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수도 서울의 역사가 얼마나 되는가를 물어보면, 600년이 넘었다고 생각한다. 이는 이성계가 1394년 10월 28일 개경을 떠나 한양에 도착해 천도한 것을 기준으로 한다. 1994년에는 서울 정도 600년을 기념해 당시 서울 시민의 생활물품 600개를 뽑아 타임캡슐에 넣는 행사도 진행했었다.
하지만 조선 건국 이전에도 서울이 수도였음을 추정하는 곳이 하나 있는데, 송파구에 있는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다. 최근 학계는 이 두 곳을 웅진(오늘날 공주시)으로 천도하기 전 수도였던 위례성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이곳에서 발굴된 백제 유물의 양이 막대한 규모이고, 토성을 구축할 때 오랫동안 수많은 인력을 동원했기 때문이다.
그럼 백제 위례성으로 추정되는 두 토성의 오늘날 모습은 어떠할까? 서울 남동쪽에 남아 있는 백제인의 숨결을 찾아보자.
사적 제11호 풍납토성의 수난사
풍납토성은 서울 지하철 5, 8호선 천호역 인근에 있다. 역 10번 출구로 나가서 쭉 가면 풍차 조형물 하나와 그 뒤로 야트막한 언덕이 ㄱ자형태로 있는데, 복원된 풍납토성의 북벽과 동벽이 만나는 지점이다. 차량으로 오면 각지에서 고속도로를 탄 후, 올림픽대로 천호대교 나들목에서 천호사거리 방면으로 빠져나오면 오른편에 언덕배기 같은 것이 보인다.
풍납토성의 풍차조형물. 북벽과 동벽이 만나는 지점이다. 풍납(風納)을 우리말로 하면 '바람드리'다
풍차 조형물 왼편으로 가니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리는데, 각기 다른 가게들이 들어선 시장이다. 시장 이름은 풍납전통시장. 보따리 상인들이 낮에 장사를 하다가 저녁이면 파장을 했다고 해서 ‘풍납도깨비시장’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시장 옆에는 언덕배기가 하나 보이는데, 벽 아래에 이런 글귀가 쓰여 있다.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11호 서울 풍납동 토성은 백제한성기 중요한 유적입니다. 유적의 보호를 위하여 문화재보호법에 의거 다음의 행위를 제한합니다.’
기원전 18년 온조왕부터 시작해 475년 문주왕이 웅진으로 천도하는 것으로 끝맺은 백제한성기, 즉 위례성이 수도였던 시기의 토성이라. 내가 서 있는 이곳은 1970년에 복원된 풍납토성 북벽이다. 벽을 따라 걷고 나니 성벽 안쪽으로 주택과 아파트들이 가득하다. 백제 토성 내부라면 문화재 보호지구로 지정될 법한데, 왜 이렇게 건물이 들어선 것일까?
토성은 1925년 서울을 휩쓸었던 을축년 대홍수 때 다시금 세상에 드러났다. 당시 오늘날 올림픽대로가 다니는 토성 서벽이 허물어지면서 삼국시대 초기 청동자루솥, 허리띠장식 등이 출토되어 조선고적 27호로 지정되었다.
풍납전통시장 입구
광복 이후 1963년 사적 제11호로 재지정되어 오늘날에 이르는데, 이듬해 서울대 김원용 교수팀에 의해 발굴조사가 이뤄졌지만 지속되지 못한다. 당시 이병도를 비롯한 사학계에서 백제 위례성을 오늘날 하남시로 주목했기 때문. 그러는 사이 강남개발이 진행되면서 토성 주변부는 점점 훼손되었다. 이후 1997년 선문대 이형구 교수가 현대리버빌 아파트 공사현장에 들어가 백제유물을 다량으로 발굴하면서 다시금 조사와 보존논의가 이뤄지기 시작해 지금에 이른다.
올림픽대로를 나란히 하여 남쪽으로 걸으면 동아 한가람 아파트가 보이는데, 왼쪽 대각선길로 들어가다 보면 건축물을 철거하여 백제문화층을 발견했다는 조그마한 공터가 있다. 국가가 보상으로 매입하고 발굴한 주택 철거지다. 마을 곳곳에는 풍납토성 유적지 보상비 예산을 확보했다는 정치인의 현수막이 보이지만, 아파트까지 즐비한 이곳에 완전보상이 이뤄지기까지는 까마득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풍납토성 북벽일대. 왼편에는 벽돌집들로 가득하다.
