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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타 Feb 21. 2021

절대 해서는 안되는 이야기

군대이야기와 축구이야기

군대 이야기 


대학교 3학년쯤. 공부하러 학교를 다니는 것인지 술 마시러 학교에 잠시 들리는 것인지 헷갈릴 만큼 하루하루가 신나고 즐거운 신학기시절, 오늘도 어김없이 무슨 단합대회라는 타이틀을 붙여 술집으로 모였다. 

당시 단합대회라 함은 과의 대표적인 행사인 신입생 환영회부터 개강 총회 뒤풀이, 종강총회 뒤풀이, 오리엔테이션 모임, 엠티 사전 단합 모임, 엠티 뒤풀이, 여학우 모임, 남학우 모임, 중간고사 기말고사 뒤풀이, 체육대회 뒤풀이, 축제 뒤풀이 등 공식적인 행사는 물론이고 개별적으로는 소모임 스터디 뒤풀이 부터 개별 생일 파티, 캠퍼스커플 100일 기념 파티, 헤어지고 나서 마시는 위로 파티, 짝사랑 하는 동기의 고민 상담 모임, 남학생 수 만큼 해야 하는 군대 입대 전 군주파티, 군대 입대 후 100일 휴가 파티, 전역 환영 파티 등이 있었다. 

이날은 정확하게 어떤 모임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차피 크게 중요하지 않는 것이 어느 모임에 가던 타이틀은 다르지만 행사 진행은 대부분 대동소이 하다. 모임의 시작은 우리의 단합과 파이팅이 학과의 미래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우리 모두 하나가 되어 뭉치자는 이야기와 함께 파도를 타고 저녁 10시가 넘어 가면 통금이 있는 친구들과 술자리를 그렇게 즐기지 않는 친구들이 귀가하고 나서 진정한 단합의 용사들만 남게 된다. 이때는 먼저 집에 가버린 친구들이 우리의 단합을 해치는 주범이라며 험담을 하기도 하고 어떻게 우리가 더욱더 하나가 될 수 있는지 토론을 한다. 그리고 술자리가 절정에 이르면 감수성과 술이 적당히 섞인 남학생들이 이런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한다.


“내가 군대 있을 때 말이야. 근처 부대에서 어떤 놈이 총기를 들고 탈영을 해서 다들 죽는 줄 알았지 뭐야. 잠도 못 자고 얼마나 힘들었다고.”

“야 그래도 임마 넌 최전방은 아니었자나. 최전방은 얼마나 살벌한지 아냐? 밤마다 실탄 들고 보초 서는데 완전 전쟁터 같이 살벌해.”

“이것들이 편안하게 훈련만 받고 왔으면서 엄살 좀 부리지마. 의경은 매일 실전이야 실전. 밤마다 내일 일을 걱정하면서 잔다고.”

“너네들이 잘 몰라서 그러는데 훈련을 받던 근무를 서던 하루 세번 밥은 꼬박 꼬박 안 쉬고 무조건 먹잖아. 취사병은 매일 새벽에 일어나야 하고 평일 주말 없이 365일 명절에까지 죽어라 일만 한다고.”

“아니 형님들. 그래도 형님들은 병장 되면 내무반에서 왕처럼 지내셨잖아요. 요즘 군대는 형님들 시절과는 또 달라져 가지고 병장이 되도 이등병과 똑같이 일하고 굴러야 되기 때문에 말년까지 얼마나 힘든지 아십니까?”

“야 임마. 그래도 요즘 군대는 때리지는 않잖아. 우리 때는 밤마다 나가서 기압 받고 했는데. 너네들은 그게 군대냐? 보이스카웃이지.”

“참···. 나도 성격 많이 죽었지···. 내가 군대 있었을 때만 해도 내 말 한마디면 다들 벌벌 기고 그랬는데···. “


역시 오늘도 “누가 군대에서 더 힘들었었느냐”의 토론이 시작되었다. 일명 빡신 군대를 다녀온 남자가 진정한 사나이 라고 생각 하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서 서로의 군대 이야기를 시작했다. 

마치 총기사건을 눈앞에서 보기라도 한 듯 이야기 하는 A형님, 최전방이 아니면 군대가 아니라고 생각 하는 B형님, 군인들은 잘 모르는 의무경찰 세계의 고충을 토로하는 C형님, 학교 행사 때 마다 파전 100인분을 만드시는 취사병 출신 D형님, 전역을 두 달 앞두고 휴가를 나와 짧은 머리에 나름 왁스를 덕지덕지 바르고 학교를 기웃거리다가 뒤풀이에 따라온 E병장, 군대를 마치 삼청교육대라도 다녀온 것처럼 이야기 하는 F형님 그리고 MT때 마다 매번 군복을 챙겨와 입고 군대 분위기를 강요하는 G형님 까지 오늘도 어김없이 불과 몇일 전 모임 때 했던 군대 이야기를 또 나눈다. 그리고 서서히 본인들의 군대 이야기를 꺼내는 분위기가 많은 예비역들에게 퍼져 가기 시작했다. 

