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균실의 고요 속에서 다시 피어난 희망
2012년 6월 6일, 현충일.
맑은 하늘 아래 태극기가 바람에 나부꼈지만, 병원 안은 적막에 잠겨 있었다. 휴일의 정적은 더 짙었고, 복도에는 발자국 하나 들리지 않았다.
무균실의 공기는 차가웠다. 링거액이 떨어지는 '톡, 톡' 소리와, 산소 기계의 낮은 숨소리만이 아내의 곁을 지켰다. 창문으로 스며든 햇살이 하얀 커튼에 머물렀다가 힘없이 스러졌다. 유리벽 너머의 세상은 평화로워 보였지만, 이 안에서는 숨소리조차 조심스러웠다.
그날은 아내의 조혈모세포 이식 후 여덟째 날이었다.
밤새 열이 치솟아 해열제를 맞았고, 부어오른 장 때문에 항생제도 한 병 더 투여받았다. 하루 한 병씩 맞는 약이 이제는 마치 일과처럼 되어 있었다. 약물이 몸속으로 들어갈 때마다 아내의 팔에는 새로운 멍이 생겼다. 가느다란 혈관이 한 번에 잡히지 않아 간호사가 바늘을 다시 꽂을 때마다, 나는 그 작은 찔림에도 가슴이 움찔했다.
오전의 회진은 없었다. 대신 주치의가 조용히 병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흰 가운의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마저 들릴 만큼 고요했다. 그는 아내의 복부를 살살 눌러보다가 왼쪽을 누르고 손을 떼는 순간, 아내가 얼굴을 찡그렸다. "여기가 많이 아프죠?"
짧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주치의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장을 쉬게 해야겠어요. 금식입니다."
사실상 며칠째 거의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있었다. 항암제의 부작용으로 장이 손상되었고, 혈액 속 알부민이 낮아져 수분이 혈관 밖으로 빠져나가 폐나 복부, 손발로 번지고 있었다. 듣는 동안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가 떠난 뒤에도 한동안 말이 나오지 않았다.
밤새 아내는 설사와 복통에 시달렸다. 간헐적으로 울부짖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등을 다독였다. "괜찮아요, 조금만 참아요." 하지만 그 말조차 공허했다. 목이 마르다고 하면서도 물 한 모금조차 삼키지 못했다. 입안이 헐어 물이 닿을 때마다 비명을 삼켰다. 나는 젖은 솜으로 그녀의 입술을 적셔주며 "이제 좀 괜찮아?" 하고 물었지만, 그녀는 대답 대신 눈만 감았다. 무력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새벽이 밝아오자 투석 준비가 시작됐다. 네 시간 동안 이어지는 투석은 늘 고되고 지루했다. 기계의 바늘이 혈관을 뚫고 들어갈 때마다 아내의 몸이 살짝 움찔했다. 나는 그 손끝의 떨림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식사는 여전히 취소되었고, 진통제 두 대를 맞은 후 복부 엑스레이를 찍고 병실로 돌아왔다. 혈압은 정상인데 맥박이 빠르다는 말이 들렸다. 오후에 감염내과 여의사가 들어와 혈액검사 결과를 전했다.
"왼쪽 가슴의 히크만관에서 균이 나왔습니다. 아마 교체해야 할 겁니다."
그 말에 아내의 얼굴이 굳었다. 이미 한 번 시술을 받았던 터였다. 관이 혈관에 접착되어 있어 제거할 때 통증이 심하다고 했다. "마취를 해도 다른 부위보다 훨씬 아플 겁니다." 여의사는 조심스럽게 말을 맺었다. 아내는 잠시 눈을 감더니, 고개를 돌렸다. 아무 말 없이 흐르던 눈물이 베개를 적셨다. 나는 손을 내밀었지만, 차마 그 손을 잡지 못했다. 그저 멀찍이 서서 숨을 고를 뿐이었다.
밤이 깊어질 무렵 간호사가 들어와 두 가지 소식을 전했다.
"관뿐 아니라 대변에서도 세균이 나왔어요. 항생제를 두 종류 써야 합니다."
이제 모든 접촉 시 비닐가운과 장갑을 착용해야 했다.
