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지낼 당시에는 너에게 바라는 점이 많았다. 친구가 없어 혼자 지내는 네가 누군가와 어울렸으면 했고, 말수가 적은 네가 나에게 고민을 털어놓았으면 했고, 표현에 서툴던 너에게 고작 좋아한다는 그 한마디를 잠이 들기 전에 듣고 싶었다.
이제는 그런 게 무슨 소용인가 싶다. 손목을 끊어질 정도로 깊게 긋지 않으면 자살하지 못하고 한강에 빠져도 대부분이 구조되는 것처럼 간절히 바라면 멀어지는데 실패를 달고 오는 결과로 인한 심리적 리스크까지 감당하며 살아야 하나 싶은 거다.
그러니 너도 나를 잊고 너의 자리에서 너만큼의 행복과 너만큼의 사랑과 너만큼의 취미를 가지고 건강하게 지내기를 바란다. 하고 싶지 않은 노력은 하지 않아도 괜찮아. 기적처럼 너를 다시 만난다면 이 말을 해주고 싶다.
그리고 너에게 고맙다. 나는 내 인생에서 내가 주인공인 적이 없었는데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내 인생에서 너와 내가 주인공이었으니까. 지구 반대편에서 누군가가 물 한 모금이 없어 죽어나가는 이 현실에서 걱정이라고는 네 걱정밖에 없었던, 새파랗게 어린애가 팔자 좋은 걱정을 할 수 있었던, 세상에서 우리 둘밖에 없었던 그때가 바람이 차가워 목덜미가 시린 날이 오면 더 그리워진다.
시간이 무언가를 해결해주긴 하나보다. 곱슬곱슬한 털을 가진 너를 닮아 얌전한 몰티즈. 많은 계절과 함께 너의 강아지 이름까지 잊어버렸다. 시간이 더 흐르면 네 이름도 기억하지 않게 되겠지. 그리고 내 이름도 기억할 수 없겠지.
이렇게 말하니 너무 무섭고 슬프다. 시간은 잘못되었다. 모든 것을 잊게 만든 후 잔인하게 죽인다. 죽여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만든다. 우리 모두가 순진한 모습으로 시간이라는 방패 뒤에서 무언갈 죽이고 있다.
그러니 나는 너를 잊는 시간 동안 낡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