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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멘지 Dec 22. 2020

아시아인 여자로 독일에 산다는 것은,

인종차별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

내가 현재 발을 담그고 있는 독일에서, 피부로 느껴지는 모순 중에 하나는,

과거의 인종차별 문제를 엄중하게 다루면서도,

현재에도 일상적으로 다분히 많은 인종차별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독일에서 만난 사람들과 이야기해 보았을 때,

 홀로코스트에 대해서는 사죄하는 마음을 많이 갖고 있었다.

 하지만 현재 아시아인을 향한 적대적 시선이나,

차별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대체 인종차별을 누가, 어디서, 어떻게 하는데?” 하는 말을 자주 듣게 된다.

 

한편으로는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과거의 인종차별은 매우 선명하고도 명백한 기준을 가지고 차별을 허용한다.

하지만 가시적 차별이 금지된 현대의 인종차별은 더욱 치밀하고 은밀하다.

그래서 어쩌면 나조차도 먼 훗날에 깨달을 정도로 말이다.

그래서 잘 모를 수 있다.



그런데 처음 말했던 것처럼,

모순을 느낀다는 것은 '기대하고 생각했던 모습과의 괴리가 있다'는 것이다.

즉 기대하고 상상했던 로망이 존재한다는 것.
한국 매체에서 독일은 긍정적으로만 평가되곤 한다.

부정적인 기사와 댓글은 찾아보기 쉽지 않다.

 

예를 들어 전범국가로서 특히 일본과 비교대상이 되면서

그들의 사죄는 더욱 큰 가치를 갖게 되었고 전범국가의 롤모델처럼 내세워지고 있다.

 한국에서 독일을 이런 기사들로만 접했을 때,

나 또한 이 나라에 대해 환상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고 표현할 수 있겠다.
독일 또한 자국의 인종차별은 홀로코스트,

즉 과거의 일로 회상되는 것 이상 이하도 아닌 것으로 일단락시킨다.

또 많은 독일인들은 이렇게 이야기하곤 한다.

 “대부분 터키 사람이 인종 차별하지 않아?” “아마 노숙자들이 많이 그런 것 같아”

 “난민이나 차별당하지, 왜 동양인이?”

그러나 아시아인 여성으로서 겪는 많은 인종차별은, 성별 간 갈등,

교육의 수준으로 가려지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나보다 남을 낮게 여기는 그 알량한 마음이, 다양한 행동과 말들로 전해진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길거리에서 ‘니하오’ ‘곤니치와’ 혹은 소리를 지르고 도망간다거나,

어학원에서 내 이름을 부르기 어렵다는 이유로 나 혼자 '너'라는 명칭으로 불릴 때.



나와 다르다는 것.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버린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서로를 이해하려는 대화의 성숙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서로를 할퀴는 결과가 일어나게 된다.
다양한 사람들이 많고, 다양한 행동들이 인정되는 사회라고 하지만,

그것이 결코 다양성을 대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내가 당하는 차별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또한 건강하지 않은 생각들이 다양성이라는 이름하에 방치되는 모순 또한 목격했다.

소통과 연대.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다.

수많은 이데올로기 속에서 서로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끊임없이 지속되어야 한다.
대화의 시도가 문제의식을 느끼는 약자 쪽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아 안타깝지만,
그 아픔과 경험을 나누는 행동은, 같은 아픔을 가진 자들을 끌어안으며

 더 나아가 주류 집단을 견제하게 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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