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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타 Dec 30. 2020

누구에게나 트라우마는 있다.

어느 국민학생의 축구장 트라우마

축구공은 추억을 싣고…


넓은 운동장에 두개의 골대가 서있다. 두 골대 사이에는 얼핏 보아도 열 개가 넘는 추구공이 날아 다닌다. 한쪽 골대만 사용하여 축구를 즐기는 무리들이 있고 양쪽 골대를 모두 사용하는 무리들도 있으며 골대의 뒤쪽 그물을 사용하는 무리들도 보인다. 그리고 꼭 골대가 있어야 축구를 한단 말인가? 사람들의 동선이 그나마 적게 겹치는 운동장 구석에서 본인들 만의 나무 골대를 지정하여 축구를 하는 무리들도 있다. 이 뿐만이 아니다. 때로는 축구공을 열심히 따라다니는 무리들 사이에 야구공도 날아다니고 술래잡기 무리들도 뛰어다닌다. 내가 기억하는 국민학교 시절 흔한 점심시간의 모습이다.


그들의 축구 경기는 서로 상관없는 사람들끼리 부딪치고 몸싸움을 하면서 그렇게 그들만의 방식으로 경기는 진행되었다. 심판은 당연히 없다. “반칙 반칙!! 방금 손에 맞은 거 봤지? 봤지?” 반칙이 일어나면 주위에 있던 다른 축구 무리의 친구들이 심판으로 변신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래도 시시비비가 가려지지 않으면 목소리 크기 대결을 하기 시작한다. 주로 각 반에 가장 축구를 잘하거나 영향력이 있는 친구가 나서서 목소리를 높이고 어쩌다가 싸움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렇게 싸우다가 한번 양보하고 나면 다음 번 반칙때는 상대 쪽에서 이해하고 넘어가는 아름다운 구조가 형성 되어 있었다. 


점심시간이 끝나는 종소리가 울린다. 종소리는 곧 경기종료 휘슬 소리다. 인저리 타임은 있을 수 없다. 휘슬이 울리면 그 많은 무리들이 모두 수돗가로 갈려가서 벌컥벌컥 수돗물을 배가 터지도록 들이키고 머리에 물을 한 바가지 덮어쓴 후 교실에 들어가서 오후 수업을 준비 한다. 에어컨은 커녕 교실에 선풍이 2대가 전부였던 그 시절 한 반에 53명이 들어가 수업을 했다. 만약 여름방학이라는 것이 없었다면 교실의 오후 모습을 어떠 했을까. 생각만 하면 정말 아찔하다. 


나에겐 너무나 두려운 축구공


약 29년전.. 처음으로 축구라는 것을 해본 것이 국민학교 2학년이었다. 점심시간에 형성되는 대부분의 축구팀에는 각 팀에서 축구를 조금 해봤다는 친구가 곧 감독이었다. 나는 우리팀 감독님께 수비수라는 위치를 배정받았다. “수비는 골대 앞에서 상대방을 막는 것이야!! 잘 할 수 있지?” 그리고 난 그날 공을 한번도 차보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공이 나에게 오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잘 뛰어다니는 친구들을 졸졸 따라다니다가 경기가 끝나버렸다. 그 후로 특별한 일이 없으면 점심시간에 친구들과 축구를 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실력이 늘어가는 친구들이 있으나 아무리 뛰어다니고 공을 열심히 차도 실력이 늘지 않는 친구들이 있었다. 바로 나다. 우리는 비슷한 친구들끼리 몹시 친해졌다. 