풍납토성 내 발굴은 보상절차가 마무리 된 주거지 또는 철거지를 우선으로 이뤄진다. 사진에서 중앙 공터가 예시인데, 완전보상이 이뤄지기까지는 아직도 까마득하다.
발굴조사가 이뤄진 곳들
조그마한 공터를 지나니 작은 공원이 하나 보인다. 간판을 보니 ‘풍납토성 경당지구’라고 적혀 있다. 공원 입구 오른편을 보면 수돗가가 보이는데, 초기 백제시대에 우물이 있던 곳이다. 바닥에서는 150점이 넘는 입부분이 깨진 토기가 발견되었다.
수돗가 북서로는 동물뼈, 곡물의 흔적, 깨진 도기들과 아무런 유물이 발견되지 않은 ‘여(呂)’자형 구조 건물이, 서로는 도미와 복어뼈가 있는 중국제 시유도기와 백제 토기가 출토되었다고 한다. 학자들은 북서는 제수용 폐기물처리장, 서는 깨끗하게 관리된 신성한 건물, 서남은 음식물 저장고로 추정하고 있어서, 경당지구는 제사와 연관된 장소로 추정한다. 또한 발굴된 중국, 충청, 전라지역, 가야와 왜에서 생산된 도기와 토기들은 위례성 백제 시절의 대외 무역과 중앙-지방관계를 말해주는 열쇠가 되기도 한다.
풍납토성 경당지구. 수돗가가 있는 곳은 백제인들이 사용했던 우물터다(제206호). 우물터에서는 150여점의 토기가 발굴되었는데, 제사용으로 추정하고 있다.
경당지구 3지역 44호 유구. 呂자형 모습을 띄는 초대형 건물터다. 여기서는 유물이 출토되지 않았는데, 깨끗하게 관리된 제사용 건물로 추정하고 있다.
경당지구에서 남서쪽으로 가면 또 다른 공원이 하나 있는데, ‘풍납백제 문화공원’이다. 다른 공원과 달리 수많은 동그라미가 그려진 곳들이 있는데, 주거배치도를 나타낸 것이다. 구덩이를 깊이 판 후 바닥을 평면으로 만든 수혈주거(竪穴住居)다. 또한 공공의 목적을 위해 축조된 지상식 건물지 그리고 토기와 도기들도 발굴되었다.
문화공원에서 성벽이 보이는 곳으로 가면 교차로가 보이는데, 잔자갈이 깔려 있다. 백제 한성기 최초의 동서-남북도로가 확인된 것인데, 도로에는 배수기능을 한 수로시설도 있다. 주변에 저장창고가 밀집해 있어서 수레가 이용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이렇게 장방형으로 포장된 도로여서 왕성이었음을 추정케 한다.
풍납백제 문화공원의 주거지 배치도. 이곳에서 다수의 수혈주거지가 발굴되었다.
옛 백제 주거지를 복원한 모형
동서대로와 남북대로가 교차하는 지점
공원에서 풍성로를 따라 영파여고 쪽으로 가다 보면 또 다른 성벽이 보인다. 풍납토성에 동벽에 해당하는데, 남쪽으로 상당히 길게 뻗어 있어서 따라가 봤다. 약 30분을 걸어 끝까지 가보니 전망대가 나오는데, 토성을 어떻게 축조했는지를 볼 수 있다.
먼저 지표면을 정리한 후 약 50cm의 뻘을 깔아 기초를 다진 다음, 중심이 되는 토루(土壘)를 너비 7m, 높이 5m 정도의 사다리꼴로 모래와 점토를 켜켜이 다져 쌓았는데 이를 판축기법이라고 한다. 외벽은 흙을 덧대는 형태로 완성했고, 최대높이 13.3m, 너비 60m, 둘레 약 3.5km로 성을 쌓았는데, 연인원 138만 명이 투입되어야 토성이 완성된다. 이런 정성이 있었기에 이천년 가까운 세월을 버틴 것이 아닐까?