이때 공통적인 특징이 있는데 다들 상대방의 군대 이야기에는 크게 공감하지 않고 오로지 본인의 군대 시절을 회상하면서 이야기를 하는데 집중한다. 입은 열려 있고 귀는 닫혀 있는 대표적인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또 한가지 특징이 있다면 강조할 부분은 강조하고 굳이 이야기할 필요 없는 부분은 과감하게 생략한다. 예를 들어 나같은 경우는 보급병 출신으로 최전방에서 매일 새벽 우유 배달을 했다. 이때 “최전방에 있었다”는 이야기는 강조해야 할 부분이고 “우유 배달을 했다”는 부분은 과감하게 생략이 가능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야기가 한참 무르익기 시작하면 몇몇 여학우들이 슬금슬금 화장실을 다녀온다고 나가고 돌아오는 길에 잠시 다른 테이블에 앉았다가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다. 가끔 자리를 떠나지 않고 옆에 앉아서 군대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주고 맞장구 쳐주는 착한 마음씨를 가진 여학생도 더러 있지만 그런 아름다운 성격의 친구들은 군대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무슨 이야기든 잘 들어주고 잘 웃어주며 남학생들에게 인기도 많은 천사 같은 친구들이다. 이런 친구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오늘도 예비역들은 더욱 열심히 군대에서 내가 제일 힘들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우리 과에 해병대를 나온 형님들과 친구들이 몇명 있었는데, 단 한번도 그들에게서 군대가 힘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어 보지 못한 것 같다. 


축구 이야기 


“당근 당근 바니바니 바니바니 당근 당근 ”

“삼육구 삼육구!! 삼육구 삼육구!!”

“팅! 팅! 팅팅! 탱! 탱! 탱탱! 팅팅탱탱 후라이펜 놀이”


지겨운 군대 이야기 너머로 건너편 테이블에서 술게임의 소리가 들려와 슬그머니 자리를 옮겼다. 어차피 나의 군대 시절 이야기도 이미 다 했겠다 더 이상 앉아 있을 이유가 없었기에 즐거운 술게임에 동참했다. 술게임은 주로 술 마시는 속도가 현저하게 줄어 드는 기운이 발견되거나 누군가가 고의적으로 술을 먹지 않는다고 판단될 때 속도를 올리기 위해 술게임을 하기 시작한다. 점점 취해져 가는 분위기에서 누군가가 취해 있지 않으면 테이블의 분위기가 다운될 수 있기 때문에 그동안 고의적으로 술을 빼던 인물을 탐색해 두었다가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면서 평소 술이 약한 사람은 주량이 늘어가고 때로는 흑기사 흑장미 제도를 통해 애틋한 사랑의 감정이 피어오르기도 하며 나아가 우리의 단합은 더욱 더 견고해진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작된 술게임은 자정이 넘도록 이어졌고 소외된 사람 없이 모두가 하나가 되어갈 때쯤 우리는 모두 서서히 체력의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웃으면서 술을 마시다가 더 이상 먹었다가는 학과 역사에 오랫동안 회자될 수 있는 술주정을 부릴 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되면서 게임을 할 때 마다 내가 걸리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점점 체력은 떨어지고 술기운에 집중력과 순발력이 현저하게 저하될 때쯤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눈빛에서 그 두려움을 느낄 수 있었기에 우리는 잠시 게임을 멈췄다.


“야 어제 박지성 골 넣는 거 봤냐?”


술게임이 잠시 중단된 사이에 해외축구 신봉자 P형님이 갑자기 축구 이야기를 꺼냈다. 재밌는 술자리에서 갑자기 축구 이야기라니!! 아무리 게임이 힘들어도 축구 이야기라니!! 자고로 군대이야기와 축구이야기는 남녀가 모인 곳에서 절대 하면 안된다는 불문율이 떠올랐다. 군대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축구이야기 역시 남자들의 전용 안주거리고 여자들은 듣기도 싫어하기 때문에 절대 소개팅이나 술자리에서 꺼내서는 안된다고 군대가기 전 신입생 시절부터 전해 들었기에 이 테이블도 이제 분위기가 칙칙해질 거라 생각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세상은 많이 변해 있었다. 

