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서점 가는 것을 참 좋아합니다. 시가지에 있는 대형서점, 집 주변 근린상가에 있는 소형서점, 굽어진 골목에 숨어 있는 독립서점 모두 가리지 않고 시간이 나면 갑니다. 군대 시절 호기롭게 시작한 '전역까지 책 100권 읽기' 프로젝트 이후로, 어른이 되고 나서는 한 번 서점에 가면 꼭 1-2권의 책을 구매하여 돌아오곤 했습니다. 개인적인 지식의 갈증을 어느 정도 해소한 경지에 도달한 것인지, 아니면 집구석에 아직 한 번도 펴보지 않은 책들의 꾸러미를 보며 스스로 죄책감을 느껴서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이제 저는 서점을 가면 무조건 책을 사지는 않습니다.
대신 요즘에 저는 책을 '구경'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인기 순위대로 열을 맞추어 늠름하게 서 있는 베스트셀러들, 온라인 북스토어 추천 알고리즘으로는 절대 마주치지 못했을 신박한 주제의 책들, 다소 자극적인 문구와 표지로 관심을 달라고 아우성치는 책들, 그리고 이들의 디자인, 질감, 색깔. 인터넷에 접속하면 정보의 홍수가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서점에 발을 들여놓으면 정말인지 엄청난 양의 책과 이들이 전달하는 정보에 압도되곤 합니다.
근데 요즘 서점을 가면, 원래 빼곡히 책장들이 서 있어야 할 자리에 다른 것이 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는 몇 권의 책들이 전시회처럼 띄엄띄엄 감각 있게 놓여 있는 기다란 테이블, 사람들이 앉아서 책을 읽고 휴식할 수 있는 소파, 그리고 아예 샵인샵(shop-in-shop) 형태로 들어온 액세서리, 문구품 전문 판매대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지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서점의 끝단을 걷거나 코너를 돌 때면 은은하게 풍겨오는 커피 로스팅 향기, 달콤한 디저트 향기가 저를 맞이해주며 자그마한 카페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서점의 규모가 큰 경우는 아예 식당이 있는 경우도 있고요. 잔잔한 재즈 음악을 틀며 이제는 힙스러움의 대명사가 된 LP판을 비치한 음반 판매점도 있습니다.
서점의 공간은 왜 이렇게 변화한 것일까요?
서점은 부동산 시장에서 큰 축을 담당하는 리테일 섹터의 한 공간입니다. 리테일 공간은 잠재 소비자와 공급자가 만나는 지점이며, 최종적으로 물건 및 서비스 소비 활동이 이루어지는, 우리 생활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오프라인 공간입니다. 서점 또한 책이라는 물품을 중심으로 직접적인 소비가 이루어지는 오프라인 리테일 공간인 것이지요. 리테일 섹터 특성상 부동산업 군 이외의 다양한 브랜드와의 접점이 많고, 트렌드가 시시각각 빠르게 바뀌는 업계이기에 그만큼 이에 대한 다양한 관심사와 흐름을 잡아낼 수 있는 감각이 필요한 업계입니다. 제가 가장 관심 있어하는 부동산 섹터이기도 합니다.
안타깝게도, 최근 코로나로 인한 외부 활동 급감 및 온라인 쇼핑 확대로 인하여 국내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리테일 섹터가 매우 큰 타격을 입었는데요, 온라인 인프라를 갖추지 않거나 이에 대해 적극적인 해법을 마련하지 않은 많은 소상공인 및 대형 백화점들이 줄줄이 파산했습니다. 일례로 113년 역사의 고급 백화점 Neiman Marcus, 118년 역사의 백화점 체인 JC Penney, 126년 역사의 대형 유통업체 Sears 모두 파산 절차에 들어갔었습니다. 제가 2020년 초반 코로나가 기승을 부릴 때 해외부동산 투자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는데요, 이때 외국의 유명한 부동산 사모펀드의 CEO가 진행하는 회의에 참여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 분이 하시는 말씀 중 기억나는 구절이 있습니다:
"앞으로 몇 년간 리테일 섹터는 다른 어떤 여타 부동산 섹터보다 더 큰 변화를 맞이하고 이에 따라 업계 지형이 바뀔 것이다."
지금 세상은 그렇게 바뀌고 있습니다.