한마디로 오랜 세월 동안 진행된 국가급 대공사여서, 오늘날 백제 위례성 본성을 이곳에 비정하는 학자들이 많다. 하지만 현재까지 발굴된 지역은 겨우 8%에 불과한데, 보상절차가 더 진행되면 한성백제 왕궁터의 비밀도 드러날 수 있을까?
몽촌토성 동성벽. 1990~2000년대에 걸쳐 복원했다.
동벽과 남벽이 만나는 지점. 두 벽이 만나는 곳에 토성 전망대가 있다.
풍납토성 성벽단면. 토성을 쌓으려면 연인원 138만 명이 투입되어야 하는데, 오랜 기간 동안 여러 차수로 구축했음을 알 수 있다. 한성백제박물관 입구에서 볼 수 있으니 참고하자.
올림픽공원과 사적 제297호 몽촌토성
남벽을 나란히 한 강동대로를 따라 동쪽으로 가다 보면 큰 공원이 하나 보인다. 88 올림픽 개최 2년 전 조성된 올림픽 공원이다. 올림픽이라는 이름답게 테니스, 펜싱, 체조, 역도경기장, 수영장, 벨로드롬 경기장까지 있는 그야말로 스포츠의 성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공원 중앙에 야트막한 언덕이 보인다.
이 언덕의 이름은 위례성 백제시대에 구축된 몽촌토성. 1984년 공원을 착공할 때 토성이 발견되면서 내부 정밀조사가 이뤄졌는데, 여기서 유물들이 발굴되었다. 하지만 당시 올림픽 준비가 우선인지라 발굴조사를 뒤로 미루는 대신 토성 주변을 공원으로 보존했다. 그래서 개발로 몸살을 앓은 풍납토성과 달리 이곳은 드문드문 보이는 나무들과 초지로 이뤄져 있어서 위안이 된다.
몽촌토성으로 오르는 길
몽촌토성 일대. 풍납토성과 달리 고고학자들의 혜안으로 나무들과 초지로 이뤄져 있다. 발굴조사도 훨씬 수월한 환경이다.
몽촌토성의 둘레는 약 2.7km. 풍납토성보다는 작은 규모다. 그런데 왜 풍납토성 남동쪽 부근에 또 다른 토성을 지었을까? <삼국사기> 백제본기 개로왕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이때에 이르러 고구려의 대로(對盧) 제우(齊于), 재증걸루(再曾桀婁), 고이만년(古尒萬年) (재증과 고이 모두 두 글자로 된 성이다.) 등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북성(北城)을 공격하여 7일 만에 빼앗고 옮겨서 남성(南城)을 공격하니 성 안에서는 위태롭고 두려워하였다.
그다음 개로왕이 백제군에게 붙잡혀 죽어서 위례성 시대가 끝났음을 알리는 내용이 나온다. 위 기록에서 북성과 남성을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오늘날 학자들은 전자를 풍납토성, 후자를 몽촌토성으로 보고 있다. 백제 유물이 대다수인 풍납토성과 달리 몽촌토성에서는 5세기 고구려 유물들이 다량으로 출토된 게 흥미로운데, 고구려가 한성함락 후 군사거점으로 썼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목책으로 둘러친 몽촌토성. 토성에서는 5~6세기 고구려와 신라 토기가 발굴되었는데, 두 국가 모두 이곳을 군사거점으로 삼았음을 추측할 수 있다.
서울 송파의 거대한 두 토성인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아직까지 두 토성보다 규모가 큰 초기 백제 토성이 없는 관계로 위례성의 북성과 남성으로 인정받고 있다. 또한 규모로 봤을 때, 풍납토성은 왕성, 몽촌토성은 대피성으로 추측하고 있다.
두 토성의 발굴조사가 더 진척되어, 위례성이었음을 완벽히 증명하는 유물이 출토된다면, ‘서울 정도 600년’에서 ‘서울 역사 2000년’이라는 표어로 바뀔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게다가 위례성 시절은 삼국사기를 기준으로 두면 500년에 가까운 세월이다. 웅진, 사비시대보다 2.5배나 긴 데다가, 조선왕조 역사와도 비슷하다. 언젠가 백제 위례성 500년 수도가 끝난 지 900여 년 후, 강변 너머 서북쪽에 조선이 천도했다고 확실히 가르칠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의 위치관계. 오늘날 학자들은 풍납토성을 왕성, 몽촌토성을 비상시 농성하기 위한 대피성으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