“당근이지. 나 박지성 볼려고 잠도 안자고 라이브로 봤어.”

“와씨. 나 어제도 술 마신다고 못 봤는데."

“아 난 기다리다가 도저히 잠이 와서 못 보고 아침에 하이라이트로 봤어.”

2002년 월드컵 4강신화로 국민대통합을 이루고 박지성 이영표선수 등 해외에 나가 대한민국의 이름을 꾸준히 알리기 시작한 이후 엄청난 변화의 시대가 찾아왔다. 더 이상 축구는 남자들만의 안주 거리가 아니었다. 당장 지금 나의 앞자리에 않아 있는 우리 학과 장수커플 Y형님과 Z누나의 커플룩도 아스날 유니폼이었다.

“오빠 저 방학 때 영국여행 계획 중인데 유명한 축구장 위치랑 투어 방법 좀 알려 주세요.”

“오!! 나 영국 진짜 가고 싶은데!! 꼭 가야 하는 곳 알려 줄께.”

“영국을 간다고?? 대박!! 기왕이면 박지성 경기 일정 맞춰서 다녀와.”

“와!! 그럼 좋죠!! 그런데 티켓은 어떻게 구해요?”

“선배 친구가 얼마전에 다녀왔다고 하던데 한번 알아봐 줄까?”

축구이야기가 시작되고 우리 학과의 귀염둥이 신입생 B양이 유럽축구장을 가보고 싶다는 말 한마디에 우리 테이블은 술게임으로는 절대 이룰 수 없는 또 다른 대통합을 이루게 되었다. 물론 인터넷에도 많은 정보가 있으나 스마트폰 시대가 아직 오지 않았던 시절이라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이 적었고 온라인으로 정보를 공유하는데 한계가 있었기에 오프라인에서 밤새 이야기를 나누어도 될 주제였다. 우리는 더 이상 술게임은 접어두고 밤새 축구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당연 박지성 선수의 공이 크다고 할 수 있다. EPL은 몰라도 K리그는 몰라도 축구는 몰라도 심지어 월드컵에 관심이 없다 하더라도 박지성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2000년대 중후반 박지성 선수는 대한민국의 자존심이었고 IMF시절 우리 국민들에게 힘을 주었던 박찬호 박세리 선수 그 이상의 존재였다. 박지성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는 “여자들은 축구 이야기를 싫어 한다.” 는 오랜 편견을 깨부수어 주었다는 것이다.

세월이 지나고 축구와 예능 그리고 연애의 경계가 조금씩 넘나들면서 축구선수들이 예능프로에서 육아를 하고 아나운서와 연애를 하며 은퇴 후 예능인이 되기도 하면서 남녀노소 사랑을 받기 시작했다. 박지성 선수는 은퇴 이후에도 우리의 관심에서 조금도 멀어지지 않았으며 해외에서 대한민국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역할은 자랑스러운 후배들이 이어서 해주고 있다. 해외 유명한 축구장 투어를 찾는 한국인 관광객의 남녀 비율 역시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한다. 

이제 더 이상 축구이야기는 남자들끼리 할 필요성은 느끼지 못한다. 명절마다 가는 고향집에서 어머니와 가끔 손흥민 선수 이야기를 나눈 기억도 있으니 말이다.  

 

군대에서 축구했던 이야기


모든 남자들이 축구를 다 잘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남자들이 축구를 다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나처럼 축구는 더럽게 못하지만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축구를 잘하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축구를 잘하지만 축구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물론 확신은 없다. 어찌되었던 어떤 경우라도 군대에 가면 대부분의 남자들은 축구를 하게 된다. 물론 아닌 경우도 있겠지만 많은 남자들은 군대에서 군대식 축구를 경험하게 되고 전역 후에 이것은 또 다른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는다. 이등병 시절 눈치를 보며 슛을 망설였던 경험이 있거나 병장시절 해리 케인과 같은 부동의 원톱으로 팀의 에이스 역할을 했던 군대 축구의 경험을 되돌려 보면 피식 웃음이 나는 경우가 누구나 있을 것이다. 

혹시, 군대이야기와 축구이야기 보다 더 여자들이 싫어하는 이야기가 바로 “군대에서 축구했던 이야기”라는 말을 들어보았는가? 시대가 많이 바뀌어 남녀노소 축구를 즐기는 시대가 왔고 군대에서 스마트폰을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이 되었기에 이런 즐거운 추억도 친구들에게 공유하고 싶을 때가 많다. 


그런데 군대에서 축구했던 이야기는 군대 이야기에 속하는 것일까? 축구 이야기에 속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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