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병실에 스며든 초여름의 빛
무균실의 문이 다시 닫혔다. 모든 기계가 빠져나가며 드디어 자유를 얻었다고 믿었던 그 공간이, 불과 며칠 만에 또다시 격리의 방으로 바뀌었다. 아내의 변에서 세균이 검출된 것이 원인이었다. 다른 환자들에게 전염될 수 있다는 이유로, 의사들은 그 즉시 격리 조치를 내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예전처럼 무균실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그대로 생활을 이어가야 했다. 기계가 사라진 텅 빈 병실은 오히려 더 싸늘하게 느껴졌고, 문 앞에는 다시 '격리'표지판이 붙었다. 의료진은 "잠시만 이렇게 지내시면 됩니다. 수치가 안정되면 다시 완화될 겁니다."라고 말했지만, 그 말속의 '잠시'라는 단어가 얼마나 길어질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아내의 몸에는 여러 대의 기계가 연결되어 있었다. 심박을 측정하던 모니터와 산소호흡기, 영양 수액 라인, 그리고 24시간 연속 주입되던 진통제까지, 하나하나가 아내의 생명을 지탱해 주는 줄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 모든 장치들이 하나둘씩 제거되었고, 전자음으로 가득하던 병실은 순식간에 고요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동안 기계음에 묻혀 들리지 않던 아내의 호흡 소리가 이젠 유일한 생명의 신호처럼 들려왔다. 나는 그 숨결의 리듬이 조금만 달라져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기계에서 해방된 그날, 우리는 잠시 안도했다. 그러나 산소호흡기가 사라지고 나자, 기계 대신 보이지 않는 불안이 병실 안을 떠돌기 시작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균이 우리 곁에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무균실의 공기는 여전히 정화기를 통해 공급되었지만, 그 깨끗한 공기마저 왠지 냉랭하고 쓸쓸하게 느껴졌다. 창문은 단단히 닫혀 있었고, 햇살은 두꺼운 차단막을 통해 희미하게 들어왔다. 그 안에서 우리는 또다시 세상과 단절된 채 하루하루를 버텨야 했다.
이틀 뒤 아침, 채혈검사 결과가 나왔다. 간호사가 조심스레 결과지를 내밀었을 때, 나는 그 표정만으로도 결과가 좋지 않다는 걸 알아차렸다. 백혈구 수치는 1,600, 호중구는 900.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안정적이던 수치가 하루아침에 곤두박질쳤다. 담당의는 말끝을 조심스레 이어갔다. "다시 무균식으로 식단을 제한해야 합니다. 외부와의 접촉도 삼가시고요." 조리된 음식 외에는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고, 병문안은 일절 금지되었다. "다른 환자와는 절대 접촉하지 마세요."라는 말은 마치 병실 안의 공기마저 얼어붙게 하는 주문 같았다.
다음 날이면 아들과 딸이 병문안을 오기로 한 날이었다. 조금만 더 나아지면 얼굴을 마주하며 웃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는데, 또다시 '격리'라는 단어가 우리 앞을 가로막았다. 그날 밤, 아내는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복용하던 신경안정제를 바꿔 보았지만 약효는 없었고, 머릿속은 오히려 더 선명해졌다. 나는 침상 곁의 간이침대에 앉아 아내의 숨결을 세며 새벽을 맞았다. 한숨이 길어질 때마다 마음이 무너져 내렸고, 무표정한 병실의 벽은 점점 더 좁아지는 듯했다.
새벽녘이 되어 겨우 두세 시간 눈을 붙였을까. 아침이 밝자 간호사가 들어와 투석을 하러 갈 준비 했다. 그날은 유난히 어깨 통증이 심해 진통제를 두 번이나 맞아야 했다. 투석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입원 전검사실에 들러 심전도 검사를 마쳤다. 바늘과 전극, 줄에 묶인 몸으로 하루를 보내는 일이 이제는 일상이 되어 있었다.
오후가 되어 병실 문이 열리더니 낯선 의사가 들어왔다. 전담 교수님이 해외 학회 참석으로 자리를 비웠고, 종양내과 과장님이 대신 회진을 돈다는 설명이었다. 진료는 달라지지 않았지만, 의료진은 새 서류를 내밀었다. "교수급 진료에는 특진비가 부과됩니다. 동의서에 서명해 주세요." 하루 한두 번 회진만 하는 일인데도 그 하루의 얼굴값이 '특진비'라는 이름으로 붙는다는 사실이 서글펐다. 나는 펜을 든 채 한참을 망설였지만, 결국 서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병의 무게만큼이나 제도의 벽도 높고 차가웠다.
그래도 다행이었던 건, 그동안 아내를 정성껏 돌봐주던 전임강사님이 계셨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언제나 아내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었고, 작은 변화에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괜찮아요, 조금만 더 견뎌봅시다." 그 말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진심이었다. 그의 따뜻한 말투와 성실한 태도는 긴 병실 생활 속에서 아내에게, 그리고 나에게도 큰 힘이 되어 주었다. 세월이 흘러 그는 교수로 승진했지만, 마음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직함이 높아져도 환자를 대하는 태도는 한결같았고, 무엇보다 특진비조차 받지 않았다. 아마도 그 무렵 병원 정책이 바뀌어 특진비 제도가 사라졌던 덕분이겠지만, 그가 보여준 진심은 제도보다 따뜻했고, 규정보다 인간적이었다.