어느 평화로운 점심시간.. 언제나 그랬듯 우리편 골대 앞에 서서 멀리서 공이 날라오면 반대편으로 뻥 차올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운동장에 날아다니는 수많은 공 중에 지금 내가 차야 하는 공은 어디 있는 것 인가. 한순간 방심해 버리면 자칫 내가 차야 하는 공을 놓칠 수 있다. 그렇게 멍하니 골대 앞에서 운동장을 바라보던 그 순간 낯선 공 하나가 엄청난 파워로 날라와서 나의 머리를 강타했다. “으악!!!!” 비명을 지르면서 그 자리에 쓰러졌다. 하늘에서 별이 빙빙 돈다는 이야기가 이때를 두고 한 말이었구나. 잠시 후 정신을 가다듬고 비틀거리며 일어난 나에게 저 멀리서 어떤 6학년 형님이 다가왔다. 내가 맞은 슛의 주인공이었다. 쓰러져서 아파하는 내가 걱정이 되어서 다가오는 거겠지? 그러나.. 나의 아름다운 기대는 철없는 나만의 환상일 뿐이었다. 나에게 다가온 6학년 형님은 엄청난 분노에 차올라 있었고 아파서 울먹이는 나의 뺨을 한 대 후려치는 것이 아닌가. 어안이 벙벙 했다. 방금 내 머리로 날라온 공은 무엇이지? 그리고 도대체 이 형님은 나를 왜 때리는 거지? 난 그저 가만히 서 있었을 뿐인데.. 자초지정을 물어볼 겨를도 없이 반대쪽 머리에 또 다시 원투 펀치를 날리며 나에게 말했다. “야이 XX야. 너 때문에 골이 안 들어 갔다이가!!” 


이건 뭘까? 본인이 찬 슛이 내가 가로막는 바람에 골이 안 들어 갔다고 화풀이를 하는 것이 아닌가. 어이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단 말인가. 생각 할 겨를도 없이 나의 엉덩이에 시저스킥이 날라왔다. 그 자리에서 쓰러진 나는 흙바닥에 머리를 숙인 채 고개를 들지 못했다. “방금 저 슛..!! 너만 아니었으면 완전 골 이였다. 알겠나? XX야” 분을 참지 못하며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는 6학년 형님이 너무나 무서워 눈조차 마주칠 수 없었다. 서러웠다. 엄마가 보고 싶었다. 그 자리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서러운 눈물을 뚝뚝 흘렸다. 서럽게 울고 있는 내가 얼마나 불쌍해 보였을까. 하지만 화가 머리 끝까지 차올랐던 6학년 형님에게서 자비란 찾아 볼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나의 뒤통수에 강력한 스파이크를 한대 더 날리고는 “앞으로 조심해라. XX야” 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리고 그 무서운 6학년 형님이 저 멀리 사라지는 것을 다 확인한 후 에서야 주위에서 구경만 하던 친구들이 하나둘씩 모여서 나를 위로해 주었다. 온 몸은 흙과 먼지로.. 얼굴은 멍과 눈물로.. 만신창이가 된 나는 이 억울한 상황에 울음을 멈출 수 없었고 교실 한쪽 구석에 혼자 앉아 학교가 마치는 시간까지 흐느꼈다. 


귀신보다 무서운 트라우마


6학년 형님 사건이 발생한 이후로 나에게는 큰 변화가 찾아왔다. 항상 즐겁기만 했던 점심시간이 두려워 지기 시작한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앞으로 조심해라.” 라는 그 말이 머릿속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운동장에 날아다니는 저 많은 공들 중에 하나라도 잘못 맞으면 공의 주인이 달려올 것만 같았다. 그리고 나에게 공을 막았다는 이유로 원투펀치와 함께 시저스킥을 날리겠지. 트라우마라는 것이 이렇게 무서운 것이구나. 운동장에서 여기 저기 날라오는 모든 공을 자세히 보고 있다가 피하는 습관이 생겨 버렸다. 그러다 보니 막상 우리가 차야 할 공도 피해버리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다가 그 6학년 형님이 보였다. 그 형님의 공에 맞은 것도 아니었으며 눈이 마주친 것도 아니었지만 그날의 악몽이 머리를 스쳐 지나가면서 왠지 지금이라도 달려와서 나에게 시저스킥을 날릴 것만 같아 교실로 도망갔다. 그 후로 몇 번이나 더 그 형님을 운동장에서 보았지만 나는 계속 도망을 다녔고 그 형님은 끝내 나에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를 하지 않았다. 그렇게 1년이 지나고 나는 3학년이 되었고 그 무서운 6학년 형님은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날의 사건은 27년이 지난 지금도 나의 머리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고 축구화를 신을 때 마다 가끔 6학년 형님의 시저스킥이 떠오른다. 


트라우마는 쉽게 지워지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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