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의 글빵연구소 졸업작품 2
여행은 짐을 싸는 일로 시작되지 않는다. 공항의 긴 줄이나 비행기 표에서도 출발하지 않는다. 진짜 여행은 마음속에서 익숙한 풍경을 떠나보내고, 낯선 길을 받아들일 작은 틈을 마련하는 순간에 시작된다.
나는 이번 가을, 로마와 베네치아, 스위스의 그린델발트와 루체른을 향해 떠날 준비를 한다.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품어온 여정이었지만, 이제는 설렘보다 묵직한 사색이 먼저 앞선다. 아마도 이번 여행이 내 생애 마지막 유럽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불시에 고개를 들어 올리기 때문이다.
마음속에는 물음이 맴돈다. "이번이 정말 마지막일까? 지금 보지 않으면 다시는 볼 수 없는 것일까?" 여행은 순간의 기쁨을 주지만, 동시에 이별의 그림자를 함께 드리운다. 그러나 이 물음이야말로 여행의 본질인지도 모른다.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오히려 지금 눈앞의 풍경을 더 선명하게 각인시키고 있다. 미래의 희망을 미루기보다, 현재의 확실함을 더욱 단단히 붙들게 하기 때문이다.
로마의 돌길을 밟으며 나는 지나온 시간을 떠올릴 것이다. 베네치아의 물결 앞에서는 흘러간 세월과 여전히 흐르는 내 마음을 겹쳐 볼 것이다. 그리고 스위스의 설산과 푸른 초원, 호수 앞에 서면 무겁게 짓누르던 삶의 짐이 잠시나마 흩어져 사라지겠지. 여행은 단순히 새로운 풍경을 보는 일이 아니라, 오래된 나 자신을 새롭게 바라보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아직 쓰이지 않은 한 페이지 앞에 서 있다. 이번 가을, 그 페이지 위에 어떤 이야기가 기록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 순간순간이 내 삶의 마지막 장면이 아니라 또 하나의 장면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사실이다. 여행은 그렇게,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사실 이번 여행은 내 일흔 살을 기념해 아이들이 정성껏 마련해 준 선물이다. 홀로 떠나는 길이 아니라, 자식들과 함께하는 특별한 기념 여행이다. 그들의 배려와 사랑이 아니었다면, 나는 아마 다시 먼 길을 떠날 용기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나이 든 아버지를 위해 시간을 내고, 함께 웃고 걸어갈 준비를 해 준 그 마음이 벌써 여행의 절반을 채우고 있다.
그러나 마음 한쪽에는 언제나 빈자리가 남아 있다. 만약 아내가 곁에 있었다면, 이 기쁨은 얼마나 더 충만했을까. 스위스 융프라우의 장대한 빙하를 함께 바라보며 시원한 공기를 들이마셨다면, 그 순간은 내 삶의 가장 눈부신 장면이 되었을 것이다. 아이들과 사진을 찍는 내 옆에, 환하게 웃는 그녀가 서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 장면은 상상 속에서만 완성된다. 현실 속에서는 셋이서 웃고 서 있지만, 내 마음의 프레임 속에는 언제나 넷이 서 있다. 공백은 사진 속에 보이지 않지만, 내 눈에는 또렷이 보인다. 그 빈자리는 때로는 고통이지만, 동시에 그 사람과 함께했던 시간을 더욱 빛나게 하는 자국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번 여행은 기쁨과 그리움이 동시에 깃든 여정이 된다. 아이들과의 웃음은 현재를 붙잡아 주고, 아내에 대한 그리움은 지나온 시간을 되새기게 한다. 두 감정이 겹쳐질 때, 나는 비로소 여행이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인생의 또 다른 기억을 쌓는 과정임을 알게 된다. 여행은 끝내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살아 있는 자와 떠난 자,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내일까지 함께 데려가는, 삶의 긴 행렬과도 같다.
