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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ichterin 여자시인 Jul 10. 2022

실력 없는 자존심보다 더 비참한 것

드라마 [안나] - 감춰놓은 자기 밑바닥과 욕망이 건드려질 때


이 드라마를 정주행의 길로 이끈 결정적인 요인은 바로 유미의 남편 ‘최지훈’의 이 대사였다.


실력 없는 자존심만큼 비참한 게 또 없잖아.
이 바닥에서는 기회를 잡는 게 그게 실력이에요.


나는 회차를 끝까지 시청하고 나서도 계속해서 끈끈한 경남 억양으로 툭 내뱉듯 치던 이 대사가  던진 미끼를 물어버린 것 같다. 말라 바스러지기 일보 직전의 유미를 보며 감정이입을 했으면서도 사실은 최지훈 같은 욕망에 충실한 사람이 던지던 이 말에 기분이 확 더러워졌는데 그 이유는 이게 더럽게도 딱 날 겨냥하고 있더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꼴같잖은 주제에 자존심만 하늘을 찌르고 있는 나라는 인간을 대놓고 겨냥하고 있다는 생각에 확 잡쳐버린 기분을 하고서 그걸 고스란히 인정해야 하는 굴욕감마저 느꼈다. 똥 자존심 그만 부리고 없으면 넙죽 엎드려서 던져주는 기회의 동아줄을 잡으면 그게 실력일 텐데 여전히 나는 꼴통이라 이건 이래서, 저건 저래서 팽팽 패대기치고 쳐내면서 비참한 자존심만 남은 초라한 밥그릇을 응시한다.


4화에서 아내 안나의 부탁을 받고 ‘지원’을 유력한 신문사 정치부 기자로 꽂아주며 낙하산 인사를 시전 하는 과연 졸부 최지훈 다운 대사다. 정의로운 사회를 향한 패기가 충만한 젊은 기자를 앞에 두고 장차 내 사람이 될 사람인지를 시험해보고 싶은 의도도 있지 않았을까? 그러다 지원에게서 반골기질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고 그런 식으로 하면 이 바닥에서 오래 못 버틴다는 은근한 협박도 자연스럽다. 처지가 아쉬울 때는 기회를 잡는 것이 실력이라면서 말이다. 기회를 잡는 것이 실력인데 바로 자기 아내처럼 이라는 말을 덧붙인다. 그에 지원은 그녀가 무슨 기회를 잡았기에 그러냐는 말에 지훈은 바로 자신과 결혼을 한 것이라고 당연스레 응대한다. 그때 어이없는 지원의 ‘아아..(그렇구나)’라는 경멸 어린 소리에 지훈은 능글맞게 그것을 따라 한다. 지훈 같은 사람들은 이미 그런 상황에 나름대로 도가 텄을 것이다. 자기 욕심을 숨기지 않고 밑바닥에서부터 치고 올라온 경험이 있는 사람들 가운데 더러운 일도 마다하지 않고 불굴의 불도저 정신으로 밀어붙여 온 사람이라면 적들도 많았을 것이고 자신을 멸시하는 이들의 멸시 포인트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유미/안나는 그걸 스스로도 부끄럽게 여겨서 최대한 그 티가 안 나게 속이는 쪽을 택했고 지훈은 그것도 능청스레 드러내며 쌈 싸 먹을 줄 아는 두꺼운 낯짝을 가졌다. 비웃을 테면 얼마든지 비웃어 봐라 — 내가 다 씹어먹어 줄게. 이 남자는 승냥이 같다.


거절을 할 수 없게 이미 판을 다 짜 놓은 상태에서 옵션을 주는 척하면서 협박도 좀 섞어서 결국 상대에게 원하는 바를 관철시켜버린 남자는 드라마 <정도전>에서 나온 말을 인용하며 한 술 더 뜬다. 이 말은 지훈이 지원에게 정도전이 한 말이라고 했으나 드라마의 후반부에 밝혀지기로, 지식이 짧은 지훈의 착오였다. 작가의 의도적인 장치였다. 이 말은 원래 정도전이 아니라 이인임이라는 배역이 했던 대사였다.



힘없는 자의 용기만큼 공허한 것도 없지요.
세상을 바꾸고 싶으면 힘부터 기르세요.
고작 당신 정도가 떼쓴다고 바뀔 세상이었으면
난세라 부르지도 않습니다.


