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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서우 Jan 08. 2023

구리 동구릉

아홉 가지의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이뤄진 조선 왕릉

조선 태조가 묻힌 경기도 구리 건원릉. 억새로 가득한 태조의 능을 포함하여 9개소의 능, 15개소의 봉분이 모여 동구릉이라고 부르는데, 현존하는 조선왕릉 중에서는 가장 큰 규모다. 태조가 안장된 1408년부터 현종의 계비인 효정왕후가 세상을 떠난 1904년까지 왕릉이 조성되었으니, 무려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와 함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대 규모답게 시대와 왕릉별로 다양한 봉분 양식을 볼 수 있다. 봉분 앞 석상들도 크기가 각기 다른데,  시대에 따라 커졌다 작아진다. 심지어는 봉분을 가기 전 볼 수 있는 제사 공간인 정자각도 각 능마다 형태가 다른데, 일부는 상당히 특색이 있어서 보물로 지정되어 있기도 하다. 보통 왕릉 관광지하면 경주에 있는 거대한 대릉원을 떠올리는데, 조선왕릉도 깊게 보면 흥미로운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각양각색의 봉분과 석상 그리고 여러 가지 사연이 담긴 구리 동구릉으로 가보자.

     

팔작지붕 정자각의 숭릉과 세 봉분이 연달아 있는 경릉

     

동구릉도 수도권에서 대중교통으로 가기 쉽다. 가장 가까운 기차역은 경의중앙선 구리역인데, 역전에서 마을버스 2번을 타거나 건원대로로 나가 동구릉으로 가는 버스 아무거나 타면 된다. 내년에는 수도권 전철 8호선 동구릉역이 가까이에 개통되어서 앞으로 더 가기 편해진다. 차량을 이용하는 경우 수도권제1순환고속도로 구리 나들목에서 내린 다음 43번 국도로 빠지면 바로 좌편에 있다.


동구릉 매표소를 지나면 왠 굴다리 조형물이 하나 보인다. 원래 동구릉 앞에는 왕릉과 속세를 구분하는 금천이 흐르고, 그 앞에는 왕릉으로 인도하는 돌다리인 외금천교와 연못이 있었다. 하지만 43번 국도를 철거하면서 옛 돌다리는 해체되는 운명을 맞아 이곳에 전시된 것이다. 다리의 형태는 무지개 반원으로 이뤄진 홍예교(虹蜺橋)인데, 불국사의 청운교, 백운교, 칠보교,연화교 경복궁의 영제교와 창덕궁의 금천교에서도 볼 수 있다.


제사 기구(器具)를 보관하는 재실을 지나면, 두 갈림길이 보이는데, 나는 안내도 기준으로 북서쪽에 있는 왕릉(지도상으로는 남서쪽)부터 둘러보기로 했다. 목표한 곳까지 가니 제사를 지내는 공간인 정자각(丁字閣)과 그 뒤로 두 봉분이 보이는데, 조선 제18대 왕 현종과 그의 비인 명성왕후의 능인 숭릉(崇陵)이다.


옛 외금천교 석조물 부재. 무지개 아치형으로 이뤄져 있다.


동구릉 안내도   ⓒ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조선왕릉


숭릉의 특이한 점은 두 가지를 들 수 있는데 첫째로 정자각의 지붕을 들 수 있다. 구조는 팔작지붕 형태인데, 원래는 세종의 영릉, 명종의 강릉과 인조의 장릉의 정자각에도 있던 형태였다. 하지만 이 셋은 후에 사람 인(人) 자의 맞배지붕으로 바뀌어서, 오늘날 숭릉만이 유일하게 남았다. 건물 자체도 변형되지 않고 현종이 승하했던 1674년 모습 그대로 오늘날까지 이어져서 2011년 보물 제1742호로 지정되었다.


두 번째로는 둥근 섬이 있는 네모난 연못인데, 동구릉 내 물길을 관리하기 위해 숭릉 정자각과 같이 조성되었는데, 오늘날의 것은 2017년 복원한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연꽃 종자를 능관에게 주어 심었다는 기록이 있어서, 당시 여름에는 연꽃으로 무성했다고 한다. 연못의 네모난 형태는 땅을, 둥근 섬은 하늘을 상징한다.


