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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윤서 Apr 24. 2024

카페 음악은 빨대와 에이드

  제주도의 어느 절벽 위, 우리는 클럽 음악이 빵빵하게 울리는 카페 야외 테라스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말 많은 세 사람의 에이드 마시는 소리만 들렸다. 힙한 카페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볼거리였다. 


  - 네가 이해해. 쟤 원래 좀 예민한 거 알잖아.

  - 뭘 이해해? 난 쟤랑 다시는 이런데 안 와.


  나와 H 사이를 여러 번 왔다 갔다 하며 말을 전하던 J는 결국 자기도 지친다는 말을 끝으로 조용해졌다. 매번 중간에서 조율하는 일만 맡게 된 J에게 미안하면서도, 다시는 이 셋이서 여행 따위 오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정말 그 다짐을 마지막으로 우린 더 이상 다음 여행을 하지 않게 됐다. 


  H와는 초등학교 5학년때 같은 반을 하면서 알게 됐다. 당시 막 전학을 왔던 나에게 H가 처음 한 얘기는 이랬다. 

  - 내가 워낙 애들 왕따를 많이 시켰었는데, 올해는 좀 착하게 살아보려고.

  폭력을 자랑삼던 그 애의 말에 서늘함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H의 다짐과는 다르게 나와 친구들은 그해 차례대로 H에게 왕따를 당했고, 학년 마지막 즈음에는 그 애가 그대로 돌려받았었다. 그때 유일하게 H의 사과를 받아주었던 것이 9년 세월까지 이어질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J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아마 내가 유학을 떠난 중학교 3학년쯤 진작 연이 깨졌을 거다. 각자 주장이 강하고 굽힐 줄을 모르는 성격에 자존심까지 셌으니, 늘 가운데에서 중간다리 역할을 해주던 J가 9년을 이어준 셈이다. 우리는 늘 상대의 다른 것을 가지고 투닥거렸고, 상대적으로 무던한 J가 어떻게든 둘을 다시 화해시키는 식이었다. 그래도 나와 H는 비슷한 점도 많아서, 함께 전시회도 보러 가고 책도 읽으러 다니곤 했다. 그때만큼은 그렇게 맞는 친구도 없었다. 학창 시절 때까진 서로의 비슷한 면과 J의 접착제 역할이 나름 효과가 있었다.


  그러다 H가 남들이 선망하는 학교에 들어가고 나서부터는, 그만한 결도 사라지기 시작했다. 만나면 93%가 H 본인얘기여야 했고, 그중 대부분은 학교에 대한 자랑뿐이었다. 나머지 7%의 지분을 각각 4와 3으로 나눠가진 나와 J는, 그마저도 그 애가 해낸 성과에 대한 구체적인 극찬으로 채워야 했다. 그럼에도 H가 나에게 불만을 가지던 것은 그런 거였다. 자기 학과 시간표를 외우지 못하냐고. 우리 학과 교수님 성함도 틀리냐고. H와의 시간은 점점 H 자신의 시간으로 채워졌다. 우리의 일상은 그렇게 반가운 것 같지 않았다. 


  그럼에도 제주도로 함께 여행을 간 것은, 늘 함께를 강조하던 J의 설득 때문이었다. 여느 여행 때처럼, 이번에도 아슬아슬한 불안감이 있었다.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일지도 모르겠다 하는. 9년 인연을 싫어할 줄만 알았지, 끊을 줄은 몰랐다. 밉고 불편해도 가야지, 또 안 가면 하루종일 삐져서 지 속상한 얘기만 하겠지, 하고 결국 따라가기로 했다.


  계획력이 250%인 H는 고작 3박 4일 제주 여행을 두 달 전부터 매주 줌(zoom)까지 켜가며 회의를 했다. 빽빽하기 그지없는 스케줄표. 그 애가 벌써 정리해 둔 엑셀 파일을 보다가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이래서 내가 가기 싫었던 건데. H는 아주 자애롭게도 각자 하루씩 맡아 가고 싶은 곳 계획을 세우라고 했고, 우리는 분 단위로 엑셀 파일을 정리했다. 결국엔 다 본인이 가고 싶은 곳으로 정해졌지만. 


  한여름의 제주는 쨍하고 습했다. 여름이 싫다던 H는 그곳에서 자꾸만 다르게 행동했다. 여행 와서 사진 찍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다며 이어폰을 끼고 걸었고, 바다를 구경하는 동안에는 혼자 저만치 멀리 있는 부둣가에 앉아있었다. 순간 그럴 거면 왜 같이 오려고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애의 마음까지 내가 어쩔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것마저 이해했는데. 알 수 없는 짜증이 나에게까지 왔을 때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져버렸다. 


  예를 들자면 이렇다. H가 계획에 적어둔 식물원에 간다. 1시 28분까지 구경을 마치고 1시 30분에 택시를 타기로 한다. 그럼 그 애는 20분부터 카카오 택시 앱에 들어가서 다음 동선을 미리 계획하는 식이다. 나는 생각 없이 28분까지 식물원을 구경하고, H가 미리 잡아둔 택시를 함께 탄다. 밥을 먹는다. 먼저 밥을 다 먹은 H는 미리 다음 행선지인 시장까지 갈 택시를 미리 잡는다. 나는 후다닥 밥을 먹자마자 H가 잡아둔 택시를 탄다. 여기서 문제는 계획한 시간보다 일찍 다음 계획을 생각한다는 것이고, H는 미리미리 행동하지 않고 따라만 오는 내게 불만을 표한다. 자기가 무슨 여행 가이드냐고. 그 애의 생각에 따르면 눈치껏 미리 택시를 확인해 주는 J는 괜찮고, 시간 끝까지 잘 채워서 놀고 있는 나는 노력 없이 여행만 한다는 거였다. 계속 널 참아주고 있었다는 H의 말은 눌러왔던 내 화를 터트렸다. 그리고 그 절벽에서 깨달았다. 이젠 우리가 수습도 없을 만큼 달라져버렸다는 걸. 


  그 여행 뒤로 줄곧 나는 H와의 헤어짐만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얘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끝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가 덜 상처받고 끝날까. 그런 생각뿐이었다. 좀 더 아름다운 이별을 강구해 볼 수도 있었지만 난생처음 해보는 절연 선언 앞에선 눈에 뵈는 게 별로 없었다. 결국 H의 치명적인 실수로 우리의 관계는 깨어졌다. 그래도 9년을 만난 사이였으니 사과 한 번이라도 올 줄 알고 기다렸는데, 그런 건 없었다. 혼자 질기게 잡고 있던 인연은 내가 놓자마자 사라졌다. 고작 그 정도의 사이였다니. 딱 그 정도의 여행이었다니. 1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가끔 어벙벙한 지금은 풀어놓지도 않은 그 애의 차단 목록을 가끔씩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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