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작문

삶의 일부분

나의 이야기 [작성일 추정 불가]

by 사람

제가 세상에 비해 고작 한 톨이었던 시절로 돌아갑니다.


제가 초등학교 3학년 때 무렵 아버지의 회사로 인해 진해를 떠나 부산으로 다시 이사를 가게 됩니다. 아직은 아이들이 물정에 때가 타지 않아 새로운 저를 받아주었습니다. 서서히 제게 주어진 익숙하지 않은 구역에서 체취를 남겨갔습니다.


이사를 오기 전부터 저는 피아노를 배우고 있었습니다. 부유한 편은 아니었지만 부모님이 열정적으로 지원을 했고 비싼 옷들과 그 나이와는 어울리지 않는 예절을 갖추고 나간 전국적인 대회에서 액자 형태의 상과 함께 박수갈채를 받기도 했습니다. 이사로 인해 자연스럽게 손을 놓았던 피아노가 엄마도 마음에 걸렸는지 저를 다시 새로운 피아노 학원으로 보냅니다.


그렇게 한 해가 지나고 무탈하던 가정에 갈등이 오기 시작합니다. 아버지는 이상하게 자신의 지인들과 있는 술자리에서 자주 저를 끼웠습니다. 아버지와 그들은 주로 여자나 술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렸던 저는 알 수 없는 대화에 스미지 못하고 테이블 밑의 자갈을 세어보거나 홀로 그곳을 빠져나와 대기 의자에서 곯아떨어지거나 식당 주변 속력을 내는 자동차들의 헤드라이트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두 눈이 멀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런 술자리들을 갈 때마다 항상 보이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제가 아버지의 딸이라는 이유로 손마저 무거워지는 액수의 용돈을 쥐여주기도 했고 과한 스킨십까지 서슴지 않았습니다. 사람 자체가 되게 능글맞은 사람이어서 엄마도 제가 그 술자리에 가는 것을 탐탁지 않아했습니다.


가정의 갈등은 그 사람과 아버지의 싸움으로부터 시작이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버지의 지인과 동시에 회사 동료였던 그 사람은 부러 싸움을 조장하는 성격이었고 자존심을 이기지 못한 아버지는 소장이라는 위치를 포기하고 회사를 그만두게 됩니다. 그 후에 도전한 사업마저 실패로 돌아갔고 아버지는 그때부터 몇 년간 실직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술을 마시거나 엄마와 싸우는 날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엄마와 아버지는 제가 보는 눈앞에서도 서로에 대한 폭력적인 발언과 행동을 제어하지 못했습니다. 생에 처음으로 제가 꼭 어디론가 사라진 것 같았습니다. 돈벌이가 없어 자연스레 가정은 나앉게 되었고 그토록 좋아하던 피아노도 더 이상 연주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부모님의 싸움으로부터도 안전하지 못했던 저에게 기회가 찾아옵니다. 외가 할머니만이 저의 가정이 안정적이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할머니는 노후의 자금을 긁어모아 무엇이라도 배워보라고 저를 무용 학원에 보냅니다. 그 무용 학원은 동네에 있었지만 부잣집 자식들이 많았습니다. 그 친구들은 알아주는 유망주였고 여기선 모든 것이 처음인 저를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듯했습니다. 다들 각자의 연습에 열중이었습니다.


저는 무용을 배울 수 있다는 사실보다 잡동사니가 깨지는 소리로 가득한 집을 잠시나마 피할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았습니다. 무용을 할 때만큼은 가정에서의 일을 잊고 싶었던 거였는지 저는 수업 시간에 남들보다 배로 집중을 했습니다. 제가 다니던 학원은 한국무용 전문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저를 긍정적으로 봐주셨는지 반년도 배우지 못한 저를 온갖 행사와 대회에 유망주인 아이들 사이로 끼워 넣었습니다. 큰 대학병원의 환자들을 위해 공연도 수차례 다녔습니다.


초반엔 관심도 가지지 않았던 친구들이 제가 몇 개의 상을 받고 나서부터 달라졌습니다. 친구들은 제가 눈엣가시였을 것입니다. 대회를 같이 출전하다 보니 저 하나로 인해 자리가 밀려나 트로피를 못 받은 친구가 생겨난 것입니다. 그 친구는 가끔 찾아오는 학부모들에게도 사랑받는 방법을 알았으며 예쁘장한 미모로 인기가 많았습니다. 또한 어른의 눈을 피해 저를 지능적으로 따돌릴 줄을 알았습니다.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괴롭힘에 누군가 고의로 찢은 저의 연습복을 들고 눈물도 닦지 못한 채 무용 학원을 뛰쳐나왔습니다. 제 나이 고작 열세 살이었습니다. 뒤에서 들렸던 친구들의 웃음소리를 저는 아직도 잊을 수 없습니다. 싸구려인 것은 만 원짜리 연습복이나 갈 곳 없는 저의 처지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모든 문제의 근원이 결국 나라는 사실에 누군가를 원망하면서 자기혐오의 무게를 덜어낼 수도 없었습니다.


