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울타리는 필요하다
(본 리뷰는 2019년 10월 11일에 작성되었고 개정하여 업로드 되었습니다)
조커를 처음 본 그날이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내게 많은 생각을 안겨준 이 영화는 여러가지 선명한 생각들을 담고있으며 매우 직설적으로 그 생각들을 털어놓는다. 그 생각들은 단순히 편견에서 나온 것일 수 있겠으나 수십년 간 DC코믹스 캐릭터들이 그려낸 모습은 나름 일관되어 왔기 때문에 이번의 조커 역시 그 맥락 속에서, 혼돈을 꿈꾸는 무질서의 아이콘으로서 이해되어지는 것이 타당해보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혼란스러웠다. 분명 영화가 담고있는 여러가지가 무엇인지는 이해는 갔지만 이는 기존의 맥락과 매우 동떨어진 선상에 있었으며 무엇보다 내가 조커를 통해 던지고 싶은 말은 무엇인지 선명하게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내가 생각하는 영화의 감상은 그 영화의 진의를 바탕으로 자신이 하고싶은 말을 찾아서 해낼 때 비로소 완성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편의상 상식의 세계를 우리라고 표현하겠다-가 일상에서 늘 깨닫듯이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정말로 토드 필립스의 조커는 다른 작품들에서처럼 무질서를 예찬하는 인물인가?” 나는 답을 주저했다. 따라서 이토록 복잡하지도 않고 직설적인, 굳이 여러 번 볼 필요가 없을 영화를 나는 반복해서 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세번째 관람 이후 드디어 조커가 그리고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인지 깨달았다. 위 질문에의 내 대답은 우선 “아니오”다. 토드 필립스의 조커는 질서를 꿈 꾼다.
자신만의 질서. 그리고 나는 내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나는 어느 사회에 속해있는가?”
와킨 피닉스가 연기한 아서 플렉은 질병을 앓고있다. 그것은 뚜렛 증후군의 한 종류로 묘사된다. 정확히 병명이 무엇인지 밝히진 않았지만, 후반부에서 나오는 유년시절 학대와 그 과정에서 생긴 뇌에 충격이 그를 강제로 웃게 함은 분명하다. 또 그 질병이 야기한 웃음은 명백하게 네러티브의 단초이다. 그러니 우리는 웃음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작품에서 아서의 웃음은 세가지로 나뉜다. 첫째가 앞서 말한 질병에 의한 강제적인 웃음이다. 특히 각 씬들을 통해 추측해보건데 아서의 질병적 웃음은 상식적인 웃음을 유발하는 정반대의 감정들, 그중에서도 공포를 느낄 때 강하게 분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 공포 중에서도 특히 자신이 소속되길 간절히 바랬던 모임, 사회, 그리고 사람들에게서 멀어질 때, 거절당하거나 무시당할 때. 흑인꼬마에게 베푼 선의가 멸시로 돌아왔을 때. 사장이 자신의 양심을 믿어주지 않았을 때. 그리고 지하철 씬 처럼 자신의 의도와는 반대로 세상의 폭력에 노출되었을 때. 따라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생각해보면 아서 플렉은 폭력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흔한 사이코패스 영화의 클리셰처럼 어릴때부터 폭력과 빈곤에 노출되어 그것들에게 무감각해지는 설정을 따라가지 않고 오히려 현실의 상식에서 인물은 작동하며 유년기부터 경험한 억압과 핍박에 주눅 들어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그것을 알람처럼 그의 질병적 웃음이 알려준다. 아서 플렉은 결코 폭력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그 다음 등장하는 웃음은 안락의 미소이다. 