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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ichterin 여자시인 Jul 09. 2022

아쉬운 소리를 위한 면죄부

드라마 [안나] - 돈이 전부는 아닌데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게 많더라


이 드라마는 드라마이면서 시종일관 지극히 현실적이다.

몰입감이 유달리 높았던 이유는 개연성과 더불어 핍진성까지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너무 소름 돋는 현실 반영으로 이 작가를 한 번 만나서 비법 전수라도 청하고 싶은 심정이다. 없이 사는 것들의 입장을 어찌 이리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포착해 냈을까? 작가도 없이 살던 사람일까? 내가 작가를, 특히 creative writing을 하는 작가들을 동경하는 이유는 이 같은 데에 있다. 한 세계를 창조해 내는데, 거기 인물들을 면밀하게 분석해서 적재적소에 포석처럼 깔아 두는 능력 같은 것들. 마치 문화인류학자의 현지조사 후에 작성된 민속지학적 연구보고서처럼 말이다. 마치 거기 들어가서 일정 기간 이상 동고동락 한 뒤에 얻은 깨달음들을 증거로 제시하는 듯한 치밀함과 그 와중에도 끝내 잃지 않으려고 노력한 흔적이 엿보이는 ‘가치중립성’까지. 그러는 한편 청중으로 하여금 공감을 자아내게 할 여지는 관대하게 남겨두는 노련함마저 다 갖추어놓았다.


자신에게 유일하게 ‘유미야-‘ 이름 불러주고 진실되고 선하게 대해준 지원선배를 데리고 일식 오마카세 같은 곳에 데려가서 저녁 한 끼에 30만 원이 넘는 식사를 대접하는 여유로워진 안나, 아니 유미. 촌스러운 선배는 스시장인이 접시에 올려주는 것들을 접사로 촬영하기 바쁘다. 이게 웬 횡재냐, 이럴 때 알차게 얻어먹어야 한다- 이것도 있이 사는 지인을 둔 혜택이라는 기색이 역력하다. 벤처사업가에게 시집 잘 가서 팔자 핀 줄로만 알았던 후배에게서 남편이 결혼 후 정치 바람이 들어서 자꾸 주위에서 사람들도 부추기고 깨춤을 추고 있는 중이라는 고백들을 담담하게 펼쳐놓는다. 어라? 있는 집 ‘싸모님’으로 갔으면 꽃길만 걸을 줄 알았는데 역시나 주가 상승으로 벼락부자 된 IT벤처기업 사업가들 중에 더러는 좀 위험 인물도 있다던 자신의 촉이 들어맞는 건가 지원은 그런 생각도 했을 것 같다.


비싼 밥도 얻어먹었겠다, 돈이 좋긴 좋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보상을 받기는커녕 그냥 계속 기약 없이 열심히 살 일만 더 남아있는 현실에서 가끔은 지인 찬스로 이런 호사를 누리는 것도 나쁘지 않지 하면서도 속으로는 부럽기도 했을까? 대쪽 같고 청렴한 언론인 지원에게는 해당사항 없는 일이었으려나? 그런 줄만 알았던 지원이 웬일로 이렇게 묻는다. 나는 지원이라는 캐릭터가 이 질문을 대놓고 물을 수 있는 여자라는 것을 알게 된 뒤로 이 여자를 비로소 마음 놓고 좋아할 수 있게 되었다.


돈이 많으면 뭐가 좋아?


이에 후배는 막힘 없이 담담하게 답한다.


남한테 아쉬운 소리를 안 해도 되는 거?



정답이다. 이게 팩트다.

이 이상 뭐 다른 말은 더 필요치 않다. 이거 한마디면 충분하다.

지원은 KO 당했다. 그래, 그래서 자신은 오늘도 엄청 아쉬웠다고. 자신이 늘 아쉽게 사는 이유를 확실하게 느꼈을 것이다.