평소보다 일찍 집에 돌아가니 아버지는 돈 아까운 줄을 모른다며 빗자루로 저를 사정없이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의 땀방울이 저의 허벅지에 가랑비처럼 떨어졌습니다. 엄마는 온몸이 벌겋게 물들어가는 저를 보고도 가만히 있었습니다. 다만 저는 이 또한 사랑이라고 믿었습니다. 저에 대한 사랑이 아닌 아버지에 대한 사랑 말입니다. 그래서 살려달라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습니다. 말을 하려 해도 목소리가 자꾸만 먹혀들어 갔습니다. 수챗구멍 같은 목구멍 속에서 회오리가 쳤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난 뒤부터 학교 친구들도 저를 절벽으로 내몰았던 무용 유망주 친구들과 겹쳐 보였습니다. 저를 제외한 모든 것들이 징그럽게 작렬하고 있었습니다. 폭력의 대피처이자 위로였던 무용을 하지 못한다는 절망감은 꽤 컸는지 중학교에 올라가서도 동급생들처럼 무리 지어 어울리지 못했습니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방법을 몰라 오지도 않는 잠을 청하며 엎드려 있던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그들이 저를 버리기 전에 제가 저를 버렸습니다. 그렇기에 학교의 생활은 친구가 몇 없었기에 지루했지만 그만큼 빨리 지나갔습니다. 나이에 맞지 않게 미래에 먹고살 궁리를 하며 학교 시험보다 자격증 시험에 목을 맸습니다. 할 것이 없는 날에는 도서관 구석에 틀어박혀 시집을 외우며 시간을 때웠습니다. 부족한 돈을 부모님 대신 지원해 주었던 단체에서 글짓기로 상금을 타고 높은 사람들과 다소 경직된 자세로 사진을 찍기도 했습니다. 그 자리에는 저처럼 돈 없고 사연 많은 친구들이 있었고 이를 사업으로 삼아 생계를 유지하는 어른들 또한 있었습니다.


동급생들은 학업에 신경 쓰지 않는 저를 이해하지 못했으며 사실이 아닌 소문들이 무차별적으로 나뒹굴었으나 며칠이 지나지 않아 콘크리트 바닥처럼 차갑게 식기도 했습니다.


수십 개의 계절이 지나고 어느새 저는 고등학교 졸업을 앞둡니다. 고교 졸업을 몇 달 남겨두지 않은 상황에서 아버지는 외도를 했고 엄마는 처음으로 제 앞에서 울었습니다. 유일하게 제 곁에 사랑을 명분으로 이 년이라는 시간을 함께했던 세 살 어린 그 아이마저 울면서 떠났습니다.


물론 나도 울었습니다. 졸업식에 저를 찾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학교 강당에는 졸업생들의 웃음소리와 꽃다발에서 추락한 꽃잎들이 뒤엉켜 발길에 차이고 있었습니다. 졸업생 모두가 교복을 입고 있었지만 저는 버린 지 오래여서 무늬 없는 사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어디에도 섞이지 못했던 그때의 저는 생에 두 번째로 제가 꼭 어디론가 사라진 것 같았습니다. 북적이는 수많은 인파 속에 가만히 서서 한쪽으로 맨 가방끈을 구겨지도록 세게 잡으며 저의 졸업식에 꽃다발을 들고 가는 것이 소원이라던 그 아이의 말을 곱씹었습니다. 이어서 제게 주어진 삶들과 돌아가야 할 집을 떠올리며 눈물도 닦지 못한 채 학교를 뛰쳐나왔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도망쳐야만 하는 제 위치는 여전했고 역겹도록 우글거리는 학교를 불 지르는 꿈을 꾸었습니다.


교묘하게도 주위에서 나를 혐오할 때와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와 처음으로 그 아이를 만나고 마지막으로 헤어졌던 경험은... 죄다 무더운 여름이었습니다. 죽어도 닿지 못할 눈 부신 태양이 눈부시지 않은 저를 가지고 장난치는 것 같았습니다.


자격증을 공부하면서 알게 된 도서관 아저씨의 여동생이 과거에 술에 취한 아버지가 휘두른 화분에 맞아 과다출혈로 사망했다는 이야기를 먹지도 않은 끼니 삼아 의사에게 처방받은 파란색 약과 함께 삼켰지만 저의 세상이란 불은 자동차 헤드라이트처럼 쉽게 켜지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저를 달래주는 이는 없었습니다.


그 누구도 달래주지 않아 스물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저는 아직도 그 시절에 울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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