그 미소는 자신이 어딘가에 속해있다는 안전함을 느낄때, 자신이 원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다는 확신을 가질 때 나온다. 즉 현실의 우리가 일상에서 사회적 활동을 통해 느낄 수 있는 행복이 가져다주는 웃음인 것이다. 다만 그것을 극의 프로타고니스트 아서는 기만과 망상속에서만 영위할 수 있다는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 살아간다.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했다고 믿었던 어머니와 함께했을 때. 토마스웨인을 찾아가 그의 입을 통해 직접 버림받기 직전까지. 자신의 질병적 웃음이 코미디클럽에 퍼져나가며 그를 웃음거리로 만들고 있는 순간에도 아서를 향해 미소짓던 B호실의 여인, 소피를 보았을 때.(순간 그의 질병적 웃음은 소피의 미소와 함께 마법처럼 사라지고 자신이 계획한 유머들을 대중앞에서 자신있게 떠벌린다)또, 티비를 보며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사랑하고 존경했던 토크쇼 진행자 머레이 프랭클린, 그가 상상 속에서 자신에게 해줬던 따뜻한 말들과 토크쇼 방청객들이 자신에게 보냈던 지극히 일상적인 미소와 박수들을 통해서. 아마 일상에 찌든 현대인들은 그 방청객의 반응을 허례허식이나 영혼 없는 사회적 제스추어라며 염세를 느낄지도 모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아서는 우리 사회의 어떤이들이 버린것들을 꿈꾸며 거기에 행복이 있다고 믿고 살아간다.
그는 이처럼 일상적인 행복조차 타인에게 속아가며, 자신을 속이면서 얻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까지 내몰려 있는게 아서 플렉이라는 인물이다. 마지막으로 세번째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자신이 있어야할 자리가 어딘지, 그가 속해있는 사회가 어떤 울타리인지 확실히 정했을 때 나오는 웃음이다. 비록 정상적인 사회인들과는 그 결이 분명히 다르지만 이 역시 일종의 한 개인의 사회화를 증명하는 것들 중 하나이다. 다만 아서의 경우 현실을 받아들이는 방법 중 하나로 분노를 택했으며 그가 정한 자신의 울타리는 현실의 우리들이 존재해선 안된다고 합의한 공간이었다. 폭력과 광기가 유머가 되는 사회.-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지내는 온라인 공간 어느 한편에선 서로를 빠와 까로 나누고 글로써 서로를 패고 이와같은 반복적인 과정을 사회화와 공론화로 치부한다.그들만의 울타리가 만들어지는 것이다.-절대 생산적이지 못한 사회이다. 서로가 서로를 좀먹는 곳이며 그런 사회의 정당화나 미화에 대한 논의는 일고의 가치도 없지만 어쨌든 그 곳 역시 누군가에겐 사회로서 작동한다. 누군가에겐 소속감을 주며 안정감을 선사한다. 연대감을 느끼게 해준다. 끔찍하지만 어쨌든 그 공간도 울타리이고 사회이다.
그렇다면 작품속에서 아서는 어떤 과정을 통해 그 울타리 속에 정착하게 되었을까? 영화 조커는 어떤식으로 아서의 여정을 묘사하고 있을까? 작품에서 아서가 자신의 질병적 웃음을 극복한 첫번째 상황은 사장에게 자신의 양심이 모욕당한 직후이다. 평소였다면 그는 그 공간에서 슬피 웃으며 미친놈으로 불렸겠지만 그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참아내고 한 골목의 쓰레기장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처음으로 자신의 분노를 마음껏 표출한다. 쓰레기봉투를 짓밟으며. 이후 전개되는 상황들로 추측컨데 당시 아서는 분명 의식적으로 그 상황을 이해하진 못했던 것 같지만 몸은 그 순간 자연스럽게 학습했을 것이다. 분노가 그 고통스러운 질병을 낫게 해줄 수 있다는 것을. 고통으로부터 해방된 그 순간부터 쾌감은 자라고 자라 최종장에 이르러 상담사를 죽이기 전의 미친듯한 웃음이 된 것이다. 그 웃음은 질병적 웃음과 유사해 보이나, 나는 그게 결코 질병으로부터 오는 웃음이 아니었으리라 확신한다.