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일하는 회사들은 (보안을 비롯한 여러가지 이슈로) 인트라넷과 인터넷을 분리하고 있다. 일이라는 것은 항상 컴퓨터, 그것도 사무실에 정해진 컴퓨터에서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가끔 다른 직종에 계신 분들이 카페에서 커피 한잔 하며 밖에서 일하는 모습이 일견 부러울 때도 있었다. 갑갑할 때면 자리를 바꿔서 일해보는 것도 꽤 쏠쏠한 재미일 것 같았다. 그리고 낯선 공간이 주는 효과도 제법 있다고 생각한다. 집에서는 자꾸 넷플릭스나 유튜브로 가던 손이 밖에 있으면 내 손에 들린 책 한권을 오롯이 읽어내는 집중력으로 이어지는 걸 보면 말이다.
그렇지만 정해진 곳에서 일한다는 것도 꽤 좋은 면이 많았다. 무엇보다도, 일과 삶이 확실한 분리가 일어난다는 점에서 그랬다. 회사 어느 선배님이 일부러 회사에서 1시간 정도의 거리를 두는 곳에 사신다고 했다. 그 분은 출근시간 동안 집에서 자상한 가장 마인드에서 책임과 역할을 중시하는 관리자의 마인드로 워밍업을 하셨고, 반대로 퇴근시간엔 지하철이 회사에서 멀어지는 거리에 비례해서 일을 잊고 가정을 생각하셨다고 했다. 그 분의 이야기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했던 것은 그만큼 우리에겐 어떤 이슈든 집에서만큼은 잊을 권리, 마음의 스위치를 꺼놓을 권리를 바라는 마음이 있어서가 아닐까 싶다.
2020년 2월의 어느 날, 페스트 이후 동시다발적으로 전인류에게 가장 많이 퍼졌다는 COVID-19 바이러스가 한국에 본격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한달전만 해도 미국 증시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다던 자본시장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반전되었고, 유수의 기관, 회사들이 앞다투어 COVID-19은 우리의 삶을 (어떤 면에서) 완전히 바꿔놓을 것이라고 전망을 했다. 10년 주기설을 빗대어 드디어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또다른 위기가 오는 것인가에 대해서 긴장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각종 해외여행 계획들 휴가계획들이 취소되고, 거리를 돌아다니지 못하고, 마스크를 구하지 못해 줄을 서는 상황들이 벌어졌다. 그리고 우리 회사에도 전례가 없던 방침이 등장했다. 감히 상상도 해보지 못한 “재택근무”였다.
2020년 3월초의 어느 금요일에 본사에서는 각 부서장(또는 지점장)의 재량하에 2교대든 3교대든 조를 나누어서 재택근무를 실시하도록 지시가 내려왔다. 부랴부랴 역할을 나눴다. 관리자급의 부재가 없어서 결재가 안되도록 세팅을 하고, 각자의 역할이나 업무량 등에 따라 조를 편성했다. 당장 다음 주부터 재택을 들어가야 했던 사람들은 부랴부랴 다음주의 업무량을 측정하고 그에 필요한 자료들을 준비하는데 바빴다. (내부승인을 받아 당장 다음주에 해야 할 업무파일을 복사했다.) 그리고 길면 1,2개월을 같은 팀원 간에도 얼굴을 못 볼 수 있는 재택근무 교대에 들어갔다.
재택근무를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당황스러웠던 부분은 당장 다음주에 무엇을 할지 매우 구체적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다음주에 이 파트 이 부분은 이렇게 이거 보면서 해야지 하고 느긋하게 생각했던 일들, 아니 사실 아예 깊게 생각하지 않고 그냥 이 부분은 나중에 닥치면 해야지 하고 생각했던 것들은 이제 지금 준비하지 않으면 아예 1주일이 훅 날라가서 손도 못 댈 수도 있다는 긴박감에 하나하나 다 꼼꼼하게 생각해야 했다. 게다가 사무실엔 평소보다 적은 수의 팀원들이 평소에 다른 사람들이 하던 일도 나눠맡아서 해야 하는 상황이니 집에서 내가 어떤 파일이 없다고 보내달라고 하기에도 미안한 상황이었다. 결국은 미리 생각하지 않아도 될 일을 미리 생각하고 준비해야 했다.
재택근무를 시작하고 나니 낯선 상황과 마음들이 하나씩 올라오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느껴진건 아침에 7시든 8시든 집에서 맞춰 나오던 시간에 좀더 느긋하게 여유롭게 아침을 준비한다는 건 학창시절 이후 처음 느껴보는 자유였다. 오전 10시반에 회사 밖에 있다는 기분이 주는 묘한 어색함과 해방감이 동시에 느껴졌다. 게다가 업무시간에 본래 하려던 업무 외에 여기저기서 부르고 연락오고 찾던 부분들이 확 걷어지고 나니, 이렇게 고요하게 업무에만 집중할 수 있는 것도 처음이었다. (가끔 출근하곤 했던 주말에나 느낄 수 있는 집중력이었다.) 사실 내 고유 업무에만 집중할 수 있는 직장인이 몇이나 될까 싶다. 끊임없는 회의, 미팅, 보고들 속에서 정작 내 일은 진도가 안나가는 기분이란 마치 매일마다 오늘 내가 정한 업무량 목표를 위해 100m 출발선에서 준비, 출발! 하는 총성에 맞춰 앞으로 달려나갈 때 양 옆 레인의 경주자들이 “내가 먼저야!” 라며 나를 뒤로 밀쳐내는 아우성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 기분 없이 내 목표량에만 오롯이 집중할 수 있다는 건 생각보다 홀가분한 경험이었다.
그런데 막상 재택근무를 시작하고 나니, 점차 기간이 길어지면서 예상외의 이슈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챙겼다 싶어도 갑자기 필요해지는 업무자료는 둘째치고, 출근할 때보다 더 고민되는 점심메뉴, 하루에 대중교통으로 출근하면서라도 의무적으로 걷던 하루 5~6천보의 발걸음(스마트워치로 매일 재고 있다)이 없어지면서 느껴지는 활동량 감소(지하철은 정말로 운동이 된다), 하루종일 집에 있으면서도 업무를 하는 이상한 느낌, 언제고 전화올지 모르는 핸드폰 전화(사실 사무실에서도 업무상 전화는 자주 받았는데 집에서 받는 기분은 참 남달랐다) 등등. 일과 삶이 한 공간에서 이뤄지는 가운데 겪는 많은 시행착오들, 그 속에서 나는 예상하지 못한 나의 모습들, 그리고 일이 주는 의미들, 삶의 당연하던 것들을 새롭게 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