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안나] -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주인공이 되고 싶었을 뿐
사람의 전 생애에서 초기에 해당하는 성장기는 그 나머지 뒤이어 올 시기들에 실로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에야 크게 상관하지 않았지만 살면 살수록 가슴에 와닿는 것은 어떤 양육환경에서 어떤 성장과정을 거쳐 어른이 되었느냐는 한 사람으로서 살아가며 겪어낼 많은 일들에 대처하는 방식과 살아가는 태도나 관점에 지속적인 개입을 한다는 것이다. 어릴 적에 일은 어릴 적에서 끝냈으면 좋았을 텐데 왜 성인기에 접어들어 까지 제대로 어른이 되지 못하고 아이인 채로 남아있게 하는 걸까? 요즘 많이들 논의되고 있는 ‘내면 아이’라는 개념이 주목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욕심도 많고 될성부른 재능도 있었지만 그것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욕구가 번번이 좌절되거나 아주 일부분만 겨우 충족되는 식으로 지속적인 결핍에 노출되어오던 아이는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버겁다. 하여 불만족스러운 현실을 탈피하고자 하는 강렬한 염원은 그 현실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드러낸다. 그것이 지속된다면 아이는 어느새 그것이 자신이 부정해버린 현실이었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되거나 혹은 일부러 망각하는 쪽을 선택하여 자신이 생각했을 때 조금이라도 자기 기준에 충족된다고 생각되는 가상의 어떤 상태를 현실이라고 믿어버리는 일이 생기게 될 수도 있다. 그런 믿음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더 굳어져 버릴 것이고 매일 마주하는 현실과의 격차는 더욱더 벌어지게 된다. 그럴수록 그런 현실이 불어나는 이자처럼 감당하지 어렵게 부담스러워지며 자신이 이상향이라 꿈꾸는 이미지들을 강화시켜나간다. 원래는 그게 맞는데 지금 잠시 어떤 착오로 인하여 자신은 잠깐 동안만 이 상황에 놓여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남들과 다른 특별한 아이인데 지금 잠깐 어떤 연유로 멈춰있는 상태고 언제든지 다시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도식 구도를 만들어버린다. 어릴 때 만들어지면 만들어질수록 이러한 도식 구도가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실제로 그런 것이라고 여길 확률이 높아질 것이다.
여기에서 그쳤으면 좋았으련만, 상황에 따라서는 몇 발자국 더 가버리는 아이들도 있다.
극 중에서 안나가 되어버리는 유미 역시 그러하다. 이쯤 되고 보면 유미에게는 자신의 가난한 가정형편과 장애가 있는 어머니 역시 이 모든 판타지를 강화시켜주는 훌륭한 도구가 된다. 바로 자신에게 ‘특별한 아이’라는 프레임을 만들어 줄 수 있는 요소들이기 때문이다. 남들과 다른 유미. 가정형편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뭐든 척척 잘 해내는 유미. 특별하고 특출 난 유미. 풍족한 집안에서 자라서 든든한 재정적 지원을 받고 있는 아이들보다 발레도 더 잘하는 유미. 그 와중에 공부도 언제나 잘하는 유미. 얼굴도 예쁘고 인기도 많은 유미.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유미. 왜냐하면 유미는 특별하고 소중하고 귀하니까. 성공은 모두 유미 것이어야 해. 유미만이 가질 자격이 있어. 왜냐하면 유미는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다 잘 해내니까 그건 모두 다 유미 거야. 유미가 가져야만 하고 유미만이 가질 수 있어.