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며 학습한 조커는 더 이상 슬피 웃을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가지 의문은 남는다. 질병적 웃음의 고통을 가라앉힌 것은 분노 외에도 앞서말한 안락의 미소 또한 해당된다. 설령 그게 망상일지라도 효과가 같다면 몸의 무의식적 학습의 맥락에서, 같거나 심지어 분노보다 오래 작용해온 망상이기에 더 큰 관성으로 아서를 이끄는게 합리적이지 않을까? 나는 이 부분에 토드 필립스와 스캇 실버가 진실을 대하는 태도, 그들이 그린 조커의 혁명성이 있다고 믿는다. 아서가 스스로를 위로하던 망상은 거짓이며 결국 모든 사람은 진실을 향해 나아갈 수 밖에 없다. 거짓엔 늘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택한 분노는 슬프지만 우리 주위에서 벌어지는 현실이고 어두운 진실이다. 현실이 망상보다 더 진실에 가깝기에 그는 거짓에 염증을 느끼고 진실의 공간으로 달려간 것이다. 우리 모두가 그러듯, 아서 역시 자신의 시야에서 보이는 진실을 향해 본능적으로 뛰었을 뿐이다. 따라서 나는 묻고싶다. "역겨운 진실과 그 역겨운 진실을 추구한 사람중 우리는 무엇을 더 원망해야 하는가?"
더불어서 아서의 선택은 조커를 판타지에서 현실의 영역으로 이끈 것이나 다름 없다. 만약 고담시티가 분노로 가득 찬 공간이 아니라면 그가 분노하든 아니든 영원히 판타지 속에 머물렀을 것이고 상당수가 느끼는 그 우려들 역시 무효 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아서는 애당초 분노가 아닌 망상의 편에서 계속 서있었을 수도 있다. 결국 둘다 현실이 아니고 진실과 거리가 먼 것들이라면, 익숙한 공간에 남는 것이 더 납득이 가는 전개이니 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않으며 분노는 도처에 실재했다.-우리 주변 역시 마찬가지 일 것이다- 조커라는 판타지 속 캐릭터를 현실로 불러오는 이 지점에서 나는 작품의 놀라운 전환을 느꼈고 그것은 이 작품에 시시비비를 가리려는 평단의 자세를 통해 어느정도 방증 되었다고 생각한다. 혁명은 늘 저항을 수반한다.
영화 조커를 지탱하는 상징 하나만 말하라고 하면 단연 춤 일 것이다. 그리고 그 춤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위해선 우리가 왜 춤을 추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누군가는 다이어트를 위해, 땀을 빼고싶어서, 예술적인 쾌감을 위해 홀로 춤을 추기도 하지만 사교댄스, 볼 룸(Ball room)등으로부터 거슬러가면 결국 춤이란 사회화의 결정적인 수단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학교가 있는곳에 사회가 있듯, 무도회장에 있는곳에 사회는 반드시 존재한다. 춤이 있는 문명은 사회화를 이룩한 문명사회라고 단언할 수도 있다. 아마존 부족들의 다큐멘터리를 볼때마다 늘 나오는 장면은 그들이 모닥불을 피고 둘러서서 춤을 추는 장면 아니던가?
아서 플렉은 영화에서 여러가지 춤을 춘다. 그것들을 크게 두가지의 춤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핵심부터 말하면 이 두개는 모두 그의 사회화의 기능적인 측면과 직결되며 다만 그 사회는 서로다른 정 반대의 공간이다. 그가 추던 춤을 살펴보면 먼저 거리에서 광고판을 흔들며 추던 것, 혼자 집에서 TV를 보며 추던 것, 병원에서 아이들을 위해 추던 것, 그리고 소피와의 데이트 이후 어머니와 함께 추던 것을 하나로 묶을 수 있다. 이 춤사위들은 상당히 우리 눈에 익숙한 사교 댄스, 팝 댄스처럼 정상적인 사회에서 무의식적으로 사회화를 통해 교육받은 댄스들이다. 자연스럽게도 우리는 아서의 이 몸짓이 우리의 세계,상식의 공간,로 편입되고자 하는 욕망의 발현이라는 것을 그냥 알 수 있다. 마치 구애의 댄스처럼 말이다. 사회를 거부하는 이가 팝 댄스를 추는 것을 본 적 있는가?
