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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식의 문턱, 믿음으로 건너는 길

모든 것을 비워낸 자리, 다시 삶을 심다

by 시니어더크

오늘은 무균실로 옮겨온 첫날이자, 고용량 항암제 멜팔란을 맞는 날이다.
멜팔란은 조혈모세포 이식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약이다. 그러나 단순히 “항암제”라고 부르기에는 그 위력이 너무도 특별하다. 마치 황폐한 밭을 갈아엎을 때 잡초와 곡식을 가리지 않고 모두 뒤엎어버리듯, 혈액 속의 이상 형질세포는 물론 정상 세포들까지도 모조리 없애버린다. 일반 항암제보다 몇십 배는 높은 용량이 투여되기에, 몸은 순식간에 텅 빈 들판처럼 황량해진다.


그만큼 위험하고 두려운 약이지만, 그래도 이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분명하다. 이 병을 근본적으로 막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멜팔란은 단순한 치료가 아니라, 모든 것을 지워낸 뒤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만드는 준비 과정이다. 무너져 내린 자리 위에 미리 채집해 두었던 조혈모세포를 심고, 그 세포가 새로운 혈액을 만들어 가도록 돕는 것이다.


혈액암은 다른 암과 달리 '완치'라는 말을 허락하지 않는다. 일반 암은 수술과 항암, 방사선 치료를 거쳐 5년 동안 재발하지 않으면 완치라 선언할 수 있다. 그러나 혈액암은 언제든 다시 모습을 드러낼 수 있기에, 의사들은 대신 '완전관해'라는 표현을 쓴다. 암세포가 당장은 보이지 않지만 언제든 되돌아올 수 있다는 뜻이다. 환자와 가족에게는 잠시 숨 고를 수 있는 휴전과도 같은 시간일 뿐, 전쟁이 끝났다고는 말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렇기에 멜팔란을 맞는다는 건 단순히 약을 투여받는 일이 아니다. 무너짐을 감내하고서라도 다시 살아갈 희망의 씨앗을 심기 위한 결단이다. 환자에게는 목숨을 건 싸움이며, 가족에게는 두려움 속에서도 끝까지 붙들어야 하는 여정의 시작이다. 황폐한 땅에 씨앗을 뿌리듯, 암세포가 사라진 빈터 위에 조혈모세포를 다시 심고 싹이 돋기를 기다려야 한다.


그 작은 세포들이 몸속에서 뿌리를 내리고 번식하면서 백혈구, 적혈구, 혈소판,호중구 등을 새롭게 만들어낸다. 처음에는 겨우 '1'이라는 숫자로 시작하지만, 조금씩 조금씩 자라나 언젠가 정상 범위에 도달하는 날이 온다. 그때 비로소 환자는 이식실을 벗어날 수 있고, 암세포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고 확인되면 병원에서도 퇴원을 허락한다. 하지만 그 순간이 오기까지는 끝을 알 수 없는 기다림 속에서 수많은 부작용과 위험을 감내해야 한다.

결국 이식이란, 모든 것을 허물고 다시 세우는 과정이다. 절망을 넘어 희망을 붙잡기 위해 반드시 건너야 하는 문턱이며, 환자와 가족 모두에게는 생명을 건 모험과도 같다. 무너짐과 기다림 끝에서 다시 삶을 피워 올리기를 바라는 간절한 믿음, 그것이 이식이라는 길을 걷게 하는 힘이다.


이식실은 철저히 외부와 차단된 무균의 공간이다. 그곳은 마치 바깥세상과는 전혀 다른 작은 섬과 같았다. 문밖을 나설 수도, 창문을 열 수도 없다. 바람 한 줄기, 햇살 한 줌조차 들어올 수 없는 곳. 면역을 지켜주는 백혈구 수치가 '0'으로 떨어진 순간,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먼지나 균 하나도 칼날이 되어 몸을 위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내에게만은 예외가 있었다. 하루에 한 번, 어쩔 수 없이 그 닫힌 문을 열고 무균실 밖으로 나서야 했다. 바로 투석을 위해서였다. 다른 이식 환자라면 상상조차 하지 못할 일이었지만, 그녀는 혈액암으로 인하여 신부전이라는 짐을 함께 지고 있었기에 투석을 멈출 수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 이식이 필요했듯, 하루하루 버티기 위해서는 투석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과정이었다.


