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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소설입니다만

면도칼을 들고 어디부터 그어야 할까 거울을 봤다

언제 또 집에 들어올지 모르는 남편의 면도기가 눈에 들어왔다.

유명 브랜드 전기면도기를 남편과 결혼 후 맞는 첫 생일 선물로 우리 언니가 건넸을 때 면전에서 "아, 저는 매일 면도날로 면도를 해야 확실한 거 같아서요.. "로 받아치길래

"그럼 반품하란 뜻이에요?"라고 내가 언니에게 감사하단 말도 없는 태도에 확인차 묻자 "아니.. 뭐.. 그래도 받아야지.."로 성의없이 말했을때

누군가에게 선물을 해 보지 않은 사람은 주는 기쁨을 모르는 것임을... 나는 이 관계가 감사한 것을 모르는 관계의 신호였음을 수많은 싸인 중에 눈치챘어야 했다.


아이를 시간당 어린이집에서 받아주는 나이가 되자마자 국내 최고 호화 아파트 입주를 도와주는 입주도우미라는 알바는 신선했다.


검은색 바지 정장에 리스트를 들고 입주하는 세대에 각 2개 이상의 평형별 최대 욕실 4개까지 각 수전과 이사 완료 후 샹들리에까지 설치하도록 체크를 하고 당시 유비쿼터스 시스템 도입으로 외부에서도 가스불 전기불을  끄고 닫고 잠금 기능과 인터폰, 주방 티브이, 서랍형 김치냉장고, 스타일러, 엘리베이터, 식기세척기 시스템 에어컨, 드럼 세탁기, 건조기 등의 사용법을 알려주는 일은 누군가에게 새 집에 들어오면서 좋은 기운과 정보를 줄 수 있는 거라 생각되어 만족했었다.


아이를 보내고 데려오는 시간 안에 돈을 벌 수 있는 직종이 제한적인데 이렇게 우리나라 최고 호화 아파트의 입주 현장에서 최신 아파트 트렌드를 안다는 게 재밌었다.


새시의 종류와 각 입주 시 등기업무를 대행하는 법무사 여직원과 부속품을 가지고 설치해주는 건설사 직원과 협력업체분들은 매일 많은 입주세대들을 상대하다 보면 하루가 금세 흘렀다.


문제는 우유, 신문, 각종 세제나 정수기, 인터넷 설치 업체 등이 아파트 근처에서 허락 없이 입주 중인 곳으로 들어와 영업을 할 때 건설사와 연관이 있고나 아파트 입주 시 필수사항인 거처럼 할 때 막자니 그분들 밥벌이고 그렇다고 사실은 아니니 그 또한 모른 척 하기도 그래서 적절하게 도움되는 정보는 입주자들에게 열심히 도왔다.


그러다 보니 가족들은 해외에 있고나 사정상 혼자 사시는 고령의 입주자들에겐 이런 여러 시스템이 이해가 어렵다 하셔서 크게 A4 용지에 작동법을 적어드리기도 하고 반복해서 알려드리다 보니 각 세대에서는 나를 지명해서 방문해달라고 하는 일이 늘었다.


음식물 처리기나 샤워 분사 변경까지 일일이 옆에서 이해하시도록 도와드리는 일은 번거로울 수 있어도 워낙 사명감으로 수많은 봉사시간과 한 평생 누군가에게 도움되는 일을 하는 것에 보람을 느끼던 내겐 돈까지 받는데  이보다 더한 자리도 없다 싶었다.


그러던 오늘... 바로 그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두 번이나 나를 부르던 그 할머니께서 이번엔 또 뭘 쓰시려다 부르시나 19층까지 올라갔는데 하얀 목욕 가운을 입은 남자가 문을 열어주었다.


60평이 넘는 아파트에 할머니 방은 안쪽이라 "어르신, 어떤 게 불편하세요?"

하고 들어갔는데 갑자기 그 아들로 보이는 중년의 남성은 바에 가서 와인이 어쩌고 저쩌고 얘기를 하면서 잔에 따르더니 내게 여기 좀 앉으라고 부르는 거다.


