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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현우 Apr 16. 2021

오늘은 다 같이 바닥에서 자자

영화 미나리(2021)

작년, 한 미국 영화가 개봉한다는 말에 난 흥분했다. 스티븐 연, 한예리, 윤여정 주연의 영화가 개봉 한다는 것. 그리고 그 영화가 한국 이민자들의 이야기를 그린 미국 영화라는 것. 여지껏 본 적 없던 형식의 영화에 난 기대감을 감출 수 없었다. 골든 글로브 외국어 영화 논란과 더불어 전 세계 영화계에서 뜨거운 관심을 받은 영화 미나리는 다른 의미에서 놀라웠다.




이 리뷰는 소량의 스포일러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감독 정이삭의 자전적인 이야기로 이루어진 이 영화는 아메리칸 드림에 관한 한국 이민자들에 대한 이야기다. 한국 전쟁 이후 더 나은 삶을 꿈꾸며 새로운 땅에 도착한 이들의 이야기는 사실, 놀라우리만치 보편적인 이야기로서 작동한다. 이민과 정반대의 삶을 살아온 나조차 나의 삶을 볼 수 있었다. 한 도시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20년이 지나도록 살아온 나는 이민이라는 행위와 정반대의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에 깊은 사랑을 품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내가 생각한 영화의 본질이 이곳에 있다. 삶은 어느 곳에서건, 어느 형태에서건, 그리 다르지 않다는 .  영화를 보는 한국 관객이 자신의 유년시절과 삶의 어느 지점을 애틋히 떠올리는 것에는 영화의 주인공들이 한국 사람이라는 문화적인 개념보다  넓은 곳에 있다. 삶을 살면서 거주지를 옮기고, 외지인이 되어가면서 뿌리를 내리려는 일련의 행위들을 같은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고 결론 짓기엔 그보다  무언가가 있다. 그리고  안에 우리의 삶속엔 엇나감이 있다. 치기어린 마음에 상처를 주고, 서로 다른 꿈을 꾸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성을 내지르는 일련의 좌절 속에서도 함께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일까. 함께 뿌리내리려 하는  행위엔 어떤 의미가 있는가.



미나리에서 그려지는 스티븐 연과 한예리, 이 부부 사이에 판타지는 없다. 오로지 현실만이 있다. 서로를 구원해내기 위해 그리는 천국은 서로 다른 천국처럼 보인다. 제이콥과 모니카의 꿈은 사실 같은 곳에 있다. 서로 다른 길에서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이 부부라고 했던가. 내가 누굴 위해서 이러는지 몰라서 하는 말이냐, 이게 누굴 위한 것이냐며 언쟁을 벌이는 장면에서 난 누구의 편도 들 수 없었다. 그리고 윤여정이 연기한 순자는 결론적으로, 이영화의 히로인이다. 데이빗의 심장, 부부의 갈등, 가족의 분열을 막는 핵심이다. 미나리의 씨앗을 가지고 날아온 히로인. 어쩌면 정답이 보이지 않는 이민생활의 해답. 그리고 그 해답은 결국 사랑이다.



순자를 보면 대부분의 관객들은 자신의 할머니를 떠올릴 것이다. 바퀴 달린 트레일러에서 저녁을 차릴때 내음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난 나의 할머니를 떠올렸다. 할머니, 할아버지, 외할머니 그리고 외할아버지. 불안에 떨던 나를 품에 안고 쓰다듬던 그 손을. 그 숨소리를 떠올렸다. 놀랍도록 나의 개인적인 기억에 가닿으면서 새삼 윤여정의 연기에 경이로움을 느꼈다. 현재 윤여정이란 원로 배우의 퍼포먼스가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는 것엔 이상할 것이 없다. 사실 나는 스티븐 연이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는 것이, 윤여정이 여우조연상을 받는 것보다 더 큰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웬걸, 윤여정의 수상과 주목은 단지 다른 세계의 배우를 인정해주는 시각이 아니라, 연기력 그 자체에 있었다. 내가 우매했다. 윤여정과 한예리의 협연을 보면서 미소가 떠올랐다. 너무 좋았다. 따뜻했다.



우리라는 단어는 참 많은 걸 준다. 우리 집. 우리 가족. 우리 농장. 우리 가든. 우리 할머니. 우리. 극중 모니카와 제이콥이 서로의 끝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토록 치열히도 살아야 하는 이유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기도밖에 남지 않은 절실한 상황에서. 실패, 좌절, 현실, 이상. 다른 말로 인생이라 하는 거대한 지표속에서 미나리는 연대와 사랑을 이야기한다. 가족과 동료와 함께 연대하며 살아가라는 것을 이야기한다. 서로를 한 번 더 이해하고 한 번 더 마주보라는 것. 우리 함께 살아나가자는 것. 그것에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면, 이 모든 게  다 무슨 소용인가?






조금 더 나은 내일을 위해 모두가 분투하고 모두가 살아간다. 이 지겹도록 뻔한 구절은 인간에게 필요하다. 지금껏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앤과 데이빗에게서 나를 봤다. 모니카와 제이콥에게서 훗날의 나를 봤다. 할머니의 동그랑땡이 생각난다. 할머니의 김치를 먹고싶다. 언젠가 그리워질 날이 오겠지. 그럴때면 생각하겠다. 함께 살아온 눈부시도록 평범한 나의 나날들을 생각하겠다. "미나리는 어디에서건 잘 자라." 더 이상 이 영화의 문화적 태생이 어디냐에 대한 논란은 부질없어 보인다. 이 영화는 어느 곳에건, 어느 나라에서건, 어느 관객에건 뿌리내려 만개할 따뜻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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