이것은 그 훨씬 이전부터 알게 모르게 세상 속에 노출되면서 자존심에 입어오기 시작한 크고 작은 생채기들에 대한 방어수단으로 생겨난 사고체계일 수도 있다. 이렇게라도 해서, 오죽했으면 그 어린것이 이렇게까지 해가면서 자신의 상처 입은 에고를 보호하려고 했을까? 자존심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는데 그 뿌리와 토대가 되어주어야 할 자존감이나 자기 효능감은 얇디얇은 유리필름보다도 못한 채로 불안 불안 위태롭게 자라났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구질구질한 현실을 타계할 술책으로서 이런저런 독특한 이력들을 자기 인생에 에피소드로 만들어주면서 남과의 차별화라는 순간적인 신경안정제 주사를 자기 손으로 놔주면서 살아왔을 심산이 크다. 아직 교복을 입고 있는 여고생 신분으로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젊은 총각 음악 선생님과 연애도 하고, 그 선생님의 마음을 얻은 것은 조숙하고 예쁘고 똑똑한 자기뿐이고 그런 예술가적인 음악을 아는 선생님이 자신의 가치를 알아봐 주었을 것이라고 여겼을 수 있다. 충분히 공부로만 해도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지만 그 와중에 또 미술도 학원을 다녀가며 없는 재능일지언정 아름다움을 동경한다는 이유로 꾸역꾸역 해나가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였지 않을까? 그 불장난 같던 풋사랑 연애도 그 믿었던 아름다움을 아는 예술가 선생님이 때린 배신으로 깨어져버릴지언정 그것조차도 독특한 삶의 이력이 되었을까?
수능을 4개월 남기고 쫓겨나듯 새벽차로 서울로 가서 불안정한 상태로 치른 수능에서 한 번의 고배를 마시는 유미.
두세 번 옛날 담임선생님 집에 밤차로 찾아와서 목놓아 울다가 다음날 아침 첫차로 돌아가길 반복했다는 것만 봐도 모르긴 몰라도 서울에서의 짧은 학교생활과 거기에서 오는 여러 가지 예상 못한 딜레마들, 막상 서울 같은 대도시 상위권들과 경쟁하기에는 조금 모자랐을지 모를 자기 실력을 마주하는 것에서 괴로움 등을 느꼈을 확률도 높다. 그녀의 옛 담임선생님은 그녀의 과거를 알아보러 다니는 지원과 만났을 때 다음과 같은 말을 하지 않았던가?
똑똑하다는 말 듣고 자란 애들은
자기가 쓸모없어졌다는 생각에 몹시 취약해요.
똑똑하다고 믿었고, 아니, 지금 처해있는 이 시궁창 같은 현실을 타개할 유일무이한 자구책으로서 똑똑하기라도 해야 했는데 더 이상 그리 똑똑하거나 특별하고 특출 나지 않다는 것은 죽느냐 사느냐 급의 존망이 달린 문제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러니 밤이슬을 맞으며 고향으로 찾아간 곳이 자기 집이 아닌 애먼 자기를 내쫓은 학교의 옛 선생님에게로 발걸음을 향하게 했을 것이다. 취약하기 그지없는 부모 앞에서도 딸자식 잘난 것 하나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듯 든든해하는 부모를 알기에 앞서 말했듯이 자존심은 높다랗게 웃자랐기 때문에, 차마 부모 앞에 가서 울지 못했을 것이다. 자기를 나아주고 길러준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이들 앞에서도 마음껏 울지 못하고 제일 중요한 감정을 제일 중요한 사람들 앞에서 감추면서. 이 여자에게 감추고 연출하고 척하는 것은 그녀가 상상하기 훨씬 이전부터 훨씬 체계적이고 복잡하게 발달해오고 있었다. 오직 그녀 자신만이 이것을 너무 늦게 알아차렸을 뿐.
쓸모없다는 말은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참을 수 없이 괴롭고 수치스러웠을 것이다. 내가 이대로 이렇게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아무것도 손에 넣지 못한 채로 빈털터리로 패잔병처럼 스러져버리고 말다니. 내 저것들 앞에서 큰 절을 받는 자리에 반드시 올라야 하는데 왜 자꾸 현실은 그 정 반대로 흘러가는 것일까?
암만 생각해보아도 나는 잘못한 것이 없고 그저 잘한 것만 있고 잘하려고만 했을 뿐인데 어디서부터가 잘못된 것일까?
