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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ve Jan 30. 2021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가는 여왕 ‘쎄시아’

웹 소설 <여왕 쎄시아의 반바지>를 읽고

* 인용글은 모두 웹 소설 <여왕 쎄시아의 반바지>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웹 소설 <여왕 쎄시아의 반바지>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등장인물은 작중에서 대륙을 통일한 여왕인 ‘쎄시아’이다.


 물론 주인공인 ‘유리’도 상당히 매력적인 캐릭터이긴 하다. 그녀가 왕정 시대에 살면서 현대적인 감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현대적인 감각은 유리가 자신이 전생의 삶을 자각하면서 생긴 것이다. 유리가 무언가 계기가 있어 배우고 느끼고 큰 의미가 생겼기 때문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지만 쎄시아는 다르다. 그녀는 왕정 시대의 귀족 여성으로 자라왔다. 그런데도 성별로 인한 차별을 당해왔다. 그런 그녀는 자라 왕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여성 귀족의 의무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고, 그것을 헤쳐나가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그 노력의 결과가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여성들에게까지 전달되기를 원한다. 그런 면이 멋있다고 생각했다.

 통치의 잔이 없었더라면 쎄시아 발렌시아는 이 자리에 없었을 것이다.

 여자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대영주들은 자신 위에 군림한 새 군주를 두려워하는 동시에 깔봤다. 언젠가 그녀에게 부군이 생기면, 그쪽을 섬기면 되는 것 아닌가, 라는 말을 발렌시아 성 내에서 공공연히 할 정도였다.
 ‘여자가 무슨 통치를 한단 말인가.’

 쎄시아를 보는 많은 대신들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쎄시아는 젊고 아름답고 현명하다. 유능하며 영민하고, 정치 감각도 남다르다. 그러나 그 재능들이 여자의 것이 되는 순간 쎄시아의 등에 매달린 호칭은 마녀가 되고 악녀가 된다.


 쎄시아는 어릴 때부터 자신이 아흔아홉 개의 왕국을 통일할 것이라고 자신의 이복동생인 ‘에넌’에게 말하고는 했다. 그리고 그녀는 정말로 대륙을 통일한 첫 ‘여왕’이 된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코르셋으로 몸통을 꽉 졸라야 했고, 신하들에게는 어서 결혼해야 한다는 닦달을 들어야만 했다. 그녀가 ‘여’왕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주변에서는 그녀가 결혼하게 되면 부군에게 그 자리를 넘겨줄 것이라 당연하게 생각했다.


 쎄시아의 주변 상황은 가히 절망스럽다고 말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기껏 정복하러 나가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고 와서 왕이 되었더니 결혼하란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결혼을 하고 그 영광을 모두 그 결혼한 사람에게 넘겨주라고 한다. 대체 그녀가 왜 그래야 한단 말인가? 그것이 모두 그녀의 업적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신하들은 그녀를 인정하지 않았다. 작중에 등장하는 ‘통치의 잔’이라는 마법 물품이 없었다면 누구라도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쎄시아는 그런 상황에서도 왕의 일을 충실하게 이행한다. 그리고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제도들을 뜯어고치기 시작한다.


 물론 나는 쎄시아처럼 높은 자리에 있어 본 적이 없다. 그렇지만 그녀가 겪는 그 상황에 대해서 알 수밖에 없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도 같은 여성이기 때문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나름대로 말을 잘하는 편이었다. 논리적으로 보이고 싶어서 열심히 노력한 부분도 있고, 말을 통해서 하는 순간 대처가 빠른 편이기도 했다. 어릴 때 말싸움을 하면 어디 가서 져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학교에서 하는 토론 수업도 제법 좋아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나는 가끔 ‘여우같이 말을 잘한다’라는 말을 들었다. 이 말을 들어본 사람은 절대로 이게 좋은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 것이다. 나는 그게 억울했다. 의견을 말해야 하는 일이었고, 그것에 대한 뒷받침 근거도 충분했는데도 그런 말을 들었다. 그래도 내가 말을 잘하는 것이 질투 나서 그런가 보다. 내가 잘하니까 할 말이 없어서 그런가 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억울함을 삼켰다. 그런데 나처럼 말을 잘하던 남자애들은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없다고 했다. 나는 말을 잘하는 사람이 이기면 다 그런 말을 듣는 줄 알았는데 그건 내 착각이었다. 나는 그 뒤로 말하는 일에 한 발자국 뒤로 빠지게 되었다. 그런 내가 그다음에 들은 말은 ‘다소곳한 여자애’라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기가 막힐 노릇이다.

