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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박 Mar 23. 2024

독립적 의존, 의존적 독립

전희경의 「시민으로서 돌보고 돌봄 받기」

지인들이 엄마의 안부를 묻는다. 어머니 좀 어떠셔요? 나는 대답한다. 별로 좋지 않아요. 한껏 부풀린 풍선 같아요. 위태롭다는 말이다. 약간의 자극으로도 터져버릴 것 같은. 혈액암 투병 중인 엄마를 보고 있는 내 마음이 그렇다. 우리 집과 10분 정도 떨어진 거리에 엄마집이 있다. 올해 88세의 엄마는 혼자 산다. 나는 일주일에 두 번 정도 방문에서 엄마랑 밥을 먹는다. 혼자서는 밥 하기도 먹기도 싫다고 하셔서 음식을 해서 나른다. 하루가 다르게 쇠잔해지는 엄마를 보고 있는 나는, 속수무책이다.


속수무책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건데,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은 아니다. 뭔가를 끊임없이 하는데 상황이 개선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였던 병원행이 최근에는 더 자주 병원에 전화하거나 진료를 받으러 가게 된다. 예약된 병원행이 아니라 전혀 예측 못했던 상황이 발생해서이다. 지난번 백내장 수술을 받았던 눈에 또 문제가 생겨서 망막박리가 아닌 가 걱정되어 안과에 가고, 다리 부종이 다시 시작되어 이뇨제를 추가로 먹어야 하는지 병원에 전화하고 찾아가고...

그러는 사이에 나도 괜찮지 않아 졌다. 원형탈모가 오고 체중도 줄고 체력도 떨어졌다. 무엇보다 심리적 상태가 복잡하다. 힘듦과 짜증, 원망과 죄책감, 안타까움과 절망. 수시로 나를 헤집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내 일상이, 삶이 잠식되는 느낌이다.     

 

나는 언어가 필요했다. 지금의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용어가 절실했다. 그래서 전희경의 「시민으로서 돌보고 돌봄 받기」를 다시 찾아 읽었다.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부제: 질병, 돌봄, 노년에 대한 다른 이야기)에 속해 있는 내용이다. 전에 읽을 때도 밑줄을 열심히 쳤는데 이번에는 더 절실하게 집중했다.      

“돌봄은 다름 아닌 바로 그 ‘자율적인’ 생애기획이 틀어지거나 불가능해지는 지점에서 절실해진다. 질병은 계획할 수 없고, 돌봄 또한 그렇기 때문이다.”     

 

전희경은 돌봄은 ‘진정한 관계’이기 때문에 공적 제도만으로 해결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취약함(늙음, 장애, 질병)이 곧 쓸모없음으로 치환되는 세상에서 우리는 곧잘 공포와 두려움으로 그것을 바라본다. 그러나 ‘인생이란 취약성의 기간’이라는 것을 통찰하게 되면 우리가 상상하는 ‘건강함’이란 허상이고 ‘취약함’이 디폴드값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곧 ‘타자’ 없는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타자의 취약함이 곧 나의 취약함이다. 코로나19와 같은 급성 전염병에 주요 대처법이 백신인 이유도 그렇기 때문이다(집단면역의 원리). 타자의 안전이 나의 안전과 매우 밀접하다.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라는 경쟁논리에서 ‘취약함이 기본값’인 인간 존재로 사유의 변화 또는 확장이 일어나면 돌봄은 훨씬 더 인간의 모습을 갖게 된다는 말이다.   

  

“우리는 ‘구체적’으로 두려워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두려움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불가능하다), 이 두려움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이다.”     


나와 같이 질병과 고통, 돌봄, 절망에 가까이 있으면서 구체적으로 두려워하고 있는 자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전희경은 독립과 의존이 반대말이 아니라고 한다. 돌봄 받는 사람도 나름의 방식으로 다른 이를 돕는다는 것이다. 좀 더 비약하자면, 기업이 노동자를 먹여 살린다고 착각하지만 실제로는 기업은 노동자들의 노동에 의존한다. 생계부양자인 남편은 아내의 돌봄 노동에 의존한다. 모든 사람은 의존의 구조 속에서 연결되어 있다. 그러니까 ‘의존’을 낙인찍고 ‘독립’을 강조하는 것은 잘못된 프레임인 것이다. 우리는 독립적이고도 의존적이다. 그러니까 엄마와 나는 의존적 독립관계이다.      


전희경의 글을 읽어 가면서 나는 현재의 내 상황에 대해 좀 더 긍정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엄마는 돌봄을 당하는 능력이 출중하다. 자기 통제력이 높은 엄마는 본인이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혼자 하려고 노력한다. 자식들한테 하소연이나 푸념을 하지 않는 대단한 환자이다. 그래서 내가 일방적으로 돌보는 위치에 있지 않을 수 있다(직업을 가진 동생들도 자신들의 한도 내에서 최선을 다한다).


엄마의 병증은 아직 최고로 심각한 단계는 아니다. 아마도 머지않아 엄마가 가장 두려워하는 ‘몸에 대한 통제’를 잃는 시간들이 올 것이다. 자신의 용변조차 혼자서 처리할 수 없게 될 때가.        

“혼자서 용변 처리를 할 수 없는 몸 상황을 ‘차라리 죽는 게 나은’ 비참함으로 경험하는 것 역시 우리 사회의 규범이 강제한 ‘해석된 경험’이며, 페미니스트 관점에서 새롭게 ‘재해석되어야 할 경험’이다.”     

쉽지 않은 얘기이다. 그러나 맞는 얘기이다. 나는 엄마와 함께 ‘돌봄’이라는 생애의 필연적인 과정을 겪으면서 ‘나의 똥오줌을 받아낼 사람’에 대한 구체적 상상력을 갖게 될 것 같다. 죽음에 대한 낭만적이고도 허황된 상상을 하는 대신에.


이 모든 ‘돌봄’의 시간 동안 공부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돌봄’을 제대로 경험하기 위한 공부가 절실하다. 전희경의 말처럼 ‘돌봄 경험과 의존 경험의 지식화’가 필요하다. 나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진정한 관계의 돌봄과 존엄한 의존이 가능하기 위해서 그렇다. 전희경의 마지막 말을 주문처럼 외워야겠다.      


“우리는 언제나 서로의 짐이고, 또한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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