국민 치료사 반열에 오른 오은영 박사의 <금쪽 상담소>라는 프로그램에 아역배우 출신으로 사격도 도전하고 여러 가지 재능이 많은 한 소녀가 아버지와 함께 출연한 에피소드가 있다. 소녀는 술술술 막힘없이 자신의 포부를 한껏 브리핑한다. 그것을 흐뭇한 눈으로 지켜보는 그녀의 다소 과보호 성향의 아버지. 그런 부녀에게 오은영 선생님은 찬물을 좀 끼얹어야겠다고 했다. 다양한 것을 잘하고 싶은 것 까지는 좋으나 그것들을 왜 하며 그로써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에 대한 생각이 부재한 것 같고 보이는 것에 더 중점을 두고 무엇이 되어 우뚝 서야겠다는 마음만 앞서있고 자기 자신에 대한 포커스가 비대하게 팽창한 자의식 과잉 상태라고 말이다. 그러자 소녀의 태도는 시작 때와는 확연히 다르게 불안하게 흔들리며 그 와중에도 아버지의 눈치를 굉장히 많이 보고 있었다. 부모의 기대와 지원을 전폭적으로 받으며 성장한 소녀가 재능이 많다고 생각한 여러 분야에서 조금씩 조금씩 잘하긴 하지만 어느 것 하나에서 확실한 두각이 나오지 않자 불안해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다. 어쩌면 이 소녀는 드라마 속 유미의 유복한 가정환경 버전이지 않을까 싶다.
남들을 다 발아래로 벌벌 떨게 하면서 자신은 우뚝 서서 우러러봐지고 싶은 욕망. 그것은 없이 살며 자주 짓이겨져 봤거나 멸시와 천대를 받은 경험이 많을수록 더 비대하게 자라날 수 있다고 본다. 물론 그런 환경에서 컸다고 해서 누구나 다 이런 욕망을 키운 채 성장하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그럴 가능성은 확실히 높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에게도 그런 면이 있다. 이것을 이렇게 글로나마 시인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세월이 걸렸는지 모른다. 이것을 인정해버리면 세상이 무너질 것이라고 여겼던 때가 있었다. 지금도 이렇게 쓰면서도 가슴 한구석이 찐득찐득하고 쫄깃하다. 나는 이 아역배우 출신 소녀보다도 재능도 그리 주목받을만한 것도 아니었고 드라마 속 유미만 하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인데 재능이나 가능성의 맛을 조금이라도 확실하게 봐 본 사람이라면 여러모로 현실에서 느낄 좌절감이 클 것이다. 어떻게 해서라도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싶고 쓸모가 너무 뛰어나 아무도 함부로 굴 수 없게 만들어버리고 싶고 그렇게 해서 통쾌하게 이 세상에 대고 복수의 어퍼컷을 날려주고 싶었는데 그 욕심은 더 큰 괴로움만을 복제 생산해내고 있다. 도무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원래 사람의 존재함에는 엄청난 쓸모가 미리 예견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존재 그 자체로 아무 쓸모없는 무가치한 것도 절대 아니다. 그저 존재하는 것, 어느 날 어느 때에 그렇게 여여하게 존재하기 시작한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남보다 더 우월한 무엇인가를 갖고자 하는 욕망들이 더덕더덕 들어붙어버렸다. 그게 뭐라고. 그거라도 있어야 내가 겪은 모든 결핍들이 조금이라도 채워지며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것 같기에. 쓸모라도 있어서 남들이 나를 욕망하게 만들고 싶은데 그럴수록 그만한 쓸모는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세상에서 가장 받아들이기 두려운 점 만이 내 눈앞에 현실이랍시고 펼쳐진다면 그 참을 수 없는 괴로움 앞에 털썩 주저앉아버린다. 다시 일어나야 하는데, 그런 건 아무래도 사실 상관없고 나는 그 자체로 소중한 존재인데 머리로는 알겠는데 가슴에서 자꾸만 어깃장을 놓는단 말이다.
그래서인지 이 여자의 이야기가 가면 갈수록 남 얘기 같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