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작가인 엄마가 아이를 가르치니, 아이들이 얼마나 글을 잘 쓰겠냐며 부럽다는 듯이 말하곤 합니다. 하지만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저도 아이와 순탄한 글쓰기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며칠 전에도 저와 둘째 아이는 실랑이를 벌였습니다. 글쓰기의 방향성을 잡는 것부터 본인 생각을 적는 것까지 저와 얘기를 나눠가며 글을 써야 하는데, 이 녀석은 하기 싫다며 계속 불량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나울 수 있다’ 아니고, ‘나을 수 있다’라고 써야지! ‘수’는 띄고!”
어느새 제 언성은 높아졌습니다. 아이도 신경질이 났는지 모음자 ‘ㅜ’를 연필로 덧칠해 ‘ㅡ’로 만들더군요. 지우개 좀 쓰지, 그걸 덧칠로 고쳤습니다. 그러느라 띄어쓰기를 지적한 ‘수’는 잊어버린 건지 건들지도 않더군요. 글씨부터 태도까지 뭐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었습니다.
“아 몰라. 엄마 이제 안 가르쳐 줄래. 네 맘대로 써!!”
출처 : 픽사베이
아이와 제가 그날 쓴 것은 ‘토끼전’ 독서록이었습니다. 물론 학교 숙제였지요. 요즘 학교에서는 필독서라는 이름으로 책 목록을 주고, 그중에 몇 권이상은 골라 읽게 합니다. 저는 여러 고전 중에서 제일 만만한 ‘토끼전’을 골랐습니다. 스스로 책을 골라 읽으면 좋겠지만, 아이는 그렇게 잘 안 합니다. 그래도 읽으라고 들이밀면 읽기는 하니까 그나마 고마워해야 할까요? 아무튼 아픈 용왕님을 위해 자라가 바다에서 육지로 올라와 토끼를 용궁으로 데려가고, 토끼는 자신의 간을 내놓아야 할 상황에 꾀를 내어 다시 육지로 도망가는 이야기. 어린 시절부터 닳고 닳게 들은 이야기라 독서록도 쉽게 나올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언제나 예상을 깨지요. 그날도 그랬습니다.
먼저 제 아들이 쓴 ‘토끼전’ 독서록부터 공개하겠습니다.
용왕이 아파서 도사가 토끼 간을 먹으면 나을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도사가 연기처럼 사라지고 다음날이 돼자(되자) 신하들을 불러서 토끼 간을 구해오라고 했다. 그래서 별주부가 갔다. 별주부가 토끼를 대리고(데리고)오고 토끼를 묶었다. 용왕은 토끼 배를 가르라고 했다. 토끼는 간을 두고 왔다고 했다. 육지로 가서 도망갔다. 나는 별주부였다면 토끼를 좋아해서 시키는 일을 거절했을 것이다.
둘째가 쓴 '토끼전' 독서록
제가 이날 기대한 독서록은 토끼의 꾀에 대한 거였습니다. ‘간을 햇볕에 말리고 오느라 두고 왔다는 아이디어가 정말 기발하지 않냐, 사람이 난관에 부딪치면 머리를 써야 한다.’ 뭐 이런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또 생명에 대한 이야기도 하고 싶었습니다. ‘아무리 병 나으려고 하는 일이지만, 살아있는 토끼의 간을 빼간다는 건 너무 잔인하지 않니?’ 이런 이야기도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빨리 숙제를 끝마치고 놀고 싶은 마음이 컸나 봅니다. 다 아는 토끼전 얘기 그냥 빨리 쓰고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컸나 봅니다. 아이가 아무렇게나 양만 채우고 간 글을 보며 씁쓸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 글을 읽는 담임선생님은 얼마나 어이없어하실까.’
‘그래봤자 일주일에 한 편 쓰는 건데 어쩜 저렇게 싫어하냐.’
‘엄마가 봐줄 때 좀 제대로 하지, 나중에 중학교 수행평가는 어떻게 보려고 저래?’
맘속에 원망과 걱정이 가득 찼습니다. 저녁상을 차리면서도 계속 마음이 무겁더군요. 그래서 밥 먹다 말고 결국 얘기를 꺼냈습니다.
“그런데 아까 독서록 말이야. 너는 평소 토끼를 좋아하니까 토끼 간을 구해오라는 명령을 거절할 거라고 했잖아. 그런데 그러다 용왕이 죽으면 어떡해? 다른 방법은 없어?”
둘째는 묵묵부답이고, 첫째가 눈을 빛내더군요.
“나라면 토끼를 두 마리 구해 올 거야. 그래서 간을 반씩만 잘라주면 되잖아.”
