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과 두려움이 교차하는 무균실의 나날
2012년 5월 29일, 우리는 반년 넘게 기다려온 기적의 문 앞에 서 있었다. 조혈모세포 이식, 그 운명의 날이 마침내 다가온 것이다. 병의 진단을 받은 지 203일째, 하루하루를 버텨온 시간이 이 날을 향해 흘러왔다는 사실이 숨결처럼 다가왔다. 그러나 그 아침, 체중계에 올라선 아내의 몸무게는 전날보다 겨우 0.5kg 늘어난 상태였다. 금식으로 시작하는 하루, 물만 조금 입에 댈 수 있을 뿐이었다. 긴 기다림 끝에 마주한 아침이었지만, 그녀의 몸은 이미 많은 것을 버텨온 흔적을 고스란히 안고 있었다.
밤새 아내는 온몸이 힘들어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고통을 달래기 위해 새벽녘 또다시 진통제와 구토 방지제를 맞으며 하루를 시작해야 했다. 오전 아홉 시, 간호사가 준비를 마쳤다. 곧 전문 간호사가 얼려 두었던 조혈모세포를 증류수에 중탕으로 녹여 천천히 아내의 혈관으로 흘려 보냈다. 반년 넘는 기다림 끝에 맞이한 순간은 겨우 20 분 남짓, 준비 과정까지 합쳐도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았다. 긴 시간의 고통에 비해 이식은 너무도 짧았고, 그 짧음이 오히려 허무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안도의 한숨이 곧 따라왔다. 다행히도 아내는 특별한 부작용 없이 잘 견뎌냈고, 치솟았던 혈압도 이내 안정되었다.
이식이 끝나자, 이제 남은 것은 단순했다. 감염만 막아낸다면, 잘만 버틴다면, 3주 후에는 무균실을 나서 퇴원도 가능하다고 했다. 의사들의 말은 조건부 희망이었지만, 나는 믿었다. 참을성이 많고 의지가 강한 아내라면 반드시 해낼 것이라고. 그러나 금식 뒤의 허기는 가혹했다. 점심이 나왔지만 아내는 숟가락을 들 힘조차 없었다. 내가 데워 건넨 식빵 두 조각과 멸균 우유가 그날의 유일한 끼니가 되었다. 마른 목구멍으로 겨우 넘기는 그녀의 모습은 안쓰럽고도 애달팠다.
밤이 되자 심장 체크 기계를 떼어내고 이뇨제를 맞았다. 몸이 부어 불편하다며 다시 진통제를 맞아야 했다. 눕는 것조차 힘들다며 쇼파에 앉아 눈을 감고 버티던 아내 곁에서 나도 지쳐 깜빡 잠들었다. 깨어보니 그녀는 어느새 혼자 힘겹게 침대에 올라가 있었다. 자신이 더 아프면서도 나를 깨우지 않으려는 그 마음이 전해져 가슴이 먹먹했다.
다음 날 아침, 투석이 기다리고 있었다. 전날보다 조금은 나아 보였지만 네 시간을 버텨내는 동안에도 두 번이나 진통제를 맞아야 했다. 입으로는 아무것도 삼키지 못한 채, 하루 종일 매달린 영양 수액만이 아내의 몸을 지탱해 주었다. 저녁 무렵에는 백혈구가 자라나기를 바라며 촉진제를 맞았다. 그러나 몸은 여전히 무겁고, 소변은 잘 나오지 않았으며, 고관절과 어깨는 쑤셨고 속은 타들어가듯 쓰렸다. 바깥은 여름의 초입임에도 한 여름을 방불케 하는 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지만, 아내는 두꺼운 담요를 덮은 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항암제의 후폭풍은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사흘째, 목은 따갑고 속은 쓰려 음식은 전혀 삼킬 수 없었다. 무균실 안에서는 더 이상 함께 식사할 수도 없었다. 회진에서 교수와 의료진은 상태가 비교적 양호하다며 열흘쯤 지나면 무균실을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러나 그 말이 마음 깊이 와 닿지는 않았다. 검사 수치는 떨어지고 있었고, 몸은 이미 한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희망이라는 말은 어쩌면 환자의 마음을 붙잡기 위한 형식적인 위로일 수도 있었다.