두 봉분이 나란히 있는 쌍릉 양식의 숭릉. 정자각 지붕은 팔작지붕양식인데, 조선왕릉에서 유일해서 보물 제1742호로 지정되었다
동구릉 물길 관리를 위해 조성된 숭릉 연지


숭릉과 조선 제20대 왕 경종의 첫 왕비였던 단의왕후 무덤인 혜릉을 지나면, 조선 제24대 왕 헌종과 두 왕후들이 묻힌 경릉(慶陵)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세 봉분이 연달아 붙었는데, 조선왕릉에서 유일한 삼연릉(三連陵)이다.


먼저 묻힌 이는 첫 번째 왕비이자 능 중앙에 묻힌 효현왕후. 헌종과는 1837년 겨우 9세에 가례를 치렀는데, 6년 후 15세의 안타까운 나이로 사망한다. 남편인 헌종도 1849년 세도정치에 시달리다 너무나 이른 23세의 나이로 승하하여 정자각을 기준으로 효현왕후 왼편에 묻힌다. 둘 다 꽃다운 나이에 너무 일찍 하늘로 갔다는 것 때문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마지막 가장 오른쪽에 묻힌 이는 1844년 새로이 왕비가 된 효정왕후인데, 헌종과 효현왕후와 달리 동학농민운동, 을미사변, 아관파천, 대한제국 수립이라는 격동의 시대를 보내고, 1904년 가장 마지막으로 동구릉에 안장되었다.


삼연릉으로 이뤄진 경릉. 조선왕릉에서 유일하다   ⓒ 한국문화재재단 문화유산채널


경릉 바로 옆에는 조선에서 가장 장수한 제21대 왕 영조와 그의 두 번째 왕비인 정순왕후가 묻혀 있는 원릉(元陵)이다. 원릉도 숭릉과 비슷한 쌍릉형태인데, 이곳은 원래 영조의 증조부인 제17대 왕 효종이 묻힌 곳이었다. 하지만 왕릉 석물에 금이 가고 파손이 되자 효종의 능을 오늘날 여주 세종대왕릉 바로 옆으로 옮겼다. 즉, 영조는 조선왕들 중 유일하게 파묘된 곳에 묻힌 셈이다.


민간도 피하는 파묘된 곳에 안장되었기에, 누군가는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인 할아버지에게 섭섭함을 표시한 것이라고 말한다. 게다가 영조도 첫 번째 왕비인 정성왕후(오늘날 고양 서오릉에 홀로 있다) 옆에 묻히고 싶었다. 하지만 정조가 즉위하던 시절 정순왕후가 살아있던 데다, 할아버지의 능지를 정할 때 신하들과 두루 의논했다는 내용이 실록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서 단순히 정조의 복수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제21대 왕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가 함께 묻힌 원릉

     

태조의 건원릉과 선조의 목릉

  

원릉 바로 옆에는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가 묻힌 휘릉이 있다. 젊은 시절에는 인조의 후궁인 소용 조 씨가 인조의 사랑을 독차지해서 자녀를 낳지 못하고, 대왕대비 시절에는 효종과 그의 부인인 인선왕후가 승하할 때 본인의 상복 기간 때문에 서인과 남인이 논쟁하는 것을 지켜보았고(예송논쟁), 말년에는 손자며느리이자 숭릉에 묻힌 명성왕후에게 기싸움에 시달렸다. 이렇게 파란만장한 삶을 살고도 오늘날까지 홀로 잠들어 있어서, 마지막까지 너무나 기구하다는 생각이 든다.


멀리서 바라본 휘릉. 장렬왕후는 영면하고 나서도 홀로였다.


휘릉 옆에는 또 홀로 묻힌 이가 하나 있는데, 조선 왕조를 개창한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이다. 능 건설에 전국에서 무려 6,000명의 인력이 동원되었다고. 또한 동구릉 최초의 능답게 상례 건물인 정자각이 다른 곳과 비교하면 색이 더욱 바라 있다.


보물 제1741호 구리 건원릉 정자각. 모든 조선왕릉 정자각의 원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봉분에는 잔디가 아닌 뭔가 투박한 것이 덮여 있다. 이는 인조 7년 3월 19일 동경연 홍서봉이 아래와 같이 임금께 아뢴 내용에서 찾을 수 있다.


太祖遺敎以北道靑薍爲莎草, 故至今莎草甚茂, 異於他陵。

원래 태조가 남긴 유언에 따라 북도의 청완으로 사초(무덤에 떼를 입하고 다듬는 일)로 썼기 때문에, 지금까지 다른 능과는 달리 사초가 무성하였습니다.