얼핏 들으면 좀 짜증 나긴 하지만 모조리 다 맞는 말 같다. 쥐뿔도 없으면서 목소리만 크다고 사람들의 이목이나 잠시 끌뿐 뒤이어 따라올 것은 조소와 멸시일 터이다. 영향력을 행세하려거든 먼저 자신을 세우고 힘을 기르고 나서 해도 늦지 않다. 그래야 사람들이 거기에 집중을 해준다. 대중은 후광효과에 약해서 뭔가를 이뤄낸 유명인이 하는 말에는 끔뻑 넘어가 주는 경향이 짙다. 이러니 능력 있고 난 사람에게는 힘없는 사람들이나 구린 데가 많은 사람들이 돈다발을 싸들고 찾아가서 청탁을 하며 자기 말을 대신 좀 영향력 있게 해 주십사 부탁하기도 한다. 이 점은 200프로 동의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힘없는 자의 용기를 무조건 힘이 없다는 이유로 폄하하는 것은 너무 슬픈 일이 아닐까? 이걸 이렇게 슬퍼하는 까닭은 그보다 더 슬프게도 역시 내가 쥐뿔 없으면서 객기나 부리고 있는 힘없는 처지이기 때문인 걸까?





그러고 보면 나는 난세에서 나를 구원해줄 백마 타고 올 초인 같은 구원자, 귀인을 늘 기다려왔다. 그러나 번번이 그런 기회들이 나를 발탁하여 그 백마 탄 자리 뒷 꽁지에라도 올려 태우지 않은 까닭은 쓸데없는 자존심을 부리느라 미운털이 박혀서였지 않았을까 싶다. 아군을 하나라도 더 만들어도 모자랄 판에 어디서 나온 객기인지 똥오줌을 못 가리고 나대다가 적을 만들어냈다. 늘 조마조마하고 아슬아슬했고 피해의식만 점점 더 커져갔다. 직장에 들어가서는 열등감에 사로잡힌 사수를 인격적으로 존경할 수 없다는 이유로 뻗대기도 했고 그렇다고 일을 잘하지도 못하면서 도저히 내입으로 못하겠다 소리는 못하겠어서 혼자 끌어안고 끙끙거리다가 더 갈등의 골을 증폭시키기도 했다. ‘니까짓 게 뭐라고’라는 적개심을 가득 품으며 살았던 것 같다.


도대체 없는 주제에  납작  숙이고 ‘까라면  안되는지 나도 정말 궁금하다. 아직 배가 덜고파서 그런가 보다. 우리 엄마는 절대로 나를 이렇게 기르지 않으셨는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내가 동일한 여건의 인물이었다면 유미가 해냈던 그런 식의 몸종 같은 아르바이트는 나는 절대 못해냈을 것이다. 이런 성격으로 주로 맡았던 어드민이나 오퍼레이션, 뭔가 중간보고해 주고 어레인지 해주는 식의 업무들을  놨으니 일을 하러  때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가축의 심정이었다. 결과적으로 몸과 맘이 상하여 번아웃이 되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뱉고 뛰쳐나가듯 퇴사를 하기도 했었고 전화번호 목록에서도 깡그리  지워버리고 그냥 영영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다고 악다구니를  밤들도 많았다.  뒤에는 언제나 깊은 우울과 수심이 찾아왔고  불면의 밤은 그칠 줄을 몰랐다. 내면의 깊은 수치심이 건드려졌기 때문에 자주  팽개치고 죽어버리고 싶었고 그럴 때마다 외국에서 혼자 죽으면 그냥 내국인이 고독사  것보다  골치 아플 일이 많을 것이기에 별수 없이  악물고 하루치씩  버텨나가는 식으로 오늘까지 살아냈다. 지금은 일을 하지 않고 지내지만 언젠가부터 다시 경제활동을 시작해야  텐데 다시  뻗대는 심사가 튀어나오고  갈등을 빚고  수틀려지고  박차고 나오게 될까  너무나도 두렵다.


이런 나를 봐 놨더라면 최지훈은 그가 나이 지긋한 운전기사를 지하주차장에서 폭행하여 내쫓았듯이 나도 구둣발로 조인트 까이고 어퍼컷까지 당한 뒤 처참하게 개무시를 당했을 것 같다. 꼴값 작작 떨고 내가 시키는 대로 다 해서 내가 던져주는 밥 먹던지 아니면 저기 가서 찌그러져 있으라면서. 그런 상황이 닥쳤을 때 나는 어떻게 대응할까? 잘못했으니 한 번만 살려달라고 할까? 아니면 그 와중에도 너 같은 게 주는 거 안 먹고 차라리 굶을 거라고 객기를 부리고 있을까? 내 인생이 좀 피어날까 싶을 때 결정적으로 되돌이표를 그리는 것은 내가 이렇다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개선의 여지없는 똥 자존심을 못 놓는 탓이다. 실력을 키워서 코를 납작하게 해 주면 되는데 그 실력도 과연 치열하게 매달려서 뭔가를 이뤄낼 만한 열정도 없다. 그러니 계속 구원자, 귀인만 목이 빠져라 기다리는 것이다. 이제 답이 나온다. 왜 내가 극 중 유미의 행실에 측은지심이 느껴지고 과몰입을 하게 되었는지를. 유미는 섶을 쥐고 불구덩이로 들어가는 일인 줄 알면서도 자기 신분세탁을 해 가면서까지 귀인을 제 발로 찾아 나서서 최지훈 같은 인간쓰레기라도 일단 자구책 삼아서 겉으로나마 호화스러운 삶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행동이 분명 잘못되었음을 알면서도 또 그녀가 아주 잘못되지는 않기를 바라는 이상한 마음마저 들면서 자괴감에 사로잡히고 있는 것이다.


