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생을 다시 품다
병원 창문 밖으로 아침 햇살이 천천히 흘러들었다. 베이지색 블라인드 사이로 스며든 빛은 처음에는 희미한 숨결처럼 머물렀지만, 시간이 흐르자 조금씩 선명해져 병실 벽을 타고 내려왔다. 햇살이 이불 끝자락에 닿을 때마다, 마치 긴 겨울 끝에 처음 맞는 봄빛처럼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그 빛은 단순한 햇살이 아니었다. 지난날의 어둠을 밀어내고 다시 일어설 힘을 건네주는, 작은 희망의 조각 같았다.
그날은 2012년 7월 1일, 주일 아침이었다. 입원 108일째, 다발골수종이라는 병명을 들은 지 236일째 되는 날이었다. 숫자는 냉정했지만, 그 안에는 헤아릴 수 없는 눈물과 기도가 스며 있었다. 매일이 전쟁 같았다. 절반은 치료와 주사로, 나머지 절반은 두려움과 싸움으로 흘러갔다. 새벽마다 아내의 숨결을 확인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작은 기침에도 놀라 밤을 지새웠다. 그러나 그날만큼은 달랐다. 창문 밖 하늘은 유난히 맑았고, 바람은 병실 안을 부드럽게 감싸며 속삭이는 듯했다.
"조금만 더 버텨요. 이제 곧 끝이 보여요."
나는 창문을 열고 그 바람을 맞았다. 병원 복도에서 풍겨오던 소독약 냄새조차 희미하게 느껴졌다. 메말라 있던 마음 한구석에 오랜만에 생명의 기척이 스며들었다. 108일의 싸움 끝자락에서 나는 처음으로 '희망'이라는 단어를 믿고 싶어졌다.
그날은 딸의 생일이기도 했다. 작년 이맘때만 해도 네 식구가 식탁에 둘러앉아 미역국을 먹으며 웃었다. 그러나 올해는 병실에서 그날을 맞았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던 국물 냄새와 아내의 웃음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남아 있었지만, 그 기억은 병원 벽 너머로 멀어져 있었다. 창밖으로 햇살이 비쳤지만, 그 따뜻한 빛도 아내의 창백한 얼굴을 온전히 덮어주진 못했다. 그녀는 침대에 기대 누워 있었고, 나는 도시락 가방을 꺼내 반찬을 정리했다.
문득 미역국이 떠올랐다. 아내가 늘 정성껏 끓이던 그 국물. 대신 마음으로 끓일 수밖에 없었다. "오늘 생일이지? 미역국은 못 끓였지만 마음으로는 끓였단다." 전화를 걸며 말끝이 떨렸다. 잠시 후 딸의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빠, 걱정 마세요. 밥도 잘해 먹었어요."
그 짧은 한마디가 가슴 깊숙이 박혔다. 외로움보다 책임감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아이는 이미 스스로를 지킬 만큼 자라 있었다. 아내는 내 표정을 읽고 미소를 지었다.
"우리 딸, 의젓하죠?"
"응, 아주 잘 커줬어."
그녀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피곤한 얼굴 위로 잠시 평안이 스쳤다. 그날 병실 공기는 여전히 무겁고 고요했지만, 어딘가에서 작은 온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마음은 이어져 있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다시 살아가게 하는 힘이었다.
며칠째 오르던 열이 드디어 가라앉았다. 체온계의 숫자가 정상으로 돌아오자 나는 간호사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 말이 목을 막았다. 그러나 통증은 여전했다. 아침 식사 후에도 아내는 몸을 웅크렸고, 진통제를 맞고 나서야 표정이 조금 풀렸다.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샤워 한번 해볼까요?"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히크만관을 감싸며 따뜻한 물을 흘려보내자, 하얀 김이 피어올라 유리문이 뿌옇게 변했다. 그 안에서 그녀의 어깨가 이완되며 작게 말했다.
"정말 살 것 같아요."
그 말 한마디가 샤워실 가득 울렸다. 나는 수건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닦아주며 웃었다. "그래요, 조금씩 나아지고 있어요." 그날의 공기는 유난히 따뜻했다. 물기가 남은 피부 위로 햇살이 내려앉으며 병실은 잠시 숨을 고르는 듯했다.
오후가 되어 나는 말했다. "오늘이 딸 생일인데, 그냥 넘어가면 안 될 것 같아요."
그녀는 힘없이 미소 지었다. "그래요, 해줘요. 우리 애가 좋아하겠네요."
나는 천호역 현대백화점으로 달려가 케이크와 과일을 사고, 피자도 한 판 샀다. 사람들 사이를 지나며 오랜만에 느낀 자유의 공기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쇼핑백을 들고 나오자 하늘은 믿기 어려울 만큼 맑았다.
"이제 정말 끝이 보이려나."
나는 중얼거렸다. 마음속 어딘가에서 작은 희망이 움트고 있었다.
오후 두 시, 교회 예배를 마친 아들과 딸이 병실로 들어왔다. 작고 단정한 케이크 위에 초를 꽂고 불을 붙이자 노란 불빛이 반짝였다. "생일 축하합니다." 아이들의 노래가 병실의 하얀 벽을 부드럽게 흔들었다. 아내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울었다. 케이크를 자르는 딸과 아내의 손끝이 떨리자 나는 그 손 위에 내 손을 얹었다.