짐을 꾸리다 보면 자주 멈춰 서게 된다. 셔츠 하나를 접는 동작이 갑자기 멈추고, 문득 예전 함께 걸었던 바르셀로나의 골목이 떠오른다. 작은 광장 앞에서 함께 나눴던 감탄이 아직도 귀에 맴도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때는 늘 둘이었다. 이제는 그 풍경을 혼자 바라봐야 한다는 사실이 낯설고, 조금은 익숙해지지 않는다.
이번 여행은 그래서 단순한 나들이가 아니다. 떠난다는 말보다 '남긴다'는 말이 더 적절하다. 소비하는 시간이 아니라 기록하는 시간이 더 짙게 스며든다. 가방 속에는 옷과 필수품이 들어가지만, 마음속에는 지나온 날들의 자잘한 흔적들이 한올씩 접혀 들어간다. 무엇을 챙길지 고르는 일이 곧 무엇을 기억할지를 고르는 일이 된 셈이다.
짐을 싸는 과정은 삶을 정리하는 일과 닮았다. 놓아줘야 할 것과 끌어안아야 할 것을 가늠하면서, 오래 전의 소소한 장면들이 비로소 제 의미를 얻는다. 사진으로 남을 장면도 중요하지만, 내 안에 남겨둘 이야기들이 더 크고 오래간다는 것을 알기에 한 가지 한 가지를 더 정성껏 챙기게 된다.
문을 닫고 가방을 들 때면, 이미 한 겹의 시간이 접혀 들어간 기분이 들것이다. 떠남의 설렘과 남김의 숙연함이 섞인 이 의식이 여행 내내 나를 지탱해 줄 것이다. 결국 여행은 남김을 위한 행위이고, 그 남김들이 모여 돌아온 뒤의 하루들을 묵직하고도 다정하게 만든다.
젊은 시절의 여행은 언제나 속도가 빨랐다. 하루 안에 더 많은 명소를 담아내야 한다는 강박이 늘 따라붙었고, 그만큼 숨 가쁘게 걷고 또 달려야 했다. 여행은 마치 체크리스트를 채우는 일과 같았고, 사진첩이 두꺼워질수록 만족감이 커질 줄 알았다. 하지만 남겨진 사진은 많아도 마음에 오래 머무는 장면은 그리 많지 않았다.
세월을 건너온 지금, 여행은 더 이상 그런 목록이 아니다. 길 위에서 놓친 것들이 오히려 오래 기억된다는 것을 알게 된 뒤로, 나는 이번에는 다르게 걷기로 했다. 많이 보는 대신 오래 보려 한다. 건물 하나의 주름을 따라가며 그 세월을 느끼고, 스쳐 가는 사람의 얼굴에서 살아온 흔적을 읽고, 바람 한 줄기에도 발걸음을 멈추며 천천히 머무르고 싶다.
여행은 남김없이 담아내는 행위가 아니다. 오히려 흘려보내며, 그 가운데 지금의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간직하는 일이다. 바쁘게 메모하듯 걷던 시절을 지나 이제는 음미하며 기록하는 시간으로 바꾸려 한다. 결국 여행은 풍경보다 나를 돌아보게 하는 과정, 오래도록 내 안에 남을 한 장면을 찾는 길임을 이제야 알겠다.
나는 글쓰기를 떠올린다. 수필을 쓰는 일과 여행은 닮아 있다. 문장이 너무 길면 숨이 막히고, 너무 짧으면 맥이 끊기듯이 길 위에서도 리듬이 필요하다. 문장과 길 모두 호흡을 맞춰야 이어지고, 그 호흡이 있어야 끝까지 걸을 수 있다.
글에서 불필요한 말을 덜어내듯, 여행에서도 불필요한 욕심을 하나씩 내려놓는다. 사진을 남기려 애쓰기보다 한 장면을 오래 들여다보고, 다음 장소로 서두르지 않는다. 보고, 걷고, 느끼고, 묻고, 다시 느끼는 그 반복 속에서 문장은 다듬어지고 풍경은 내 안에 자리를 잡는다.