할머니는 늘 계시건 안방에도 욕실에도 드레스룸에도 계시지 않았고 내가 주방 쪽으로 나오자 그는 치즈 플레이팅에 와인 잔을 두고 일도 힘든데 자기가 스테이크를 구워줄 테니 먹고 가라는 거다. 황당해서 어르신은 안 계시는지 물었더니 스르륵 목욕가운을 벗었고 나는 본능적으로 현관문을 향해 띄었다.


그러나 제각기 닫힘 기능을 달리해 놓은 문이나 신발을 신을 겨를도 없어 신을 들고나가 엘리베이터를 봤지만 3개의 엘리베이터 모두 시간이 오래 걸릴 층이라 비상계단 화물칸을 갔다.


이사 전용으로 파란 비닐 테이프에 나무와 보완재로 엘리베이터 손상을 줄이려  치안을 자랑하는 cctv도 가려진 것을 순간 확인했다.


나는 파쿠르 선수처럼 각 계단을 몇 개씩 점프 점프하며 무릎이 삐끗하니 목에 건 방문증이 흔들려서 주머니에 넣고 19층을 내가 가진 초능력을 이용해서 1층으로 내려왔다.


땀은 온몸에 흐르고 나는 그 사이에라도 1층에 그가 엘리베이터로 내려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바로 문을 열고 관리사무실 동으로 전력질주를 했다.


그렇게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섰는데 그 공간은 햇살 가득 너무도 고요하고 여유로운 모습으로 내 거친 숨소리에 다들 쳐다보았다.


그때 난 아무 얘기도 할 수 없었다. 그가 스르르 옷을 벗자마자 나는 할머니도 없는 둘만의 공간이란 생각에 와인이며 치즈며 스테이크 운운하는 그의 계획적인 내 이름을 기억하고 지명해서 불렀던 것을 뭐라 얘기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다만 앞으론 세대 아파트 평수가 큰데 어떤 일이 생길 것을 대비해 둘이 짝을 이뤄 현관문은 굽으로 살짝 고정하고 방문하자는 의견을 내자 그걸 그렇게 땀을 흘리며 가쁜 호흡으로 얘기하나 싶은 시선으로 그러자고 한 뒤 퇴근을 했다.


입주자 카드를 통해 그 사람을 확인하려 했는데 이름이 오직 할머니 한분만 있어서 찜찜한 채 퇴근길에도 온갖 복잡한 마음으로 아이를 데리고 씻기고 놀아 준 뒤 재우고 욕실에서 혼자 거울을 보자니 결혼하고 아이 때문에 퇴사한 뒤 알바를 찾으러 다닐 때마다 비슷한 희롱들이 나 때문인 것인가 그럼 면도날로 온몸에 칼자국이 있는 여자라면 그만둘까?


아이를 낳고 오히려 저체중에서 조금 살이 붙어 좋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키 167에 체중은 53킬로, 가슴은 모유수유 이후에도 큰 차이 없이 34에서 34.5 정도이고 허리는 22인치에 황금골반이라는 힙은 39인치인 28살 4살 아이를 둔 오롯이 나 혼자 아이를 키워야 하는 애엄마인 나.


아이를 맡길 시간에 시간제 일거리를 찾아 헤맬 때마다 위아래로 훑는 시선을 감추기 위해 헐렁하고 임신 때 입던 큰 옷을 입어봐도 비슷한 시선이 버거워서 내가 문제인가?


밤에는 출판사에서 받은 일을 하고 3시간 정도만 잠을 자고 아이 먹이고 챙겨서 맡기고 노동을 하고 다시 반복되는 이 일에서 돈 없는 남자와 살던 지원을 못 받는 티를 숨길수 없어 그런 것인가?


남자들의 희롱을 중지할 수 있는 일은... 이런 방법도 있지 않을까? 날카로운 면도날을 들고 한참을 거울 앞에 서 있었다.


아마도 이 면도칼의 주인은 돈이 다 떨어지면 집에 들어와 돈 될 것을 찾아 나갈 텐데 그때 내 모습을 보면 자신의 어리석음을 절감하게 될까? 하는 복수심은 담은 파괴심은 면도날이 번쩍일 때마다 생각에 생각을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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