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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바람은 유난히 따뜻했다

바람은 잠시였고, 열은 오래 남았다

by 시니어더크


병원 4층 옥상공원으로 올라섰을 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스쳐온 바람이 소독약 냄새를 밀어내고 생의 기운을 불어넣었다. 한강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희고 부드러운 햇살을 등에 업고 병실의 답답함을 말끔히 씻어냈다. 아내는 휠체어에 앉은 채 잠시 눈을 감았다. 머리카락이 바람에 살짝 흔들렸고, 마른 입술 사이로 희미한 숨결이 새어 나왔다. 오랜 병상 끝에 처음 맞는 바람이었다.


그때였다. 옥상 한쪽 벤치에서 다른 환자와 보호자가 나란히 앉아서 족발을 먹고 있었다. 고소한 냄새가 바람결을 따라 퍼졌다. 아내는 그 냄새를 맡더니 아이처럼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나도 족발이 먹고 싶네요."
그 한마디가 바람보다 먼저 내 가슴을 스쳤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고, 그 미소가 바람에 녹아 흩어졌다. 한참 동안 그렇게 바람 속에 앉아 있다가 병실로 돌아왔다. 침대에 누운 아내 곁에서 나는 조용히 결심했다.


"족발 사 올게요."
그 말을 남기고 나는 병원 문을 나섰다. 저녁 무렵의 둔촌시장은 사람들의 발소리로 가득했고, 좁은 골목마다 어묵 국물 김이 피어올라 저녁의 냄새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나는 미니족발 한 팩과 방울토마토, 노란 참외, 그리고 아내가 좋아하던 메밀전병을 샀다. 강원도에서 나고 자란 그녀에게 메밀전병은 어린 시절의 맛, 고향의 냄새였다. 장바구니가 팔목을 누르는 무게가 이상하게 따뜻하게 느껴졌다.


병실로 돌아오니 해는 이미 기울어 있었다. 간호사가 항생제 병을 떼어내고 있었고, 식판 위의 밥은 식어 있었다. 아내는 숟가락을 들지 않았다. 대신 내가 사 온 메밀전병을 조심스럽게 한입 베어 물었다. 얇은 전병 사이로 매운 무채 향이 퍼질 때, 그녀의 눈빛이 아주 잠시 흔들렸다. 그 미세한 떨림이 그날의 저녁을 고요하게 채워주었다.


다음날 새벽, 나는 예배를 다녀왔다. 병실 문을 열자 아내는 이미 세수를 마치고 화장을 하고 있었다. 병색이 여전했지만, 거울 앞에서 붓끝이 움직일 때마다 얼굴은 다시 삶의 표정을 찾아갔다. 편의점에서 사 온 햇반 하나와 캔땅콩, 친구가 가져온 김치찌개를 데워주었지만, 작은 햇반의 절반도 넘기지 못했다. 창밖의 햇살은 투명했고, 유리창 너머로 바람이 흔들렸다. 우리는 방울토마토와 쌀과자, 물 한 병을 챙겨 다시 옥상공원으로 올라갔다. 잠시 동안 세상은 병실 밖의 평온한 오후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간호사의 전화가 울렸다. 혈액수치가 떨어져 수혈을 해야 한다는 통보였다. 병실로 돌아오니 인턴이 채혈을 준비하고 있었다. 얇은 관을 타고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오후 세 시, 적혈구 두 팩의 수혈이 시작되었다. 아내는 피가 천천히 몸속으로 스며드는 동안 눈을 감은 채 숨을 고르며 조용히 견뎠다. 저녁에는 된장찌개를 조금 먹고 잠이 들었다. 밤중 혈압은 146/95. 숫자는 차가웠지만, 그 속엔 내 불안의 그림자가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이식 후 스무 번째 날, 6월의 공기는 눅눅했다. 전날 맞은 이뇨제 탓인지 아침 소변량이 늘었지만, 일어나자마자 윗배가 아프다고 했다. 복부 CT와 엑스레이를 찍고 돌아오니 그녀의 얼굴빛이 누렇게 질려 있었다.


나는 잠시 병실을 처형에게 맡기고 집으로 향했다. 식탁 위에는 라면 두 그릇이 놓여 있었다. 김치 한 접시와 젓가락 두 벌, 그 단출한 풍경이 이상하게 쓸쓸했다. 아들과 딸이 점심으로 라면을 끓여 먹고 있었던 것이다. 부모의 빈자리는 언제나 식탁 위에서 가장 먼저 드러난다. 저녁에 병원으로 전화를 걸자, 종양내과 과장인 교수님이 맹장이 의심된다며 금식 중이라는 말을 전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러나 몇 시간 뒤 통증이 가라앉아 수술은 피할 수 있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제야 숨이 조금 놓였다.