병원은 특별히 아내만을 위한 작은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다른 환자들과 접촉하지 않도록, 투석실 안에서도 철저히 분리된 방이었다. 그곳으로 향하는 길은 마치 낯선 전쟁터에 나서는 행군과도 같았다. 아내는 늘 파란색 비닐 모자를 쓰고, 전신을 가리는 파란 가운을 입고, 신발 위에는 투명한 비닐을 덧씌웠다. 온몸을 두른 그 차림새는 감염을 막기 위한 방패였고, 동시에 그녀가 지닌 연약함을 드러내는 갑옷이기도 했다.


나 역시 같은 차림으로 그녀를 따라갔다. 보호자라기보다 함께 전장에 선 전우처럼, 늘 곁에 서 있어야 했다. 투석이 시작되면 찾아오는 고통은 늘 극심했다. 관절을 파고드는 듯한 통증이 몰려오면, 그녀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 시간을 혼자 감당하게 둘 수 없어서, 나는 손발을 주무르며 곁을 지켰다. 작은 위로가 큰 도움이 될 수는 없었지만, 고통의 시간을 함께 나누는 일만은 포기할 수 없었다.


무균실과 투석실을 오가는 하루하루는 우리에게 또 다른 싸움이었다. 아무도 대신 걸어줄 수 없는 길, 그러나 반드시 함께 걸어야 하는 길이었다.


투석은 언제나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녀는 통증의 정도를 최고 등급인 '10'이라고 표현했다. 숫자 하나에 담긴 그 말의 무게는 실로 엄청났다. 병원 생활을 오래 겪어본 사람이라면 '10'이라는 표현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죽음의 문턱까지 몰아붙이는 고통이었다.


투석실로 내려가기 전 이미 진통제를 한 번 맞았고, 도중에도 추가로 한 번 더 맞았지만 통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마치 불길이 꺼지지 않고 계속 타오르듯, 그녀의 몸속에서는 통증이 파도처럼 몰려왔다. 지속성 모르핀 주입기의 속도를 8에서 12로 올려 보았지만, 그것도 잠시 숨을 고르게 해 줄 뿐 근본적인 고통을 잠재우지는 못했다.


결국 4시간을 채워야 하는 투석을 3시간 만에 억지로 멈춰야 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녀의 몸은 단숨에 2.8kg이나 가벼워졌다. 투석 전 체중은 67.1kg이었으나, 끝난 뒤에는 64.3kg으로 줄어 있었다. 몸속 깊은 곳에서 혈액과 함께 수분을 짜내듯 빼낸 결과였다. 그것은 생명을 지키기 위한 과정이었지만, 동시에 몸을 탈진으로 몰아넣는 가혹한 시련이기도 했다.


그렇게 고통과 탈진 속에서 무균실로 돌아왔을 때,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또 다른 싸움이었다. 간호사가 이미 항암제를 준비해 놓고 있었다. 숨 돌릴 겨를도 없이 이어지는 치료 앞에서, 우리는 하루하루가 전쟁 같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낄 수밖에 없었다.


30분 만에 주입이 끝난 항암제는 마치 독을 머금은 불길 같았다. 그 독성이 워낙 강해, 치료가 끝나자마자 며칠간 연이어 수액을 맞으며 몸속을 씻어내야 했다. 약물이 퍼져 있는 혈관을 따라 물길을 트듯, 수액은 쉼 없이 흘러들어 그녀의 몸을 적셨다.


구토 방지제도 함께 투여되었지만, 그것은 고통을 잠시 눌러두는 얇은 덮개에 불과했다. 약물의 부작용으로 정신은 자꾸만 흐려졌고, 무거운 졸음이 파도처럼 몰려왔다. 그러나 그 잠조차 그녀에게는 온전히 허락되지 않았다. 고관절을 파고드는 극심한 통증이 몸을 가만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그녀는 침대에 누울 수도 없어, 소파에 내려와 몸을 웅크린 채 괴로움을 견뎌야 했다. 그 모습은 마치 작은 새가 폭풍을 피해 날개를 접고 돌틈에 몸을 숨긴 듯했다.