이 대사를 듣는데 정말이지 얄미워 죽는 줄 알았다. 얄밉게도 맞는 말이라 반박도 불가하고 그냥 내 마음을 그대로 다 가져다 탈탈 털어 쓰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보다 좀 더 어렸을 때까지만 해도 돈이 많으면 좋기야 하겠지만 그게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는 교과서 달달 외우는 재수 없는 모범생의 모범답변 같은 소리를 했었더랬다. 나이를 한 살 두 살 더 먹으며 30대에 들어서 있는 작금에는 더는 모범답변을 달달 거리기에 내가 확실히 조금은 더 닳은 느낌이 역력하다. 돈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는 의견은 여전히 유효하다만,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이 참 많다는 생각이 추가되었으며 그 생각은 해를 거듭할수록 더욱 강화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자잘한 불편을 필요 이상으로 자주 많이 느끼는 나 같은 답 없는 인간에게 돈으로 그 부분을 개선해 줄 수 있는 여지가 대폭 늘어난다는 점은 부인하려야 부인할 수 없다. 그런 일들에서 놓여나려면, 언짢은 일들을 피하려면, 남에게 일일이 다 부탁하고 남의 시간과 페이스에 내 일정을 맞추는 일을 최대한 줄여보려면, 웬만한 것들을 외주 주면서 해결할 수 있으려면 ‘뭐니 뭐니 해도 머니(money)’라는 말을 떠오르게 한다. 돈의 많고 적음이 반드시 행복한 삶을 보장할 수는 없을지라도 돈이 많다면 시장에 들러 국거리 장 봐오듯이 행복의 자잘한 거리들을 마련 하기 수월 할 것이다.


한 가지 더, 돈이 늘 없어놨던 사람들일수록 돈이 전부가 아니고 돈을 밝히는 것은 천박한 일이라고 말하는 경향이 높으며, 돈이 한때는 없었으나 이제는 좀 생겼다거나 혹은 돈이 원래부터 늘 있어놨던 사람들일수록 돈을 대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부여하기보다 합리적으로 돈을 늘려나가는 전략에 대해 토론하길 즐긴다는 것이다. 이 마인드셋의 차이야말로 가진 자와 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이 삼자 간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 같다는 생각이 갈수록 든다. 특히나 돈은 삶의 긍정적인 면 보다도 부정적인 면을 대할 때 진가를 발휘하는 것 같다는 의견이다. 이를테면 갑작스럽게 중병에 걸리게 된다거나 사고를 당한다거나 그래서 일상생활에 지장이 생기는 일이 발생한다면, 돈이 있다면 재화를 이용하여 관련된 서비스를 구매할 수 있을 것이다. 일상에 구멍이 생기는 일이 줄어들 것이고 일상 복귀도 빨라질 것이다. 그 값을 지불할 능력이 없거나 쪼들리는 상태라면 여기저기 손을 벌리러 다니거나 친지 등의 비교적 가까운 사람들에게 와서 좀 도와달라는 말을 해야 하는데 처음에는 도움을 주다가도 사람들은 점점 그냥 도와주지 못하겠다고 은근히 사례를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 대놓고 말하지 않는다 해도 그런 건 도리어 다른 쪽에서 말 나오기 전에 미리 알아서 손에 좀 쥐어주는 편이 에티켓 상 권장되는 일일지도 모른다.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한다는 것은, 사람이 살다 보면 종종 아쉬운 소리도 하고 아쉬울 때 서로 도와가며 관계를 발전시키는 거라지만,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제아무리 넉살 좋고 얼굴이 두꺼운 사람일지언정 이게 그렇게 유쾌한 일이 아님은 확실하다. 사람은 누구나 잘난 존재이고 싶지 아쉽고 졸아 든 상태로 있고 싶지 않아 한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열세에 놓인 사람은 그 처지로 인하여 이런 경험에 조금 더 빈번히 노출될 확률이 높다. 이 유쾌하지 않은 경험을 자기만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미성년 자녀들까지도 세트로 겪게 되기 좋으며, 자기 대에서 이렇다 할 변화를 이뤄내지 못한다면 다음 세대로 현 상태가 대물림되는 것은 일도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매주 1등 당첨자가 많이 나온다 카더라 하는 편의점 앞에 긴 줄을 지어 서서 기어이 로또를 한 장이라도 사가려고 하고 갭 투자를 해서라도 아파트를 장만하려고 하는 것일 테다. 아쉬운 소리 안 해도 되는 삶을 위하여 말이다.


