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어디든 갈 수 있다면
"아빠는 1조가 생긴다면 뭘 하고 싶어? ...건물 사는 거랑 투자 빼고!"
며칠 전 아빠와 같이 뉴스를 보다가, 뜬금없이 내가 아빠한테 물어봤다.
이 질문을 하게 된 동기는 2030들한테 미안하다고 하는 정치인들을 보면서였다. 그들을 보며 어쩐지 더 언짢아진 마음은, '미안하면 돈으로 보상해 주지'와 같은 찌든 생각으로 뻗어나갔다. MBTI 중 'N'이 70% 이상인 사람스럽게 계속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1조, 이 화수분 같은 돈을 갖게 된다면 실제로 어디다 쓸 것인가?
내 N스러움은 아빠한테서 왔는지, 아빠는 꽤나 즐거워하며 답을 하기 시작했다. 얼토당토않은 질문 하지 좀 말라고 뭐라고 할 줄 알았는데, 1조가 냅다 주어진다는 건 떠올리기만 해도 기분 좋은 상상이었나 보다.
"음... 최신형 컴퓨터부터 살 거야. 그리고 맛있는 걸 좀 먹고 옷을 몇 벌 사겠지?"
아버지의 행복은, PC방이었다.
아빠의 대답이 너무 귀엽기도 했고, 무엇보다 내가 지금에서 조금 더 노력하면 충분히 이루어줄 수 있는 것들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저 1조라는 돈이 생각보다 너무 커서, 아빠가 상상 속에서 아무리 써도 10%(일천억)조차 소비되지 않았다. 그래서 점점 답변을 어려워하시던 아빠가 나에게 질문을 토스하셨다.
"너는 뭐 할 거야?"
"나는, 엄청난 뮤지컬을 만들어보고 싶어. 엄청난 작가진과 엄청난 제작진과 엄청난 작곡가들, 엄청난 배우들을 투입해서 블록버스터 뮤지컬을 만들 거야. 그다음 뮤지컬을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사람들을 초청해서 보여줄 거야."
그래, 나의 정체성을 하나로 요약해야 한다면 결국엔 '덕후'다. 내게 1조라는 돈이 생기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건 지금 내가 가장 푹 빠져 있는 뮤지컬을 제작하는 것.
그래서, 1조를 갖는다고 해도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지금과 본질적으로 같다. 바로, 내가 사랑하는 것을 전염시키는 것이다.
덕후라는 단어는 유독 다른 단어로 대체가 어렵다. 사랑하는 것을 모두에게 전염시키고 싶은 갈망을 가진 자, 영업과 추천에 목말라 있는 자.
이종범 작가가 사고실험에서 인터뷰한 내용이 생각난다.
그러니까요, 오타쿠 같은 인간들은 왜 그렇게 먹여주고 싶어서 안달일까요. 저는 오타쿠들이 갖고 있는 영업에 대한 욕망이 되게 이타적이라는 생각을 하는데, 그 욕망의 근저를 가만히 보면 만화가로는 이제 15~16년을 살았지만 작가로 살아왔던 시간을 열광적 소비자로 살았단 말이에요.
내가 더 즐겁기 위해서는 작품이 더 많아야 되고 작가가 더 많아야 되고 내가 놀 수 있는 놀이터가 커져야 한다는 다분히 이기적인 욕망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이야기를 만들어 볼 수 있게 독려하고 이야기를 즐길 수 있게 계속 꼬시는 그런 태도를 갖게 된 게 아닌가.
누구나 얘기하잖아요. 어떤 종류의 이타성은 극도의 이기심에서 발전되기 시작한다는. 콘텐츠 미치광이로서 저의 욕망 때문에 그렇게 뭔가를 영업하고 가르쳐주는 것 같아요.
- 출처 : 최성운의 사고실험
1조를 갖게 된다면 당연히, 평생의 경제적 자유를 보장받을 수 있다는 안도감에서 나오는 행복이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1조'라는 돈을 가지고 뭘 하고 싶냐는 질문은, 이런 경제적인 걱정을 없애고 싶다는 마음을 확인하려고 하는 질문이 당연히 아니다. 아마 평생 써도 다 못 쓸 것이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내가 무엇을 원하고 추구하고 욕망하는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질문이다.
나는 '1조가 있으면 뭘 하겠냐'는 질문을 받고, 나의 '덕력'에서 나오는 갈망을 확인했다. 혼자서만 내가 사랑하는 콘텐츠를 즐기기는 싫은 마음. 내가 사랑하는 것을 통해 타인도 행복하길 바라는 '이기적인 이타심'.
며칠 전, 브런치에 작은 일기를 썼다. 좋아하는 배우로 인해 그가 공부한 오페라에도 관심이 생기고, 그가 저승에 가서 만나보고 싶다고 한 칼 세이건, 아인슈타인에 대해서도 찾아보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썼다.
평생 무언가를 덕질하며 살아온 입장으로서, 덕질한다는 것은, 무언가를 열렬히 좋아한다는 것은 실은 생각보다도 더 어마어마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나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나의 현재에 덕질하는 대상의 현재, 과거, 미래가 함께 온다. 그래서 내 세계는 그 이전과 같을 수 없다.
그래서 덕후는 일종의 'advocate(지지자)'이자 또 다른 'evangelist(전도자)'인 셈이다. 내가 열광적으로 사랑함을 통해 다른 세계를 맛보고, 그렇게 알게 된 세계를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해주고 싶은 마음을 지니게 된다.
지금 내가 브런치를 하는 것도 사실 이종범 작가가 언급한 '판 키우기'의 일환인듯하다. 내가 사랑하는 이야기들이 사람들에게 더 전해져서, 내가 사랑하는 세계가 넓어진다면 난 1조가 생기지 않더라도 충분히 행복할 것이다. (아 물론, 돈이 쥐어진다면 군말 없이 받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