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지원 Oct 24. 2021

신은 대체 무엇이 두려웠을까

- 인문학 공부의 첫걸음, 언어


누군가의 볼모가 되었던 사연      


수년 전의 일이다. 독서모임에서 두어 번 특강을 했고 참여했던 분들의 다수가 만족스러워하셨다. 몇 분들은 장기적인 교육 프로그램을 원했다. 이동해야 하는 거리가 멀어 잠깐 주저했지만, 그들의 뜨거운 학습 열정이 내 마음을 움직였다. 일 년 동안 매월 만나기로 했고, 그 소식을 전해 들은 회원 한 분이 고맙다면서 이런 말을 보내 왔다. “선생님은 이제 저희의 볼모예요.”      

우리와 약속하셨으니, 매월 꼭 오셔야 해요! 라는 의미라고 이해되어 고마우면서도 은근히 구속받는 느낌도 들었다. 어딘가에 매이기 싫어하는 내 성향 탓도 있겠지만, 볼모라는 단어가 속박하는 느낌을 주는 것도 사실이리라. 표준국어대사전은 볼모를 이렇게 정의한다.      


볼모

유의어는 유질, 인질.

1. 약속 이행의 담보로 상대편에 잡혀 두는 사람이나 물건.

2. 예전에, 나라 사이에 조약 이행을 담보로 상대국에 억류하여 두던 왕자나 그 밖의 유력한 사람.     


인문학도로서 볼모보다 더 나은 표현을 찾고 싶어졌다. 적확한(!) 언어 사용이 인문학 공부의 출발이기에 ‘볼모 사건’은 괜찮은 학습 기회라 생각했다. 포로와 볼모 중 어느 단어가 더 센 느낌을 줄까?      


포로

유의어는 군로, 노수. 

1. 사로잡은 적.

2. 어떤 사람이나 일에 마음이 쏠리거나 매이어 꼼짝 못 하는 상태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사전이 포로에 대해서는 비유적 의미까지 적어두었다. 실제로 우리는 ‘사랑의 포로’와 같은 표현을 종종 본다. ‘사랑의 볼모’보다는 자주 보았으리라. 누군가는 ‘교육의 볼모’보다는 ‘교육의 포로’가 낫다고 판단할지도 모르겠다. 둘 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좀 더 적확한 단어를 찾아가면 될 테고.      


모든 언어는 일종의 번역이다     


어쩌면 포로든 볼모든 비슷한 단어들이고,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다. 포로와 볼모 또는 그 대안을 찾는 일이 정말 중요하기는 할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포로와 볼모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는 일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자기 상황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수록, 다시 말해 언어 감각을 키울수록 오해와 외로움이 조금은 줄어든다면, 우리의 언어생활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스페인어를 영어로 옮기는 번역가 이디스 그로스먼의 『번역예찬』은 언어와 번역에 대한 통찰이 가득한 책이다. 내게는 발터 벤야민의 <번역가의 과제>라는 책과 함께 ‘번역’의 본질을 이해하게 만든 텍스트다. 나는 『번역예찬』의 한 문장을 외고 있다.      


“모든 언어는 비언어적 세계에 대한 일종의 번역이다. 

Language is a translation of the nonverbal world.”      


‘비언어적 세계’란 언어로 표현되기 이전의 것들, 이를테면 생각, 느낌, 감각, 경험을 뜻한다. 생각이나 감정을 표현하기가 쉽지 않았던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인문학 강연에서 ‘언어의 중요성’을 이야기할 때면 청중들에게 이렇게 요청한다.      


“여러분, 제가 초콜릿을 하나씩 나눠 드리겠습니다. 벨기에 명품 초콜릿 노이하우스입니다. 흔한 초콜릿은 아니니 천천히 음미하면서 드셔 보세요. 드신 후에 옆에 계신 분과 시식 소감을 얘기해 보세요. 어떤 맛이었는지 표현해 보세요.”      


초콜릿을 맛보는 순간 미각이 살아난다. 아직 언어로 표현하지 않은 그 미각적 경험이 ‘비언어적 세계’다. 깊고 풍요로운 맛을 언어로 표현하기란 쉽지 않다. “정말 맛이 좋네요”. “너무 맛있어요” 정도로 부사만 남발하기 십상이다. 요즘엔 “대박”이라는 말이 온갖 표현을 대체하는 실상이다. 이런 표현들은 초콜릿만의 고유한 맛과 맛난 곰탕이나 끝내주는 스파게티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한다. 세상 모든 음식에 쓰일 수 있는 보편적인 표현인 것이다.      


복잡한 사건이나 특정 인물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나 감정은 초콜릿의 맛보다 복잡하고 다층적이다. 이를 표현하기란 초콜릿 맛을 전달하는 일보다는 힘들 것이다. 초콜릿 맛은 “대박”이라고 표현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만,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적확히 표현하는 일은 그보다는 훨씬 중요하다. 사람들과의 문제 중 상당 부분이 오해나 소통의 부재로 빚어진다는 점을 감안하면 말이다.      