그 이후로 우리는 단 한 번도 특진비를 낸 적이 없었다. 그는 1년 반가량 해외연수를 다녀온 뒤에도 마치 자리를 비운 적이 없었던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돌아와, 처음 그날처럼 환한 얼굴로 아내 곁을 지켜 주었다. 그런 꾸준함과 성실함이 있었기에 우리는 13년이라는 긴 세월을 버텨낼 수 있었다.
며칠 뒤, 놀라운 변화가 찾아왔다. 백혈구 수치가 16,000, 호중구는 15,030까지 올랐다. 의료진은 "기적 같습니다."라며 미소를 지었지만, 나는 섣불리 기뻐하지 않았다. 헤모글로빈은 여전히 8.1로 낮았고, 혈소판은 39,000에 불과했다. 그래도 그날의 수치는 우리에게 오랜만에 찾아온 작은 희망의 불씨였다.
그날 오후, 병실에는 모처럼 웃음이 피어났다. 아들과 딸이 삼겹살과 부추전을 부쳐 들고 온 것이다. 퇴근하자마자 서둘러 준비했을 그 음식들은 병실 가득 고소한 냄새를 퍼뜨렸다. 지글지글 구워가지고 온 삼겹살과 따뜻한 밥 냄새, 그리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오랜만에 무균실의 공기를 바꾸었다. 아들은 고기를 작게 잘라 아내의 입에 넣어주었고, 딸은 부추전을 접시에 담으며 "엄마, 한 입만 드셔봐요."라고 말했다. 그 한입이 그렇게 귀하고, 눈물 나도록 고마웠다.
잠시 후 형님 내외가 들렀다. 장모님이 말기암으로 투병 중이라며 마음이 편치 않다고 했지만, 그래도 일부러 시간을 내 병문안을 왔다. 형님은 삼겹살을 맛보며 "이게 병실에서 먹을 음식이냐."며 웃었고, 그 웃음이 병실 안의 공기를 한순간 부드럽게 바꿔 놓았다. 떠나기 전 형님 내외는 봉투를 조용히 내려놓고 아무 말 없이 돌아섰다. 그 뒷모습을 보며, 나는 형제라는 이름이 얼마나 깊은 위로인지 새삼 깨달았다.
입원 93일째 토요일 아침. 창밖의 햇살은 뿌옇게 퍼졌고, 유리 너머로 보이는 하늘에는 엷은 구름이 걸려 있었다. 병원은 주말이라 유난히 고요했다. 복도를 오가는 청소기의 소리, 엘리베이터의 문 열림 음, 간헐적인 발자국 소리만이 그 적막을 채우고 있었다. 그날도 아내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전날 교체한 신경안정제와 진통제 덕분에 통증은 덜했지만, 불면은 여전했다. 오전 투석을 마친 뒤 휠체어를 타고 1층 정원으로 나갔다. 유리벽 너머로 보이는 하늘은 유난히 높았고, 바람은 부드러웠다. 코스모스 몇 송이가 바람결에 흔들리고 있었다. 아내는 눈을 감고 한참 동안 그 바람을 느꼈다. 환자복 위로 스며드는 햇살이 그녀의 얼굴을 따뜻하게 감쌌다.
병실로 돌아와 막 잠이 들려던 찰나, 문이 열리며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오랜 친구였다. 아내는 비몽사몽 간에도 몸을 일으켜 "왔어?" 하며 웃었다. 친구는 얼갈이김치와 된장찌개, 물김치를 직접 만들어 와 점심 반찬으로 내놓았다. 그릇의 뚜껑을 여는 순간, 병실 안에는 고향의 냄새가 퍼졌다. 아내는 한 숟가락을 떠서 천천히 씹었고, 음식의 맛보다 그 속에 담긴 정성과 온기가 더 짙게 전해졌다. 두 사람은 손을 꼭 잡고 오랜 이야기를 나누었다. 말보다 눈빛이 더 많은 이야기를 전했다. 병실의 공기마저 따뜻하게 변해갔다. 나는 멀찍이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오랜 투병의 시간을 버티게 해 준 것은 결국 이런 사랑과 우정의 끈이었다.
그날 오후, 창문 사이로 들어온 햇살이 벽을 따라 길게 드리워졌다. 침상 위의 그림자가 천천히 이동하며 시간을 알려주었다. 그 빛을 바라보다 문득 깨달았다. 병의 크기보다 더 큰 것은 마음의 힘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건 다름 아닌 사랑하는 사람들의 온기라는 것을.
아내는 창문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오늘 하늘이 참 맑네요. 병실인데도 여름 냄새가 나요." 나는 그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창 너머의 하늘에는 흰 구름 한 줄이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그 구름은 마치 아내의 고통을 조금씩 데려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날 밤, 아내는 오랜만에 깊은 잠에 들었다. 숨결은 고르고 평온했다. 나는 그 옆에서 하얀 천장을 바라보았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이렇게 잠시라도 고요히 쉴 수 있는 시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그 밤의 정적은 마치 한 편의 기도처럼 병실 안을 감싸고, 그 안에서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서로의 존재를 느끼며 밤을 견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