돈이 많이 생긴다는 것은, 부자가 된다는 것은 생각보다 별로 대단할 것 없이 아주 심플하게 그저 ‘앓는 소리 안 하거나 덜 할 수 있는 생활이 가능해지는 상태에 놓이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여 한치의 망설임 없이 한 끼에 여자 둘이서 아무리 푸짐하게 먹었기로 서니 30만 원이 넘게 찍혀 나온 계산서를 힐끔 한번 보고 한쪽 옆으로 밀어놓고 계속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 ‘아 나 현금을 안 가져왔는데 좀 보태주면 내가 계좌로 쏴줄게’ 라는 말을 한다거나 ‘이 카드 안되면 이 카드로 한 번 해보세요’ 라며 카운터에서 지갑을 털어내는 등의 부가적인 가타부타 없이 그냥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후식을 시키거나 다음 장소로 이동을 하거나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게 뭐 대수냐고 할 텐데, 그게 반복되면 대수 맞더라. 아무리 아니라고 해보아도 대수더라. 특히나 본인이 그런 말 남 앞에서 자신 있게 잘 못하는 소심이나 예민이라면 더더욱 대수 맞다. 대수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가슴속에 내상마저 입기 쉽다.





내가 돈이 많아서 어찌 쓸 줄 몰라하는 사람들이 부러운 것은 더도 덜도 말고 딱 이 이유에서이다. 내가 원치 않은 일, 장소, 사람을 내가 원치 않는 때에 하지/가지/만나지 않을 수 있는 자유를 마음껏 누리고 살아도 일상생활에 한점 해를 입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즉, 내가 갖고 싶은 것을 쉽게 갖고 하고 싶은 일을 눈치 보지 않고 할 수 있어서 라는 긍정적인 동인 보다도 하기 싫고 만나기 싫은 사람을 내가 그러기 싫을 때에 안 하고 안 만날 수 있는, 다시 말해 부정적인 일들을 면할 수 있는, 아쉬움과 불편함에 대하여 면죄부를 주어 그러한 감정을 겪을 일들을 내 일상에서 사면령을 내려 면제시키는 일을 하고 싶어서이다.


유미가 돈이 처음부터 많았더라면, 안나가 될 필요도 없었을 것이고 진짜 ‘안나 리’였던 ‘현주’ 같은, 그리고 그녀네 속물적인 가족들과 ‘마레’라는 호화 가구 편집숍과 인연을 맺을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안나가 거기서 겪었고 들어야 했던 많은 싫은 일들도 없었던 일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무리 삶의 많은 경험이 자산이 된다지만 때로는 꼭 직접 겪지 않아도 될 경험들도 있는 법이다. 그로 인해 사람이 좀 더 단련되고 성숙될 수도 있다만 되려 그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인격적 상처를 입게 될 수도 있다. 유미는 그런 사람들이나 그런 장소와 관계를 맺을 것이었다면 차라리 손님으로 가서 고객 대 업주 가족 정도의 사이로 만났더라면 많은 것들이 달리 전개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그래서 유미는 적어도 물질적 결핍이 없거나 덜해서 질 안 좋은 짝퉁 벤처사업가 같은 남자와 결혼을 할 생각조차, 아니 그런 남자를 만날 일조차 생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니 아예 지금까지 그녀의 인생에서 일어났던 거의 대부분의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거나 전혀 다른 모습으로 일어났을 것이기에 그녀의 삶만큼은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나 역시, 이제 과거보다 더 닳아가서 조금씩 더 나날이 속물적으로 변질되어가는 중이기 때문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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