아내는 가슴에 달린 펌관을 또다시 교체해야 한다는 말에 고개를 떨궜다. 그 순간 울음이 터졌다. 목을 움켜쥐며 흐느끼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저 조용히 어깨를 감싸 안았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음 날 새벽, 인턴이 피를 뽑으러 왔다. 혈관이 보이지 않아 결국 깊은 동맥에서 피를 채취했다. 바늘이 들어가자 아내의 팔이 떨렸다. 손끝을 꼭 쥐며 숨을 참는 모습이 얼마나 애처로웠는지 모른다.
아침 9시 회진에서 교수님은 말했다.
"세균이 발견되긴 했지만, 항생제로 충분히 잡을 수 있을 겁니다."
그 말 한마디에 내 어깨가 툭 하고 내려앉았다.
그날 오후 항생제가 투여되자 놀라운 변화가 찾아왔다.
해열제를 쓰지 않았는데도 체온이 36.5도로 떨어졌다. 주치의가 웃으며 말했다.
"이제 백혈구가 살아나고 있어요. 이식이 잘 되고 있습니다."
아침 혈액검사 결과, 백혈구 300, 호중구 160. 며칠 전까지만 해도 '0'이던 수치였다. 숫자는 작았지만, 아내에겐 기적이었다.
6월 8일, 아내는 오랜만에 흰 죽을 조금 삼켰다. 통증이 덜해진 덕분이었다. 투석 중에도 진통제를 반납할 만큼 상태가 나아졌다. 나는 병원 근처를 두 시간 넘게 헤매다 순댓국을 사 왔다. 그릇을 열자 김이 피어올랐다. 단 몇 숟가락이라도 먹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아내는 몇 번 젓가락을 움직이다 내려놓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그 몇 숟가락이 살아 있으려는 몸의 의지였으니까.
며칠 뒤, 백혈구는 1500, 호중구는 1050으로 올랐다.
하지만 혈소판은 떨어져 수혈을 해야 했다. 6월 10일, 이식 후 12일째 되는 날이었다.
그날 밤 아내는 온몸이 쑤셔 잠을 이루지 못했다. 교수는 "혈액세포가 새로 만들어질 때 몸이 아플 수 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아내는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눈가에 맺힌 눈물이 천천히 흘렀다. 그건 슬픔이 아니라 몸이 다시 깨어나는 증거였다.
다음 날 아침 혈액수치는 백혈구 3100, 호중구 1540으로 크게 상승했다. 헤모글로빈은 낮았지만 면역력이 돌아오고 있었다. "이 속도라면 곧 무균실을 나갈 수 있을 겁니다." 주치의의 말이 마치 봄의 첫 새소리처럼 들렸다.
6월 11일, 이식 13일째 되는 날.
신장내과 교수는 투석을 주 2회로 줄이기로 했다.
"이대로라면 6월 말쯤엔 퇴원 가능합니다. 완전 관해 상태까지 갈 수 있을 겁니다."
그 말이 내 가슴속에 따뜻한 불빛처럼 스며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6월 12일, 입원 89일째 되는 날.
무균실에 들어간 지 19일 만에 벗어나는 순간이었다. 진통제와 영양주사도 모두 뺐다. 멸균식 대신 일반식이 나왔고, 식기는 차가운 스테인리스에서 따뜻한 플라스틱으로 바뀌었다. 작은 변화였지만, 세상으로 돌아오는 예행연습처럼 느껴졌다. 오랜만에 함께 치료받던 환자 두 분이 찾아와 손을 잡았다. "정말 잘 견디셨어요."
그 말에 아내는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참 오래, 내 마음에 머물렀다.
이식 전문 간호사가 마지막 점검을 마치며 말했다.
"모든 과정이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그 말에 아내는 눈을 감았다. 기계음이 멎은 병실에는 낯선 고요가 깃들었다. 그러나 이번의 침묵은 두려움이 아니라 회복의 징조였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빛'을 보았다.
그 빛은 고통이 끝난 자리에서 다시 피어난 생의 불씨였다.
죽음의 문턱에서 되돌아온 사람만이 품을 수 있는, 고요하고 단단한 빛이었다.
나는 그날의 눈빛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것은 살아 있다는 것, 그리고 사랑이 여전히 우리를 지탱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생의 기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