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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타 Oct 04. 2021

외롭지만 매력적인 포지션

골키퍼는 위대하다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하는 일


“오늘은 너랑, 너랑, 너가 공격을 하도록 해.”

“그리고 너랑, 너는 수비를 하도록 해.” 


학창시절의 점심시간, 축구를 하기 전에는 항상 ‘오늘의 작전’에 대해 아주 짧게라도 논의를 하곤 했다. ‘쓰리빽 전술?’ ‘제로톱 전술?’ 물론 그런 것이 무엇인지도 잘 모른다. 작전이라고 해봤자 누가 공격을 하고 누가 수비를 하고 정도인데 서로 의견이 맞지 않을 경우 공을 제일 잘 차는 영향력이 강한 친구의 의견을 따르거나 가끔은 축구공 주인의 의견을 반영하기도 했다. 그 축구공이 있어서 우리가 이렇게 축구를 할 수 있다는 단순하면서도 명쾌한 논리에 모두 동의했기 때문이다.

매번 그런 것은 아니지만 주로 대부분의 게임에서 공을 좀 찬다는 친구들이 공격수를 했고, 나처럼 재능이 조금 떨어져 내 앞의 공을 걷어 내기 바쁜 친구들은 수비수를 했다. 그렇기에 항상 나는 물어볼 것도 없이 수비수였다.


“골키퍼는 누가 하지?”

“난 안 해.”

“나도 안 해.”

“난 안해봤는데···. ”


지금은 아니겠지만 30년 전 내가 기억하는 국민학교 운동장에서 골키퍼는 무척이나 기피되는 포지션이었다. 한정되어 있는 소중한 점심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뛰어 놀아도 모자랄 판에 골키퍼를 섰다가 자칫하면 돌 하루방처럼 골대 앞만 우두커니 지키다 점심시간이 끝나 버릴 수도 있고, 또 골을 허용하면 왠지 골키퍼의 잘못인 것처럼 느껴질 수 있기에 그만큼 책임감도 무거운 자리여서 그랬던 것 같다.


“윤경, 오늘 골키퍼 한번 해 봐.”


갑자기 어디선가 내 이름이 들려왔다. 잘못 들은 것이라 생각했지만 분명히 모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나를 왜 불렀지? 지금껏 단 한 번도 골키퍼를 해본 적도 없는 나를? 곰곰이 생각을 해 보았다. 친구들이 갑자기 나를 믿는 것인가? 그럴 리는 없는데.

분명 모두가 기피하는 자리에 가장 영향력이 없는 만만한 사람을 지목했다고 밖에 볼 수가 없었다. 어차피 수비수를 하더라도 전력에 큰 도움은 되지 않기에 누군가는 해야 하는 골키퍼 포지션을 추천했던 것이 분명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버리는 카드였다. 


“나 골키퍼 한 번도 안 해봐서 못해.”

“아니야, 할 수 있어. 그냥 공 오면 막으면 돼. 골 먹어도 네 책임이 아니야. 만약 한 골 먹으면 바로 우리가 돌아가면서 바꿔 줄게.”


골을 먹게 되면 얼마나 미안할까 하는 두려움 앞에서 선뜻 친구들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나에게 그 어떤 책임도 묻지 않는다는 말이 나에게 큰 용기를 주었고, 만약 골을 먹으면 포지션도 바꿔 준다는 약속을 믿고 나는 비장하게 골대 앞으로 향했다.


골대 앞에는 대여섯이 넘는 친구들이 서있었다. 운동장에 있는 두개의 골대를 활용해서 전교생이 점심시간에 축구를 하기 때문에 누가 지금 나와 함께 축구를 하는 친구들인지 잘 기억해야 한다. 이 중 몇 명은 다른 경기의 골키퍼일 것이고 몇 명은 수비수겠지. 골키퍼 장갑 따윈 없기 때문에 누가 골키퍼인지 구분하는 것도 쉽지 않다.


“비켜, 비켜! 비키란 말이야.”


다른 반 경기의 선수들이 내가 지키고 있는 골대에 슛을 할 때면 조용히 비켜 주어야 한다. 눈치 없이 우두커니 우리 공만 바라보고 있다가 자칫 엉뚱하게 날아오는 공에 또 맞기라도 했다간 꿈에 나올까 무서운 6학년 주걱턱 형님이 다시 다가와 씨저스킥을 날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게 내 인생 첫번째 골키퍼는 이리저리 날아오는 공을 피하는 것부터 시작되었다.


“골!”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골이 들어간 것 같은데 정확하게 어디서 들려오는 소리 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우리 팀 친구들이 나에게 다가와 나의 등 뒤에 있는 공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아뿔싸. 방금 내가 피한 공이 우리 공이었구나. 민망하고 죄스러운 마음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아니야, 괜찮아. 잘하고 있어.”

“그래, 진짜 잘하고 있으니까 지금처럼만 해.”


지금 내가 잘하고 있다고? 정말? 지금처럼만 하라고? 분명 한 골 먹으면 바꿔 준다던 이야기는 이미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사라져 버렸고 실수를 한 나에게 너무 잘 하고 있다는 영혼 없는 칭찬만이 돌아왔다. 친구들의 저 영혼 없는 칭찬에는 아무도 골키퍼를 교체해 주기 싫으니 계속 혼자 골키퍼를 해달라는 암묵적인 청탁이 숨어 있는 것이 분명했다. 현재 우리 팀이 이기고 있고 딱히 몇 골 더 먹는다고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계속 골대 앞에 우두커니 서있다가 공이 밖으로 나가면 뛰어가서 주워 오고 공이 골대 안으로 들어오면 놓치고 친구들의 위로를 받는 것을 반복하다가 점심시간이 끝나버렸다. 그리고 쓸쓸히 교실로 복귀하는 나에게 친구들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너 골키퍼 잘한다. 소질이 있어 보여.”