표현의 힘겨움은 크게 세 가지 이유에서 온다. 첫째, 표현의 수단인 언어가 한계를 가진 도구이기 때문이다. 둘째,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바가 무엇인지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기 때문이다. 셋째, 말하는 사람이 비언어적 세계와 언어를 신중하게 연결하려 들지 않는다. 다시 말해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바(비언어적 세계)를 신중히 들여다보지 않을 때, 자신이 말하려는 의도와 동떨어진 어휘를 선택할 때 오역이 일어난다.      


효과적인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언어 감각을 키워야 한다. 언어의 한계를 인식하는 동시에 적확한 언어를 사용하는 능력 말이다. 적확은 정확과 다르다. 틀림없이 꼭 들어맞는 것이 ‘적확’이다. 적확한 언어 사용이란 비언어적 세계(자신의 느낌, 감정, 사고)를 제대로 표현하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뜻이다. 자신의 의도를 명징하게 전달하는 능력이라 이해해도 좋겠다. 그로스먼의 말처럼, 자신의 감정, 생각, 감각에 가까운 언어를 찾는 노력은 다른 언어를 번역하는 일과 비슷하다.      


바벨탑 쌓기가 빚어낸 일들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 창세기 11:9     


성서에 따르면, 오만해진 인간은 탑을 쌓았다. 스스로 이름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영광에 오르기 위함이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홍수로 그들을 쓸어버리는 대신 탑에 오른 이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만들었다. 서로의 언어가 달라졌음은 인간에게 무엇을 의미할까? 홍수보다는 다행스러운 상황인가, 아니면 더 가혹한 처벌인가?     


어쨌든 인류는 살아남았고, 미증유의 문제를 맞이했다. 예전처럼 대화를 나누던 시절은 이미 지나갔다. 삼삼오오 모였지만 서로의 언어가 다르다고 상상해 보라. ‘영어’라는 공용어도 없는 가정이다. 손짓 발짓으로 생존 문제는 근근이 헤쳐가겠지만, 삶의 질을 높이는 소통은 단절될 것이다. 집단지성의 가능성도 희박해진다.      


그렇다! 신은 언어의 힘을 간파했다. 어쩌면 두려워했는지도 모른다. 언어는 인류의 도구다. 요긴하고 유용할 뿐만 아니라 때때로 위대한 도구다. 우리는 언어를 활용하여 소통하고 교육하고 문명을 일군다. 인간이 이뤄내는 온갖 창조적인 일들은 말과 글을 통해 이뤄졌다. 언어를 통해 상상력과 지식이 전파되고 문명의 교류가 가능해졌다.      


우리가 맺고 있는 우정이나 사랑 또한 서로를 이해하는 말에 빚지고 있다. 서로를 교감하지 못하는 언어만 사용한다면 오해와 무지로 얼룩진 삶이 될 것이다. 언어가 없다면 지금보다 더욱 외로워지고 공동체 생활이 힘들어질 것이다. 요컨대, 언어가 없다면 대화가 사유가 힘들어진다. 어쩌면 인류는 지금보다 더욱 흩어져 지낼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것들이 신의 처벌이라면 결코 가벼워 보이진 않는다.     


바벨탑을 쌓았던 이들보다는 우리의 사정이 나을 것이다. 언어로 의견을 주고받고 사람들과 만나 정겨운 담소도 나눈다. 글을 읽으며 새로운 정보와 통찰을 얻기도 한다. 외로움과 오해가 소멸됐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의 외로움은 앞으로도 여전하고, 사람들 사이의 오해는 영원히 존재하리라. 괴테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이렇게 썼다. "오해를 받는다는 것은 인간의 운명이 아닌가."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다     


인문학이란 다름 아닌 사람(人)과 언어(文)를 공부하는 학문이다. 표준국어대사전은 ‘인문학’을 “언어, 문학, 역사, 철학 따위를 공부하는 학문”으로 정의했다. 나는 사전에서 정의한 순서가 마음에 든다. 인문 소양을 갖고 싶다면 문사철 공부보다 언어 감각의 고양이 선행되어야 하는 까닭이다.      


인문학 공부는 멀리 있지 않다. 생활 속에서 인문 소양을 함양할 수 있다. 우리가 쓰는 말과 단어들이 ‘비언어적 세계(경험, 감정, 사고)’를 적확하게 포착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근본적이고 중요한 인문학 공부다. 한 문인의 말처럼 정확한 이해가 사랑이라면, 언어를 세심하게 다루는 노력은 사랑의 실천이다. 자신이 쓰는 단어의 뜻을 정확히 모를 때마다 사전을 찾아보는 것이야말로 인문학을 공부하는 일이다.      


말할 수 있는 것이라면 명징하고 적확하게 말해지면 좋다. 그럴 때마다 서로 교감하는 영역이 확장될 테니까. 이해받지 못함에서 오는 외로움을 언어 감각이 조금은 덜어줄 것이다. 친밀함이 자신을 건강하고 지혜롭게 드러내는 일이라면, 언어 감각이 친밀함의 농도를 더해줄 것이다. 나는 비트겐슈타인은 잘 모르지만, 언어의 중요성을 실감케 하는 그의 말을 수십 번은 곱씹었다.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다.” - 비트겐슈타인

The limits of my language mean the limits of my world.



작가의 이전글 내가 아는 단어가 나의 세계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