이번만큼은 말로만 이거 해야지 저거 해야지 하면서 실행은 하나 안 해놓고 현실비판만 오지게 했던 행실에 변화를 줘서 뭐라도 일단은 해보는 걸로 하기로 했다. 그렇게 브런치도 재수 끝에 입성할 수 있었고 퇴사 후에 배워보겠다던 것들도 작게나마 배워보면서 재취업을 위한 이런저런 활로들을 모색하고 있다. 그런데 그걸 죽기 살기로 매달려서 끝장을 보겠다는 근성이 생겨나질 않는다. 막상 책을 쓰려했는데 책으로까지 엮어서 쓰고 싶은 주제가 없거나 생각보다 너무 빈약했고, 시장에서 먹히는 주제들은 전연 쓰고 싶은 마음이 안 생기고 대체로 이런 식이다. 그래 놓고 누가 날더러 이렇게 써봐라 저렇게 해봐라, 하는 말은 듣기가 싫고 그저 뇌리에 강렬하게 박힌 대사들과 캐릭터에 이끌려 중독된 이 드라마를 보고 이토록 우려먹기 리뷰를 시리즈로 쓰는 고집을 부리고 있다.





지금도 여전히 내적 갈등은 유효하다. 전문성을 갖추고 야무진 앞가림을 해내면서 오은영 박사님 말마따나 ‘우뚝 서겠다!’라는 마음이 있다.  뭘 가지고 우뚝 서고 싶은지 그건 역시 글을 써서 인정받는 일인데 그게 자꾸만 요원해지니까 마음이 더 착잡해지면서 다른 생계수단으로 삼고자 하는 기술들을 배우는 일도 악착같이 매달리지 않고 흐리멍덩하게 되어가는 형국이다. 그러면서도 다시 예전에 나를 거쳐간 그런 일자리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무엇보다도 인간을 대하는 일들이 많이 필요한 일들은 최대한 줄여보고 싶다. 그냥 안 하고 싶다. 이 드라마를 보면서 겁이 나는 것이 하나 생겼는데, 바로 이런 절박하고 착잡하되 뾰족한 수 없는 고구마 한 바구니 먹은 것 같은 상황에서 까딱 잘못하면 유혹의 덫에 걸려들기 쉽겠다는 경각심이다. 유미가 영혼 빼고 다 바꿔서 결정적으로 영혼마저 잃은 듯이 불안에 떨며 사는 것처럼, 날더러 부양해 줄 테니 걱정 말라고 하면서 접근해오면 양아치 최지훈 같은 남자라도 혹해서 넘어가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마저 느낀다.


한편으로는 여전히 자기 욕망에 솔직해서 자기가 원하는 삶의 방식을 취해내는 사람들을 보면 아드레날린이 솟구친다. 나쁜 짓으로 얻어내는 것 말고, 영화에 나올 것 같은 그런 일이 일어난 사람들. 이를테면 ‘나는 물질적 풍요가 좋고 그거 내 힘으로 혼자 이루기 힘드니 조력자 만나서 도움받으며 살고 싶다는 욕망’이 있다면 그것을 감추려고 하기보다 자기한테 눈먼 경제력 탄탄한 남자가 적극 구애해서 일 안 해도 된다고 해서 결혼해서 윤택하게 사는 사람들이라던지 아니면 조상님이 꿈에 나와 불러주신 번호로 로또 맞은 사람들이라던지 코인 대박 난 사람들이라던지 후원자를 만나 탄탄한 지원을 입고 사업에 성공한 사람들이라던지 그래서 꼴같잖은 것들은 안 보고 살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삶을 살 수 있는 사람들.


발정 난 승냥이 같은 인간쓰레기 최지훈이라는 가상의 인물이 내뱉은 말이 내 밑바닥을 들춰낸다. 그의 말대로 이보다 더 비참한 것이 없다는 실력 없는 자존심을 내세운 대가일 텐데 생각해보면 그보다 더 비참한 것이 또 있는 것 같다. 그것은 개선 의지 없는 저항심이다. 


실력 없는 자존심은 이 답 없는 저항심이라는 뿌리 위에 줄기처럼 자라나 독을 품은 열매를 맺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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