무균실에서의 하루는 철저한 규칙과 싸움이었다. 입안이 허는 것을 막기 위해 하루에 11번이나 가글을 해야 했고, 엉덩이의 피부가 헐지 않도록 여러 차례 좌욕을 이어가야 했다. 마치 성벽이 무너지지 않도록 여기저기 보수 공사를 하는 것처럼, 하루 일과는 끝없는 예방과 관리로 채워졌다. 그러나 아무리 공을 들인다 해도, 고용량 항암제가 남긴 흔적을 막아낼 수 있을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2012년 5월 27일, 주일 아침. 진단을 받은 지 꼭 201일째 되는 날이었다. 무균실 안은 세상과 단절된 작은 섬 같아서, 예배를 드리러 갈 수 없는 답답함이 마음을 짓눌렀다. 그러나 그 아쉬움을 대신하듯, 한 줄기 햇살 같은 소식이 병실로 찾아왔다. 아들이 군에서 전역신고를 마쳤다는 소식이었다.


잠시 후 휴대전화 화면에는 대대장이 직접 남긴 메모와 함께 아들과 찍은 사진이 도착했다. "건강하게, 성실하게 아드님이 군 생활을 잘 마쳐 주어서 고맙다는 대대장의 인사말이었다." 짧은 문장이었지만, 그 안에는 지난 세월의 무게와 아들의 노고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전차부대라는 거친 환경 속에서도 꿋꿋이 버텨내고, 마침내 군 생활을 무사히 마쳤다는 증표였다.

아내는 그 문자를 읽으며 눈시울을 붉혔다. 늘 고통 앞에서도 눈물을 보이지 않던 그녀였지만, 자식 이야기를 들을 때만큼은 마음의 빗장이 쉽게 풀렸다. 혹독한 훈련과 규율 속에서 하루하루를 견뎠을 아들이 이제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무사히 돌아왔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대견하고 자랑스러웠던 것이다.


그날 오후, 아들은 교회 예배를 드린 뒤 곧장 병원으로 오겠다고 했다. 무균실 밖에서라도 엄마 얼굴을 보고 싶다는 마음이 절절히 전해졌다. 작은 화면 속 글자 몇 줄이었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깊은 위로이자 희망의 증거였다. 닫힌 문 너머로도 전해져 오는 아들의 발걸음은, 무균실 속의 답답한 공기를 잠시나마 환하게 밝혀 주는 햇살과도 같을 것이다.


그러나 아내는 전날 맞은 고용량 항암제의 여파로 아침부터 정신이 혼미했다. 마치 안개가 짙게 내려앉은 숲길을 걷는 듯, 현실과 꿈의 경계가 흐려지고 착각이 잦아졌다. 뚜렷하게 잡히지 않는 의식은 그녀를 점점 낯선 세계로 이끌어 갔다.


그럼에도 오전 11시 반, 예정된 두 번째 멜팔란이 주입되었다. 투여 시간은 고작 30분 남짓이었으나, 그 안에는 무겁고 차가운 기운이 가득했다. 이어서 수액과 이뇨제가 몸속으로 흘러들었다. 점심 식사가 나왔지만, 그녀는 졸음에 겨우 몇 숟가락만 뜨다 수저를 놓았다. 눈꺼풀은 돌처럼 무거웠고, 입맛은 이미 멀리 달아나 있었다.


다행히 체온과 혈압은 정상을 유지했지만, 맥박이 빠르게 뛰어 심전도 검사가 이어졌다. 가느다란 선 위에 요동치는 파형은 그녀의 고단한 몸과 마음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했다.