“그럼 토끼가 살아?”
둘째가 시크하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첫째가 머뭇거리더군요.
“살..... 걸?”
그러자 애들 아빠가 나섰습니다.
“당연히 살지. 간 이식 수술도 있잖아.”
둘째가 동그랗게 눈을 뜨며 물었습니다.
“그게 뭐야?”
“건강한 간의 일부를 떼서 아픈 사람 몸에 넣어주는 거야. 그러면 떼 준 사람의 간도, 받은 사람의 간도 다시 자라난대. 우리 장기 중에 재생률이 가장 높은 게 간이거든.”
그때부터 장기 이식수술, 장기기증, 인체의 재생능력까지 아이들에게 온갖 배경지식을 설명하게 됐습니다. 아이들은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듣더군요.
사실 이 모든 과정이 독서록 쓸 때 이뤄졌다면 훨씬 좋았을 겁니다. 아이 컨디션만 괜찮았다면 제가 밥 먹을 때 꺼냈던 그 질문을 독서록 쓸 때 했을 겁니다. 그러면 지금만큼은 아니더라도 훨씬 풍성한 이야기를 독서록에 담을 수 있었을 겁니다. 그게 ‘나만의 글쓰기’이고 개인의 창의성과 개성이 담긴 글인데 말이죠. 여기까지 바라는 건 제 큰 욕심일까요? 나중에라도 그런 대화를 나눌 수 있었으니 감사한 일인 거겠죠?
아무튼 아쉬웠던 그날이 지나고 며칠 뒤 아이가 쓴 토끼전 독서록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다시 보니 몇 가지 기특한 면이 새롭게 보이더군요. 일단 ‘연기처럼 사라졌다.’는 표현을 썼다는 점. 이런 관용 표현은 많이 알아두면 좋습니다. 대부분 책을 통해 배우게 되는데, 배운 관용표현을 글에 섞어 쓰면 훨씬 풍성하고 재밌는 글이 됩니다. 두 번째로 줄거리와 느낀 점이라는 형식을 최대한 살렸다는 점입니다. 비록 비논리적이고 부실했지만 그 형식이라도 지키려 노력했다는 점이 기특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열 줄 이상이라는 글의 양을 맞춰줬다는 점입니다.
출처 : 픽사베이
제가 목표하는 우리 아이 글쓰기는 딱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쓰고 싶은 글을 쓰게 하자, 둘째는 글쓰기의 양을 늘리자입니다. 읽는 책의 글밥을 늘리듯이 글쓰기도 반드시 글의 양을 늘려야 하거든요. 지금의 저희 아들처럼 줄거리만 잔뜩 써놓게 되더라도 글은 길게 쓸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긴 글은 반드시 생각을 동반하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줄거리 나열도 결국은 사건이 일어난 순서를 기억해야 합니다. 하다못해 책의 일부분을 베껴 쓰더라도 본인이 인상 깊었던 그 문구를 기억해 내야 하고, 책의 처음 중간 끝 중 어디에 있었는지 위치도 찾아내야 합니다. 글의 양을 늘리느라 과거의 어떤 생각이나 경험을 억지로 끌어오기도 합니다. 어른들이 보기엔 전혀 연관성이 없고 글의 완성도를 떨어뜨리는 행위이지만 그것도 아이가 머리를 써서 가져온 결과물입니다. 어떤 식으로든 생각을 했다는 것은 글쓰기의 교육적 효과를 봤다는 뜻입니다. 앞으로 AI가 가득한 사회를 살게 될 우리 아이들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배움이지요.
자녀에게 글쓰기 지도를 할 때 아이가 완벽하지 못한 글을, 완성되지 못한 글을 쓸 때가 있을 겁니다. 아이가 부족해 보이고, 덜 배운 것 같아 조바심과 걱정이 올라올 겁니다. 하지만 오늘만 보지 마세요. 아이는 매일 배우고 매일 달라집니다. 그 무수한 날들이 쌓여 어른이 됩니다. 오늘은 부족해도 내일은 더 나아지고, 매일 엄마와 실랑이하다가도 어느 하루는 마음에 쏙 들게 하는 날도 있더군요. 그래서 엄마 마음속에 올라오는 그 조바심과 걱정을 자꾸 눌러줘야 해요.
자녀에게 글쓰기 가르치기가 힘든 이유요? 그건 너무 사랑해서입니다. 너무 사랑해서 아이가 부족할까 봐 걱정을 해서 힘든 거예요. 매일 성장하는 아이를 ‘그러려니~ 오늘은 이런 날이려니~’하며 지나칠 수 있어야 할 것 같아요. 그러다 보면 한 뼘 더 자란 우리 아이를 보게 될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