“그래, 앞으로 골키퍼하면 되겠다.”


친구들의 뻔한 의도가 보이는 달콤한 말에 속아 넘어가기에는 내가 오늘 얼마나 못했는지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내가 니들 시커먼 속내를 모를 줄 아느냐. 나를 망부석처럼 계속 그곳에 세워 둘 작정인게지!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 점심시간에도 우려했던 대로 친구들은 나에게 골키퍼를 권유했다. 서로 눈치를 보면서 어제 골키퍼를 잘 수행해준 나를 슬쩍 치켜세우기 시작했다.


“오늘 골키퍼는 누가 하지? 윤경, 어제 잘하던데 오늘도 골키퍼 하는 거 어때.”

“싫은데?”


어림없는 소리였다. 아무리 달콤한 말로 나를 유혹해도 이번엔 넘어갈 수 없었다. 골을 먹는 것이 두려웠고 우두커니 날아오는 공을 바라보는 것도 무서웠다. 하지만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하는 일임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잠시 후 나의 완강한 거부 의사에 이어 다른 친구들도 골키퍼를 할 수 없는 이유를 하나둘씩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는 지난 주까지 골키퍼를 너무 자주 했어. 오늘은 못 하겠어.”

“나는 손을 다쳐서 할 수가 없어.”

“야, 다치긴 뭘 다쳐. 뻥치지마.”


점점 이기적으로 변해가는 각자의 모습에 우리는 조금씩 실망을 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모두가 골키퍼는 재미없는 자리라는 선입견에 사로잡혀 제 고집들만 부려대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고 골문을 비워 두고 축구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든든하게 골문을 지키는 누군가가 있기 때문에 다른 친구들이 열심히 뛰어다닐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에는 우리는 너무 철이 없었다.

결국 우리는 수비수 네명이서 10분씩 돌아가며 골문을 지켰다.


골 넣는 골키퍼


며칠 후, 한 번도 본 적 없는 해괴한 상황이 발생하였다. 상대편에서 골키퍼를 보던 친구가 점점 다가오더니 우리 골문까지 와서 슛을 날렸다. 뭐지? 저건 미친놈인가? 골키퍼가 너무 지루한 나머지 잠시 정신을 잃은 것인가? 골키퍼 주제에 여기가 어디라고 와서 슛을 날리지? 우리 골문 앞을 지키던 수비수들은 엄청난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다.


“애들아, 쟤 미쳤나봐.”

“골키퍼 주제에 어디까지 올라오는 거야?”

“야, 쟤 골 넣어도 무효 아니냐?”

“아니야, 골키퍼도 골 넣어도 돼! 이틀 전에 김병지가 넣었잖아.”

“뭐라고?”


김병지가 골을 넣었다고? 그럴 리가. 그래서 월요일부터 이런 신기한 상황이 발생하는구나. 그때 당시, 아무리 초등학생이라도 하더라도 김병지를 모르는 친구는 없었다. 우리 동네 국회의원 이름은 몰라도 꽁지머리 김병지가 누구인지는 다 알고 있었다. 

그런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골키퍼 김병지가 골을 막은 것이 아니라 골을 넣었다고? 골키퍼가 골을 넣어도 되는 것인가? 몹시 궁금했다. 하지만 TV에서 놓친 장면을 컴퓨터로 다시 보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시절이었기에 스포츠 뉴스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미 나도 모르는 사이에 김병지의 골은 스포츠 뉴스를 타고 운동장 전체에 퍼져 있었고 방금 우리에게 달려와서 슛을 날린 저 용감한 골키퍼는 김병지의 골 장면을 생중계로 본 것이 분명했다.


“주말에 김병지 골 넣는 거 본 사람?!”

“나, 나! 생방송으로 봤지.”

“나도! 나는 스포츠 뉴스로 봤지”


질문 하나에 친구들이 이렇게 흥분하는 것을 보니 정말 몇 년에 한번 볼까 말까 하는 진귀한 장면임이 분명했다. 궁금해 미칠 것 같아 저녁마다 스포츠 뉴스를 챙겨보았다.

일주일 후 ‘주간 베스트 골’이라는 이름으로 김병지의 골을 TV로 마침내 볼 수 있었다. 그 경기는 바로 울산과 포항의 1998년 플레이오프 2차전이었고 합산 스코어에서 한 골을 뒤지고 있던 울산의 골키퍼 김병지가 포항을 상대로 추가시간에 극적인 골을 성공시켰다. 정말 태어나서 처음 보는 장면에 신기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골키퍼가 저렇게 해도 되는 거구나. 이래서 요즘 학교 운동장에 골키퍼들이 종횡무진 운동장을 누비기 시작했구나.


골키퍼라고 무조건 골대 앞에 우두커니 서있다가 날아오는 공만 막거나 밖으로 나가는 공을 주워 와야 하는 재미없는 포지션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그날의 사건 이후 점점 알아가게 되었고 그날 이후 골문을 텅 비워 놓은 채 운동장을 가로질러 폭풍 드리블을 하는 멀티플레이어 골커피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와 친구들 또한 점심시간에 ‘골 넣는 골키퍼 김병지’로 빙의하는 맛에 골키퍼 포지션을 거부하는 일도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골키퍼는 정말이지 매력적인 포지션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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