그다음 날도 투석은 이어졌다. 시작 전 맞은 진통제는 중간에 또 한 번 필요했다. 점심 식사는 간호사의 착오로 취소되었고, 내가 건넨 복숭아 통조림 두 조각조차 아내는 삼키지 못했다. 입안은 헐어 있었고, 목은 불에 덴 듯 따가웠다. 음식은 물론 물조차 넘기지 못하는 모습은 보는 이의 마음까지 메마르게 했다.
그날 밤, 아내는 온몸이 아프다며 신음했다. 열은 서서히 올라갔고, 손등에 닿는 체온은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분주히 드나들었지만, 나는 무력하게 그 곁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아내가 더는 버티지 못할까 두려워 가슴은 쉼 없이 쿵쿵 뛰었다.
닷새째 아침, 열은 잠시 내려가 정상처럼 보였지만 통증은 여전했다. 혈액 속 모든 수치가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었다. 병균 하나만 침범해도 치명적인 순간이 된다. 밤이 되자 다시 열이 치솟았고, 무균실 안은 불안과 긴장으로 숨 막혔다. 모든 것이 흔들리는 그 순간에도 아내는 묵묵히 고통을 견뎌내고 있었다.
엿새째, 교수는 "일주일만 더 잘 버티라"고 말했다. 그 말은 희망이자 동시에 막막한 주문처럼 들렸다. 하루하루가 끝없는 고비로 이어졌고, 그 고비를 지나야만 또 다른 하루를 만날 수 있었다. 아내는 매일 밤 고통과 두려움 속에서 눈을 감았고, 나는 곁에서 한숨을 몰래 삼키며 날을 새웠다.
일주일째, 투석을 마치고 돌아온 아내의 체온은 38도까지 치솟았다. 배가 아프다 했고, 검사는 끝없이 이어졌다. 진통제도, 모르핀도 통증을 다스리지 못했다. 물조차 삼키지 못하는 모습 앞에서 나는 그저 무력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아내는 숨을 고르며 겨우겨우 눈을 감았지만, 그 고단한 모습은 차라리 깊은 상처처럼 내 가슴에 새겨졌다.
창밖은 이미 한여름의 열기로 가득했다. 햇살은 뜨겁게 쏟아지고, 바람마저 숨이 막히듯 뜨거웠다. 그러나 무균실 안의 아내는 춥다며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당겼다. 그럼에도 무균실 안은 너무 더운데, 감염 위험 때문에 에어컨조차 살짝 켤 수 없는 방 안은 답답하고 무거운 공기에 갇혀 있었다. 그녀가 이불 속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무력감과 두려움 속에서 또 하루를 지새웠다.
그 와중에 오랜만에 집에 있는 아이들과 통화를 했다. "잘 지내고 있다"는 짧은 대답이 전부였지만, 그 말 너머로 감춰진 빈자리가 자꾸만 마음을 건드렸다. 빨래는 잘 하고 있는지, 끼니는 챙겨 먹는지, 집은 어지럽혀져 있지는 않은지… 수많은 걱정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아내 곁을 지키느라 아이들에게 다가서지 못하는 아버지의 마음은 더 무겁게 가라앉았다.
조혈모세포 이식은 끝났지만, 진짜 싸움은 이제부터였다. 면역력이 사라진 하루하루는 마치 벼랑 끝에 선 듯 위태로웠다. 그녀는 통증과 열, 두려움 속에서도 묵묵히 버텼고, 나는 그 곁에서 무력한 눈으로 바라보며 무균실의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기다림은 희망이자 동시에 두려움이었다. 그러나 끝내 남은 것은 하나였다. 그녀의 인내와 의지가 우리 가족의 삶을 지탱하는 등불로, 세월을 넘어 꺼지지 않을 힘으로 영원히 남으리라는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