그러나 아서의 몸짓은 여기서 머물지 않는다. 월스트리트 돈놀이꾼들을 살해한 뒤 화장실에서 추던 의미심장한 춤 사위, 마치 동양 고전무용이나 혹은 순수 예술에 가까운 추상적인 현대무용-춤 전문가가 아니기에 특정할 순 없지만 이런 느낌들이었다-을 연상케 하는 몸짓은 이전의 구애의 몸짓과는 다른 독립적인 춤이었다. 머레이쇼의 커튼이 걷히기 전 씬을 자세히보면 조커가 이와 비슷한 춤을 잠깐 추는데 핵심은 춤보다 그것을 지켜보던 TV쇼 스탭에 더 방점이 찍혀있다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조커를 바라보며 짓는 그의 표정은 ‘대체 저 춤은 어느나라 춤이야?’ 하는 듯한 표정이었기 때문이다. 즉 이 춤사위는 조커가 구애하던 우리의 사회와는 동떨어진, 이질적이면서 그 사회 인식의 배타성을 유도하는 몸짓이었다. 춤의 사회화란 어쩌면 이런것일 수 있다. 같은 부족으로 나고 자라 내 편인지를 확인하는 일종의 사회적 검증작업 같은 그런 것 말이다. 그 스탭의 표정은 이것을 직설적으로 말해준다. 그 춤을 당김으로써 아서는 그 사회에서 완전히 추방된 것이다. 그렇지만 그 사회에서 추방되었을뿐 조커와 같은 춤사위를 당기거나 그 몸짓을 동경하는 사람들과 추락한 도시, 고담의 이들이 존재하는 한 조커는 또 다른 사회에 소속되어 있을 뿐 홀로 고립된 것이 아니다. 반대로 말해서 그의 독립적인 춤사위는 폭도들, 아캄 수용소와 그가 처음 속했던 정신병원의 세계에의 구애와 같다.
그렇다면 그 유명한 계단씬의 댄스는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아야 할까? 분명 그의 춤은 우리 눈에 너무 익숙한 팝댄스였고 음악역시 Gary Glitter의 로큰롤, The hey song이다. 조커는 맥락에서 벗어나 다시 상식의 세계로 구애를 한 것일까? 단언컨데 아니다. 그 상황의 광대 풀 메이크업을 한 조커는 실재하는 어두운 진실의 세계로 이미 편입되어있었고, 광대(Fool)란 누군가를 속이는 직업이다. 만약 당신이 계단을 내려오면서 지극히 상식적이고 또 멋진 춤사위를 그리던 아서 플렉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면 나는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당신은 속았다"고. 그는 우리와 같은 세계에 있지 않으며 우리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그러나 실재하는 어두운 진실에 이미 도달했으며 그곳에서 우리를 조롱하기위해 춤을 춘 것이다. 기만의 춤이었다.