     

북도의 청완은 함경도의 억새를 말한다. 어찌 보면 자신의 고향인 화령(오늘날 함경남도 영흥군 일대)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한양에 남은 자신을 위해 남긴 유언이라고 해야 할까. 그래서 오늘날에도 매년 한식(寒食) 날에만 억새를 정비하는 ‘청완 예초의’를 진행한다. 예초와 제사가 끝나면 건원릉에 능침에 올라가 제향음식을 나눠 먹는 음복례도 체험할 수 있는데, 코로나 방역이 풀리고 한식날 구리에 갈 일이 있다면 참고하자.


건원릉의 또 다른 특징은 능 아래 비석의 규모가 동구릉의 다른 능역보다 더 크다는 거다. 심지어 비석 글씨도 상당히 깨알같이 적혀 있는데, 태조의 건국과정과 일대기를 적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능의 경우 비석에 쓰여 있는 글씨가 몇 안 되는데, 문종 이후 국왕의 치적이 실록에 기록된다는 이유로 신도비를 제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멀리서 바라본 건원릉 봉분. 태조의 유언으로 인해 봉분에 억새가 가득하다.


보물 제1803호 구리 태조 건원릉 신도비. 태조 이성계의 행적이 빼곡히 적혀 있다.


건원릉 바로 오른편에 샛길이 하나 나 있는데, 이를 지나치지 말자. 샛길을 따라가면 정자각을 중심으로 각각 다른 언덕에 세 능이 서로 떨어져 조성되어 있다. 바로 왼편에 조선 제14대 임금 선조와 가운데에 정비 의인왕후, 오른편에 계비이자 광해군에게 서궁 유폐로 핍박을 당했던 인목왕후가 묻힌 목릉(穆陵)이다.


능을 보니 세 봉분이 함께 붙어 있는 경릉과 비교된다. 임진왜란 직후에 조영된 능이라서 그런지 다른 봉분보다 석물의 조형미가 떨어진다는 평을 받기도 한다. 다만 이곳의 정자각도 상당히 특이한데,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 공포(栱包)가 있는 다포양식이다. 이는 목릉만이 유일해서 2011년에 보물 제1743호로 지정되었다.


목릉. 정자각을 기준으로 왼편에는 조선 제14대 임금 선조, 오른편에는 정비 의인왕후, 남동쪽에는 계비 인목왕후가 묻혀 있다.
목릉 정자각 기준 남동쪽에 안장된 인목왕후. 목릉의 다른 봉분보다 약간 음지에 있어서 그런지 눈이 덜 녹아 있었다. 서궁에서 고생했을 때 모습과 겹치는 느낌이다.


목릉과 건원릉 아래에는 제5대 왕 문종의 왕비 현덕왕후가 묻혀 있는 현릉이 있다. 오른편에 잠든 현덕왕후는 원래 안산 소릉에 모셔졌지만, 단종을 낳았다는 이유로(그것도 낳자마자 하늘로 가고 말았다.) 수양대군에게 죽어서도 능이 파헤쳐지는 수난을 겪었다. 다행히도 왕후는 중종 때 복위되어서 시신을 수습하여 남편 옆에 있는 언덕에 천장했다.


그 아래로는 헌종의 아버지 추존 문조와 신정왕후가 함께 한 봉분에 안장된 수릉이 있다. 보통 왕은 능에서 정자각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오른편에, 왕비는 왼편에 묻히지만, 사망 당시 문조는 태자였고, 신정왕후는 대왕대비였기에 서로 위치가 뒤바뀌었다. 참고로 신정왕후는 어린 고종을 수렴청정하며 흥선대원군의 개혁정치를 지원하는 역할을 했다.


조선 제5대 왕 문종과 왕비 현덕왕후가 안장된 현릉


추존 문조 효명세자와 비 신정왕후가 묻힌 수릉. 세자와 대왕대비가 함께 묻힌 합장릉 형태다.


조선의 최대 왕릉지인 구리 동구릉. 보통 관광지로 유명한 왕릉을 꼽는다면, 규모가 상당히 크고 금관과 장니 천마도가 나온 대릉원을 떠올린다. 실제로 대릉원에 가면 계절에 상관없이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하지만 조선왕릉은 능의 규모가 작아서 그런지 대릉원과 비교하면 상당히 조용한 분위기다.


하지만 대릉원과는 달리 능에 묻혀 있는 주인공들이 실록에 명확히 기록되어 있어서 이들의 인생을 바라보며 감상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그리고 왕릉 최대 규모답게 시대별로 다양한 양식의 능원, 정자각과 석상들로 이뤄져 있다. 이러한 독특함 때문에 유네스코의 인정을 받았다고 해도 마땅치 않을까?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 동시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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