저녁 무렵, 무균실 문 앞에 두 아이가 섰다. 군에서 막 전역한 아들과 함께 온 딸이었다. 출입은 금지되어 있었지만, 아직 백혈구가 남아 있던 시기였고, 무엇보다 아들의 전역날이었기에 병원은 잠시 예외를 허락했다. 무균실로 잠깐 들어와 얼굴을 마주한 그 짧은 순간, 병실 안의 공기는 눈물로 젖어들었다. 아내가 누워있는 침대는 몸의 상체 부분이 비닐로 막혀있는 상태였고, 그렇게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아내는 아들을 보자마자 한숨처럼 속마음을 내비쳤다. "맛있는 음식이라도 해주고 싶다…" 그러나 손끝 하나 움직일 힘조차 없는 현실 앞에서 그 바람은 눈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고통과 통증 앞에서는 이를 악물고 울지 않던 그녀였지만, 가족 앞에서는 언제나 연약한 눈물샘이 먼저 열렸다. 그것은 슬픔이 아니라, 사랑이 흘러넘친 흔적이었다. 혼미한 정신에서도 아들을 보고는 선명해졌었다.


며칠이 지나자 항암제의 부작용이 하나둘씩 더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잔물결처럼 가볍게 스쳐 지나가는 듯 보였지만, 이내 파도가 되어 그녀를 덮쳤다. 구토와 변비, 그리고 현실과 꿈을 가르는 선이 흐려지는 정신의 혼미까지…. 약물로 어느 정도 막아낼 수는 있었지만, 그것은 마치 비에 젖은 우산을 잠시 펼쳐 놓은 것과 같았다. 방울은 흘러내려도 빗줄기 자체를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나는 아내보다도 내가 더 두려웠다. 그녀는 묵묵히 고통을 견뎌냈지만, 옆에서 지켜보는 나는 매 순간 불안에 휩싸였다. 이 부작용들이 어디까지 번져나갈지, 또 얼마나 무겁게 우리를 짓누를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발밑에서 자꾸만 흔들리는 땅 위에 서 있는 듯한 기분, 언제 무너져 내릴지 모르는 불안이 내 마음을 잠식해 갔다.


그리고 마침내, 내일 아침이면 조혈모세포 이식을 한다. 멜팔란으로 모든 것을 무너뜨려 혈액 속 요소가 사라진 지금이 바로 그 시점이었다. 오래도록 기다려온 날, 그러나 막상 눈앞에 닥치니 기대보다 긴장이 더 크게 밀려왔다.


냉동고 깊숙이 잠들어 있던 조혈모세포가 무사히 해빙되어 다시 생명의 강을 흐르게 할 수 있을까. 얼어 있던 씨앗이 제대로 깨어나 뿌리를 내리고, 메마른 땅 위에 새싹을 틔워줄 수 있을까. 그것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식이란 단순한 시술이 아니라, 작은 가능성 하나에 모든 희망을 걸어야 하는 모험과 같았다.


성공을 보장받을 수 없는 과정이기에,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이미 거기서 멈추어 있었다. 더는 손댈 수 없는 영역 앞에서 우리는 그저 기다려야 했다. 눈을 감으면, 어둠 속에서 가느다란 빛을 더듬듯 마음속 기도만이 남았다. 내일의 그 순간, 조용히 기적이 깃들기를 바랄 뿐이었다.


입원한 뒤로 나는 새벽이 밝아올 때마다 원내 교회로 발걸음을 옮겼다. 병원 복도의 불빛은 희미했고, 고요한 공기는 차갑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 길을 걸을 때마다 마음속에서는 늘 같은 기도가 흘러나왔다. 이식이 무사히 성공하기를, 아내가 다시 걸음을 떼어 세상으로 나서기를, 나아가 투석에 묶여 있던 신장까지 회복되기를…. 그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소망이자 간절한 외침이었다.


그러나 기도의 끝마다 찾아오는 깨달음은 같았다. 이 모든 것은 사람의 손을 벗어난 영역이라는 것. 의사의 기술도, 약의 힘도, 나의 정성도 그 문턱을 완전히 넘게 할 수는 없었다. 마치 바다 위에 작은 배 한 척 띄운 채, 풍랑이 잔잔해지기만을 기다리는 심정이었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 하나님께 마음을 온전히 내어 맡기는 것이었다.
나는 눈을 감고 속삭였다.


오, 하나님. 제발 도와주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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