사실 리테일 섹터는 코로나 이전부터 변곡점에 있었습니다. 온라인 쇼핑 및 유통시장이 점점 발달하면서 이제는 사람들이 굳이 힘들게 밖에 나가서 직접 상가로 가서 물건을 구매하기를 꺼려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더 편하고, 빠르고, 시간과 노력이 덜 드는 구매 경험을 원했습니다. 미국의 Amazon, 한국의 쿠팡 등의 이커머스 및 물류 플랫폼은 이와 같은 고객의 니즈를 충족하며 급성장을 했었지요. 옷, 가구, 음식 등을 구매할 때 사람들은 인터넷으로 최저가 검색을 하고, 다양한 상품을 비교하며, 전자결제 서비스를 통해 클릭 한 번에 구매를 완료하고, 해당 상품이 집 정문까지 하루 만에 배달이 오니, 사람들이 굳이 시간을 내서 걸어가거나 차를 끌고 변두리에 있는 쇼핑몰에 갈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프라인 리테일 섹터는 어떤 전략을 세우고 어떤 가치를 내세워야 고객을 데려올 수 있을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저는 리테일 공간은 단지 물건과 서비스를 파는 유통 플랫폼이 아닌 그 자체의 브랜드와 철학을 담고 보여줄 수 있는 문화 플랫폼이 되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경험이 소비되는 체험형 공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유기적으로 기획된 오프라인 매장 공간에서 소비자가 매장 물건과 서비스를 보고, 만지고, 듣고, 먹고, 향기를 맡으면서 당사의 브랜드와 철학을 온몸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체험형 매장은 고객들이 물건만 구매하고 스쳐 지나가는 곳이 아닌, 오래 동안 머물면서 매장의 분위기와 브랜드를 만끽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자연스럽게 고객의 마음과 신뢰를 얻고, 그들이 먼저 다가오게끔 넌지시 제안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설득당한 고객은 온라인 플랫폼에도 당사의 물건과 서비스를 구매하며 오프라인-온라인 구매전환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특히나 각각의 소규모 체험형 공간을 한 데 엮어서 통합적인 브랜딩 하에 체험형 복합문화단지로 조성하면 매우 큰 시너지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서점의 얘기로 돌아오겠습니다. 저는 대형서점 중 교보문고를 자주 가는데요, 교보문고를 가시는 분들은 느끼셨을 수도 있겠지만 최근 몇 년간 교보문고는 대부분의 지점에 대해 인테리어 리뉴얼링을 진행했습니다. 풀과 나무를 중심으로 한 자연 콘셉트의 인테리어(연두색, 베이지색, 갈색)를 확대하며 자그마한 도심 속의 숲에 온 듯한 공간을 연출하였고요, 교보문고가 자체 개발한 향수인 “The Scent of Page”를 매장에 전반적으로 뿌려 그 특유의 시원하면서도 은은한 향으로 고객을 사로잡습니다. 또한 교보문고는 기존 서적을 위한 공간을 여타 물건 및 서비스가 비치될 수 있는 복합공간으로 바꾸고 있는데요, 점차 문구점, 카페, 레스토랑, 예술품 전시회가 들어오면서 책장을 살며시 밀어내는 듯한 공간 변화를 볼 수 있습니다. 책을 구매하러 온 사람들이 서점 안에서 보고, 먹고, 쉬고, 향기를 맡으면서 교보문고의 철학과 브랜딩을 온몸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책을 사는 활동은 기본이요, 다른 여타 소비활동이 같이 복합적으로 이루어지도록 교보문고는 고객들에게 제안을 합니다. 교보문고는 당사의 판매 중심축인 '책'을 문화소비활동의 기점으로 잡고, 이를 중심으로 교보문고라는 통합적인 오프라인 플랫폼 하에 브랜드를 기획, 유치, 및 운영을 하며 가치를 창출하고 확장하는 것이지요. 이렇기에 교보문고는 이제 단순 서점이 아닌 복합문화단지 플랫폼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는 리테일 섹터에만 국한된 내용이 아닙니다. 오프라인 부동산업은 온라인 시장이 확대될수록 오히려 오프라인만이 제시할 수 있는 가치에 집중해야 할 것이고, 이에 따라 리테일뿐만 아니라 주택, 오피스, 호텔 섹터는 각각 특유의 가치를 더 날카롭고 세심하게 다듬어야 하는 시대가 왔습니다. 이제는 기술이 발전하여 사람들이 생활을 위해 굳이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열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집 밖으로 나와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고, 놀고 싶고, 다양한 경험을 하고 싶어 합니다. 이번 코로나 사태로 외부 활동이 강제적으로 장기간 동안 제한되었을 때 어떠셨습니까? 여행을 가고 싶고, 좋은 물건과 서비스를 소비하고 싶고, 지인들과 함께 식당에서 늦게까지 한 잔 기울이고 싶으셨지 않았습니까? 저는 그런 활동이 이루어지는 공간의 총체가 경험, 문화, 체험형 공간이라고 생각됩니다. 인간의 변하지 않는 고유한 욕구, 고유한 가치를 공간에서 잡아내야 합니다. 그런 인간 고유 가치를 기반으로 한 오프라인 경험을 담을 수 있는 공간 기획자가 다음 세대의 부동산업을 주름잡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