여행과 글쓰기는 서로를 비추는 거울과 같다. 한쪽에서 무엇을 덜어내면 다른 쪽에서 무엇이 더 선명해진다. 결국 나는 이 둘을 통해 내 안의 풍경을 완성해 가려한다.
여행은 단순히 새로운 풍경을 보는 일이 아니라, 오래된 나 자신을 새롭게 바라보는 일이다. 로마의 돌길을 밟을 때면 발바닥에 전해지는 시간의 결이 내 안의 지난날들을 불러낸다. 한 걸음 한 걸음이 기억을 깨우고, 돌 하나에 스며든 이야기가 낯익은 얼굴을 닮아 보일 때면 나는 그제야 내가 걸어온 길을 또렷하게 본다.
베네치아의 물결을 보면 흘러간 세월과 여전히 흐르는 내 마음이 자연스럽게 포개진다. 물 위에 비친 건물과 사람들이 출렁이는 것처럼, 내 안의 기억들도 잔물결이 되어 번졌다가 잦아든다. 소음 대신 호흡을 듣는 순간이 오면, 나는 지나간 것들과 지금의 나를 나란히 놓아볼 수 있다.
스위스의 설산과 호수 앞에서는 무거웠던 것들이 잠시 흩어진다. 차가운 공기가 폐 깊숙이 스미면 불필요한 생각들이 녹아내리고, 오직 숨결만이 맑게 남는다. 그 맑음 속에서 나는 비로소 사소한 것들의 윤곽을 알아보고, 오래된 상처와 오래된 기쁨을 같은 눈으로 볼 수 있게 된다.
결국 풍경은 나를 비추는 거울이다. 그 거울 앞에 서면 나는 새로워진 얼굴을 본다. 여행은 그 얼굴을 발견하는 과정이고, 그 발견은 돌아온 뒤의 하루들을 조금 더 선명하게 만든다.
귀국 후 나는 이 여정을 글로 남길 것이다. 처음의 문장은 아마 거칠고 어수선할 것이다. 그러나 여러 번의 퇴고와 윤문의 끝에 조금씩 다듬어질 것이다. 중복된 단어를 지우고, 겹치는 감정을 고르고, 흐릿한 느낌을 구체적인 사물로 바꿔 놓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야 비로소 글은 살아 있는 장면이 된다.
여행의 마지막 과정은 기록이다. 발걸음으로 채운 장면은 종이 위에 남을 때 완성된다. 보고 느낀 것이 단순한 기억으로만 흩어지지 않고, 한 편의 글이 될 때 삶의 일부로 굳어진다. 나는 이번 여정을 수필로 정리해 보려 한다. 여행을 넘어 글로 이어지는 그 순간, 기억은 사라지지 않고 문장이 된다.
글이 남는 순간, 여행은 단순한 경험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한 문장이 되고, 다시 읽힐 수 있는 하나의 기록이 된다. 결국 글쓰기는 여행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출발점이다.
여행은 집을 떠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돌아올 이유를 하나 더 만드는 일이다. 익숙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길 위에 서는 건,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다시 깨닫기 위해서다. 이번 여정이 끝나면 나는 다시 오래 살아온 집으로 돌아올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의 나는 떠나기 전의 내가 아닐 것이다.
로마의 오래된 돌길은 발밑에서 묵직한 역사의 울림을 전해줄 것이다. 그 돌 위를 걸으며 나는 내가 살아온 시간들을 되새기고, 삶이란 결국 흔적을 남기는 과정이라는 걸 느낄 것이다. 베네치아의 물결은 물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며, 흐른다는 것, 머물지 않는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알려줄 것이다. 그 도시의 좁은 수로를 건너며 나는 내 삶의 유동성과 덧없음을 동시에 바라보게 될 것이다.