이튿날 오후 두 시, 아내는 투석을 받았다. 소변이 잘 나와 세 시간 만에 끝났다. 그러나 백혈구 수치는 더 떨어졌다. 저녁에는 촉진제를 맞고, 밤에는 37.5도의 열이 올랐다. 나는 청소를 마치고 속옷을 챙겨 병원으로 향했다. 잠실나루역 김밥집에서 유부초밥과 김밥 두 줄을 사 와 처형과 함께 나눠 먹었다. 처형이 돌아간 뒤 나는 아내를 휠체어에 태워 병원 상점가를 천천히 돌았다. 낮에는 괜찮았지만 해가 기울면 통증이 몰려왔다. 밤마다 손끝이 저리다며 손을 내밀면, 나는 아무 말 없이 그 손을 주물렀다. 손끝 아래로 느껴지는 미세한 맥박이 오늘 하루를 버텨낸 증거처럼 느껴졌다.


며칠 뒤, 해외 세미나에서 돌아온 교수님이 말했다. "이번 주 토요일 퇴원 목표로 합시다."
그날이면 입원 100일째이다. 석 달 열흘. 그 시간 동안 아내는 수없이 고비를 넘었고, 나는 그 곁을 떠나지 못했다. 그러나 혈액수치는 여전히 불안정했다. 백혈구 9100, 혈소판 2700. 숫자는 매일 출렁거렸고, 희망도 함께 흔들렸다. 완치란 말은 이 병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재발이 멈추고, 관해가 오래 이어지길 바랄 뿐이었다.


6월 21일, 아침 채혈 결과는 다시 나빠졌다. 그녀는 혈소판 수혈을 받은 뒤, 퇴원 후 쓸 모자와 비니를 사러 병원 지하 상점에 들렀다. 암환자에게 모자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세상의 시선을 막아주는 갑옷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 작은 천 조각이 왜 그렇게 비쌀까. 나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언젠가 형편 어려운 환자들에게 이런 모자를 나눠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일일 거라고.


그날 밤, 체온은 38도를 넘기더니 새벽에는 39도까지 올랐다. 간호사는 부작용이 걱정된다며 해열제를 자주 쓸 수 없다고 했다. 약 대신, 기다림뿐이었다. 아내는 미열에 달아오른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참을 만해요."
그 한마디가 내 마음 깊은 곳을 흔들었다. 그 미소 속에는 말로 다 못한 고통이 숨어 있었다. 나는 서둘러 물수건을 식혀 이마에 얹었다. 차가운 감촉이 닿자마자 금세 뜨거워졌다.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수건은 다시 데워졌고, 나는 또 물을 갈아 손끝으로 팔과 다리, 몸을 닦아주었다. 뜨거운 숨결과 물냄새, 체온이 뒤섞인 병실의 공기가 한층 더 무거워졌다. 그렇게 밤은 길고 느리게 흘렀다. 수건을 적시고, 짜고, 덮어주는 그 반복된 동작은 어느새 기도가 되어 있었다.
나는 그녀의 이마를 감싸며 속으로 되뇌었다.
"제발, 이 열이 조금만 식어다오. 이 고통이 조금만 가벼워다오."
그 순간 병실의 불빛조차 흔들리며 함께 기도하는 듯했다.


입원 100일째 토요일, 퇴원은 미뤄졌다. 열은 여전히 38도를 넘었다. 잠시 짬을 내 올림픽공원을 걸었다. 숨이 차올랐고, 나무들은 바람에 흔들렸다. 병동에서는 간병인이 먼저 쓰러지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돌아오니 그녀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오렌지를 깎아주었지만 혀 옆의 상처가 아파 삼키지 못했다. 밤에는 열이 39.5도까지 치솟았다. 물수건을 수십 번 갈아 이마에 얹었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그녀는 겨우 잠들었고, 나는 그 옆에서 조용히 숨을 고르며 앉아 있었다.

며칠이 지나도 열은 내리지 않았다. 설사가 이어졌고, 감염 위험으로 혼자 격리실을 썼다. 의사도 원인을 찾지 못했다. 퇴원은 멀어졌고, 오직 열이 꺼지기만을 바랐다.

6월 26일, 입원 103일째.

아침 공기가 싸늘했다. 나는 아내를 휠체어에 태워 다시 옥상공원으로 올랐다. 한강변의 바람이 세차게 불어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아내는 그 바람 속에서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 눈빛 속에는 부러움과 그리움이 섞여 있었다. 크레아티닌 수치는 3.43, 정상의 세 배가 넘었다. 투석시간은 다시 늘었고, 항생제는 세 병으로 늘었다. 그러나 열은 여전히 38도였다. 약을 먹고 땀을 흘려도 금세 다시 오르내렸다.

그날 밤, 나는 보조침대에 엎드려 일기를 썼다.


오늘도 아내의 몸은 불덩이처럼 뜨겁다. 하지만 아내의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은 꺼지지 않은 등불처럼 타오르고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불빛이 꺼지지 않도록 옆에서 바람을 막아주는 일뿐이다. 병실의 희미한 불빛이 천장에 번져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그 불빛이 사라질까 봐 조심스레 그녀의 손을 감싸 쥐었다. 차가운 손끝에서도 미세한 맥이 느껴졌다. 그 작고 약한 온기 하나가 내 삶을 붙잡고 있었다. 지금도 나는 그 온기를 잊지 못한다. 바람이 불던 그날의 오후, 그녀의 미소와 함께 스쳐간 따뜻한 바람이 아직도 내 마음속에서 식지 않고 타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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