"괜찮아요, 이제 조금씩 좋아지고 있어요."
그날 병실은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공간이었다. 주사기와 링거, 항생제 냄새가 가득하던 그곳이 잠시나마 집안 식탁처럼 포근해졌다.
저녁 무렵, 아내를 휠체어에 태워 병원 정원으로 내려갔다. 서쪽 하늘이 서서히 어두워지고, 초승달이 희미하게 걸려 있었다. "당신, 저 달 보여요?" 내가 조심스레 묻자, 그녀는 고개를 들어 조용히 말했다. "네, 오늘은 달이 별 같네요." 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을 울렸다.
그날의 달빛은 마치 우리에게 속삭이는 듯했다. '아직 살아 있어요.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그녀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살짝 흩날렸고, 그 순간 나는 다시 다짐했다. 이 사람을 끝까지 지켜야 한다고.
며칠 후, 주치의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M단백 수치가 거의 안 보입니다. 아주 조금만 남았어요."
아내는 눈을 감고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조혈모세포 이식은 아주 성공적이에요. 이제 완전관해만 남았어요." 그 한마디에 나는 고개를 숙이고 하나님께 감사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유난히 따뜻했다.
이튿날, 또 다른 기쁜 소식이 들려왔다. "이제 투석을 중단합시다."
그 한마디는 믿기 어려울 만큼 놀라웠다. 일주일에 세 번, 네 시간씩 받던 투석이 끝났다. 아내는 눈시울을 붉히며 두 손을 모았다.
"아~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 목소리는 작았지만, 병실 전체가 함께 울리는 듯했다. 이어서 "격리도 해제될 것 같습니다."라는 말이 들렸다. 닫혀 있던 문이 열리고 세상과 다시 연결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병실 창가에 서서 저녁 햇살에 물든 하늘을 바라보았다. 붉게 번지는 노을빛이 말했다.
"이제 곧 나가도 돼요. 정말 고생 많았어요."
며칠 뒤, 7월 11일 수요일. 입원 118일째 되는 날이었다. 담당교수는 마지막 회진을 돌며 말했다.
"이식은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재발만 안된다면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합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아내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너무 오래 병원에 있었던 탓일까. '퇴원'이라는 단어가 낯설게 들렸다. "이제 진짜 나가는 거예요?" "그래요, 정말 잘 버텼어요." 그날, 병원 문 밖의 공기는 오랜만에 맡는 자유의 냄새였다.
큰처남의 차가 도착했고, 아내는 천천히 휠체어에서 내려 탔다. 병원 건물이 점점 멀어졌다.
차가 도로에 들어서자 그녀가 말했다. "우리, 부대찌개 먹고 가요."
의정부 부대찌개 골목에 들어서자 진한 육수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의사의 당부가 머릿속을 스쳤지만, 그날만큼은 허락하고 싶었다. "맛있어요." 그녀의 한마디에 지난 118일의 고통이 녹아내렸다. 그날의 부대찌개는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회복의 상징이었다.
집에 도착하니 아들과 딸이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118일간의 병원 생활이 담긴 짐을 옮기며 묘한 감정이 밀려왔다. 오랜만에 밟는 집안 바닥은 따뜻했고, 공기는 달콤했다. 충북 옥천에서 일을 보고 올라온 처형 부부가 문을 두드렸다. "이제는 맛있는 거 많이 먹고, 몸 관리 잘해." 그들의 말에 눈물이 차올랐다.
나는 주방으로 향해 장터에서 사 온 두부와 채소로 된장찌개를 끓였다. 병원 냄새가 아닌 집밥의 향이 주방을 가득 채웠다.
"집 냄새네요." 아내가 미소 지었다. 그 한마디가 그렇게 따뜻할 수가 없었다. 식탁 위 밥 한 그릇을 다 비운 그녀가 말했다. "정말 맛있어요." 그 말에 마음이 뭉클했다. 하지만 식사 후 통증이 찾아왔다. 아내는 아이알코돈 세 알을 삼키고 소파에 기대 잠들었다. 나는 담요를 덮어주며 그녀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발등이 조금 부어 있었지만, 이제 집이니까 믿을 수 있었다. 창밖에는 석양이 붉게 번지고 있었다.
그녀는 아직 병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희망은 분명히 있었다. 희망은 멀리 있지 않았다. 그것은 이 집 안, 우리가 함께 차린 밥상 위에 있었고, 서로의 손끝에 닿아 있었다.
그날 밤, 창밖으로 달빛이 흘러들며 그녀의 얼굴을 비췄다. 나는 거실 한가운데 앉아 두 손을 모았다.
"하나님, 제발 이 사람을 지켜주세요. 오늘의 평온이 오래도록 이어지게 해 주세요."
기도는 작았지만, 세상 무엇보다 간절했다. 잠든 아내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그 순간 마음속에서 부드럽게 울리는 목소리를 들은 듯했다. '이제 괜찮아요, 당신이 곁에 있으니까.'
그 목소리는 분명 그녀의 것이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긴 투병의 끝에서, 우리는 마침내 다시 삶의 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병이 남긴 흔적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 위로 새로운 생의 빛이 조용히 내려앉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삶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