이 영화는 내가 극장에서 세 번을 관람한 몇 안되는 작품 중 하나이며 서두에서 말했듯 분명 직설적이나 동시에 모호한 느낌 역시 상당하다. 나는 그 이유를 히어로 장르의 태생적 한계에서 발견했다. 다크나이트(2008)에서 선언한 바 있듯, 빌런은 히어로와 함께할 때 완성된다. 단지 이야기의 재미나 흥미같은 기능적인 측면이 아닌 시야와 관점의 균형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영화 역사상 가장 끔찍한 빌런중 하나를 꼽으라면 양들의 침묵(1991)의 닥터 한니발 렉터를 아주 쉽게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식인을 하며 자신의 살인을 가장 아름답게 정당화 한다. 때문에 역설적이게도 그의 아름다운 정당화는 무엇보다 역겹다. 하지만 이 영화가 지금의 조커처럼 우려를 사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가 그린 연쇄살인 역시 당시의 현실에 실재했으나(오히려 지금보다 더 큰 이슈였다.) 시대의 흐름과 맥락은 물론 지금과는 많이 달랐지만, 사람들이 한니발이라는 캐릭터에 매력을 느끼고 사랑하며 그 인물이 모두의 헬로윈 아이콘으로 폭발한 이유는 단순히 자유분방했던 그 시기의 어드밴티지뿐만은 아니었으리라 믿는다. 그리고 나는 그 원인을 클라리스 스털링에게서 찾고자 한다.
조디포스터가 연기했던 그녀는 관객에게 이것이 판타지임을 인식하게 하는 동시에 그 작품이 결코 ‘우리의 사회,질서’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는 점을 주지시키고 안심시키는 역할을 맡았다고 생각한다. 만약 클라리스가 없는 세계에서 한니발이 연쇄살인과 식인을 일삼았다고 가정해보자. 물론 앤소니 홉킨스는 지금의 와킨 피닉스만큼 혹은 그보다 더 위대한 배우이기에 영화를 잘 이끌었겠지만, 그 캐릭터가 지금의 한니발처럼 누구에게나 사랑받을 수 있었을까? 어쩌면 누군가는 가상의 캐릭터와 세계에 불필요한 우려를 보내는것에 질색할 수도 있을것이고 그것이 다른 악의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잰눈으로 바라볼수도 있다. 그 생각에 나름 동의한다. 하지만 현재 조커를 둘러싼 우려 역시 엄연히 현실속에 실재하는 현상이기에 영화제작자는 그것 또한 고려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글의 논지는 영화가 균형을 잃었고 잘못 제작되었다는 ‘그 우려들’쪽으로 기울어야 할까? 나는 그렇게 내 글을 마무리하지 않겠다. 앞서 말했듯 이것은 제작의 문제가 아닌 히어로 장르가 지닌 태생적인 한계라고 생각한다. 감독과 작가는 아서 플렉이라는 인물의 전기적 영화를 찍고싶었으나 그는 엄연히 히어로 장르의 빌런이고, 코믹스가 구축한 히어로 세계 속에서 작동한다. 작동 방식만 제작자의 의도에 맞춰 바뀌는 것이다. 그리고 빌런은 히스레저의 말대로 히어로가 함께할 때 비로소 균형잡히며 완성된다. 하지만 이 영화에 히어로가 들어가면 그건 또다른 DCEU영화일 뿐 이다. 조커(2019)는 히어로 영화를 지양한다. 진퇴양난의 상황. 나는 이것을 태생적 한계라고 부르고 싶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처음부터 균형을 과감히 배제한 채로 제작되었을 것이며 기울어져가는 속도감을 통해 관객에게 유희를 선사하고자 했던 것이 명백하다. 롤러코스터가 왼쪽으로 기울든 오른쪽으로 기울든, 어떤 다른 의미가 있겠는가.
물론 영화 조커를 향한 우려들을 부정하고 싶진 않다. 나는 무엇이 그들을 겁에 질리게 했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무질서와 혼돈을 부추긴다거나, 사회적 붕괴를 선동한다거나, 조커가 인셀이기 때문에 범죄를 저질렀고 따라서 인셀을 미리 주의시켜야 된다거나 하는 주장은 인정해 줄 수 있는 우려의 선상에서 한참 벗어난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것은 영화에 대한 오독이면서 동시에 자기 기만에 빠진 망상이며 말했듯 망상은 거짓이고, 거짓은 한계를 지닌다. 나는 이 망상에 사로잡힌 그들이 아서처럼 진실을 향해 뛰어오길 바랄 뿐이다. 다만 한가지, 아서랑은 정 반대의 방향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