵 타올라야 할 때 하나씩 집어넣을 수 있는 무수한 땔감이 되겠지.








작가의 이전글 아시아인 여자로 독일에 산다는 것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