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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명의 J Sep 16. 2022

우울의 일지 2

알콜 농도 20%에서 쓰는 글

우울은, 마치 종이에 베인 상처 같다. 의식한 어느 순간부터 무척 따갑고 아파온다. 자각한 순간부터, 어디서 왜 베였는지 인과를 따지는 순간부터 더더욱 빠져든다. 원인을 찾는다는 것은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나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결국 스스로가 자초한 나의 업보이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감사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충분한 가정에서 태어나, 부족한 교육 없이 자라고, 남 부럽지 않은 학벌을 가지고도 이렇게 우울에 빠진다는 것은 나에게 투자한 부모님에게 있어 크나큰 오점일 것이다. 더 어려운 형편과 가정사를 가지고 헤쳐온 사람에게는 기만일 수 있겠다. 살아온 나의 길을 되돌아봐도 남의 탓을 할 게 없었다. 오롯이 나의 선택과 그에 따른 후회뿐이다. 결국 모든 것은 매 순간 내가 한 선택의 결과가 돌아오는 것뿐이기에, 탓할 사람은 나 밖에 없다. 

인과에 대해, 나는 오랫동안 생각해왔다. 현재의 모든 결과에는 과거의 누적이 나타난 것이다. 그동안 내가 살아왔던 삶의 누적. 느꼈던 감정들과 그에 따른 생각들, 조금씩 자리 잡아가던 나의 가치관과 신념, 만나온 수많은 사람들과 그들과의 관계에서 깨달은 것들, 그리고 내가 선택해온 것들. 그 모든 것이 지금의 나를 구성하고, 지금의 생각과 행동을 결정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나의 인생은, 주어진 것들에서 모두 내가 선택하고 내가 걸어온 것의 결과라 내 앞에 부딪힌, 찾아온 모든 것들은 나의 인과이고 내가 마땅히 받아들여야 하는 일인 것이다. 오로지 나의 탓이며, 내가 끝까지 책임져야 할, 가져가야 할 문제인 것이다. 

인과란 것은 정말 돌이킬 수 없고, 반항할 수 없으며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무서운 것이다. 그저 내가 살아온 삶의 성적표이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을 살아가는 나 또한 앞으로의 나를 만들어가겠지. 지금 주저앉아 삶의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는 나도 미래의 내가 후회할 모습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다시 살아갈 수 있는지, 다시 일어날 수 있는지 모르겠어서 그저 나의 과거만 되짚고, 반성하고, 원망하고, 괴로워한다. 그래서 나는 매번 무력하게 나의 성적표를 받아들이기만 한다. 


나는 자책과 열등이 나를 더 성장하게 하는 연료라 믿었다. 경쟁이 치열했던 과학 고등학교 시절에 처음 맛본 열등이라는 감정은 나를 숨 막히도록 불안하게 하고, 한시도 쉬지 못하고 달리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실력이 부족한 것은 노력으로 채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누구보다도 일찍, 누구보다도 늦게 하루를 꽉 차게 보냈다. 그때부터라고 하기에는 정확하지 않지만 언제나 모든 일의 원인을 나에서부터 찾는 게 문제의 해결과 나의 발전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분명히 지금 내가 마주한 문제도 분명 나에게서 비롯된 문제일 텐데, 아무리 나를 헐뜯고 자책해도 달라지는 게 없다. 그 사실이 나를 미치도록 갑갑하고, 두렵고, 불행하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우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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