스위스의 설산과 호수는 깊은 고요 속으로 나를 이끌 것이다. 짙게 쌓인 눈과 고즈넉한 숲의 기운은 나를 짓누르던 무게를 흩뜨려 놓고, 남는 것은 숨결 하나의 맑음뿐일 것이다. 그 맑음 속에서 나는 복잡한 생각을 덜어내고, 단순하게 살아가야 할 이유를 다시 붙잡게 될 것이다.
루체른의 호수는 오래된 일기장을 펼쳐놓은 듯 묘한 위로를 건넬 것이다. 수면 위에 번지는 빛과 그 속에서 반짝이는 물결은 지나온 세월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하면서도, 여전히 내 앞에 남은 삶의 페이지가 있음을 속삭여 줄 것이다. 그 호수 앞에서 나는 지난날을 정리하고, 앞으로 남을 날을 준비하는 조용한 시간을 갖게 될 것이다.
여행은 결국 새로운 풍경을 보는 일이 아니라, 돌아온 일상을 새롭게 바라보게 만드는 일이다. 길 위에서 얻은 울림은 집 안의 작은 풍경들을 다시 빛나게 할 것이고, 돌아온 나는 더 깊어진 눈으로 같은 하늘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그래서 여행은 떠남이 아니라 돌아옴을 풍성하게 만드는 일, 집을 다시 사랑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이유다.
이제 나는 준비한다. 설레면서도 두렵고, 가벼우면서도 무거운 마음을 안고 아직 쓰이지 않은 페이지를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다. 아이들이 마련해 준 이 여행은 축복이자 도전이다. 그들의 눈빛과 손길을 떠올리면 용기가 솟지만, 동시에 사진 속의 빈자리가 자꾸만 눈에 밟힌다. 그 빈자리는 내게 다른 감각을 가르쳐 주었다. 오래 바라보는 법, 천천히 걷는 법, 남김의 의미를 묻는 법을 말이다.
길 위에서 나는 천천히 숨을 맞출 것이다. 로마의 돌길 위에서는 발바닥으로도 이야기를 듣고, 베네치아의 물살 앞에서는 흐름과 머무름을 함께 생각하리라. 부라노섬의 알록달록한 집들 사이를 걷다가도, 한 사람의 얼굴에 오래 머무를 것이다.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 기록하기보다는 눈으로, 마음으로 먼저 담아 두려 한다. 그렇게 담긴 것들이야말로 글이 되어 돌아왔을 때 비로소 빛을 발하리라 믿는다.
귀국 뒤에는 글을 쓸 것이다. 처음엔 거칠고 어수선할 문장들이 가득하겠지만, 퇴고의 손질을 거치며 한 줄씩 정리될 것이다. 중복된 말은 덜어내고, 흔한 정서는 구체적 사물로 치환하고, 흐릿한 감정은 한 장면으로 응축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이 여정은 내 안에서 단순한 기억을 넘어 하나의 문장으로 굳을 것이다. 그 문장이 누군가의 가슴에 닿을지, 내 오래된 방 한편을 달래 줄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글이 남을 때, 여행은 완성된다고 확신한다.
돌아올 집을 생각한다. 집은 그 자리 그대로일 테지만, 집에 기대앉아 바라보는 나는 조금 달라져 있을 것이다. 길에서 배운 것들이 일상의 자잘한 풍경을 더 환하게 비추고, 평소 지나치던 소리와 빛에 새로이 귀 기울이게 할 것이다. 여행은 집으로 돌아올 이유를 하나 더 만들어 준다. 떠남이 곧 귀환을 의미하는 방식이 아름답다.
마지막 여행이라 해도 상관없다. 끝이라고 부르기엔 어리석다. 길 위의 모든 순간을 글로 옮기는 그날, 이 여정은 또 다른 얼굴을 얻는다. 펜을 드는 순간, 여행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