 그래서 그럴까. 쎄시아가 더욱 이런 상황에서 힘내주었으면 하고 바라게 되었다. 물론 쎄시아는 자신의 행보를 멈추는 법이 없었다. 그게 위로가 되고, 마음에 들었다.


“…열 살의 나는 항상, 남자아이들이 부러웠지.”

"…."

"낮이나 밤이나 남자아이가 되고 싶어 입술을 짓씹은 적도 있다. 그건 남자애들이 하는 병정놀이가 부러워서도, 시집이나 가라는 이야기가 싫어서도 아니었다. 그 애들이 입고 뛰어다니는 바지 한 벌이 입고 싶었지. 정확히는… 열 살 때부터 내 허리를 조이는 코르셋이 너무 싫어서 밤마다 침대 위에서 울었다. 숨이 막혀서 잠도 못 잘 것 같았거든."


 쎄시아는 유리 덕분에 처음으로 바지를 입게 된다. 여성들은 당연히 드레스를 입는 왕국에서 무려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여성이 바지를 입은 것이었다. 그것은 세간에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바지를 입은 쎄시아는 에넌에게 바지가 너무 편히 벗고 싶지 않아 짜증이 날 정도라고 말했다. 남자들만 이런 좋은 것을 입고 있었느냐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자 에넌은 여성들이 그런 것을 입고 싶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고 답한다. 그에게는 바지를 입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가끔 남자로 태어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는 한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계기는 남자였다면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부분을 나는 당연하게 걱정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일반적인 여성들보다 키도 크고, 덩치도 큰 편이다. 그래서 밤길을 무서워하거나 변태 같은 인간을 두려워해 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런 걸 무서워하는 친구들을 내가 지켜주면 되겠거니 할 정도니 말 다했다.

 그런 나는 20대 초반에 친구들과 여름 휴가를 간 적이 있었다. 친구의 아버지께서 장소를 빌려주셔서 잘 놀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곁에 있던 친구가 뒤돌아보지 말고 무조건 앞만 보고 걸으라고 했다. 어리둥절해서 시키는 대로 해서 지하철까지 내려갔다. 그리고 그런 일을 시켰던 친구와 다른 친구들이 엄청나게 큰 소리로 욕을 하면서 개찰구를 넘어갔다. 상황파악을 못 하던 나는 나중에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사정을 들었다.

 우리가 지하철로 가던 시간은 낮이었고, 인원은 6명이었다. 그런데 어떤 미친 변태가 이상한 짓을 하면서 우리를 쫓아왔다는 것이었다. 지하철로 갔을 때도 욕을 했던 이유도 거기까지 쫓아오는 게 보여서였다고 했다. 우리는 6명이고, 상대는 고작 남성 한 명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미친 변태를 자극하지 않으려고 조용히 다른 사람들이 많을 지하철까지 내려와서야 욕을 하며 쫓아낼 수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내가 그 상황을 알았다고 해서 통쾌하게 쫓아낼 수 있었을까 싶었다. 내가 살면서 무력했던 순간을 꼽으라면 아마 이 순간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뒤로는 낮에도 이런 일이 있었는데 밤은 어떨까 싶어 밤길까지 무서워하게 되었다.

 이런 이야기를 남동생에게 했을 때, 그냥 내가 운이 없었고 그냥 성기를 걷어차지 그랬냐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상황에 대한 이해도 배려도 없는 말이었다. 그렇지만 악의는 없는 말이었다. 여성이 남성을 부러워하는 건 정말 별것이 아니다. 그냥 평범한 생활 속에 걱정 없이 편히 살고 싶은 것뿐이다. 나는 그래서 쎄시아의 말에 공감할 수 있었다. 남성의 눈에 별것 아닌 게 그렇게 샘이 나고 부러워 봤으니까 말이다.


 “그런 게 있다는 것만 알려주면 돼. 선택은 다들 알아서 할 거야. 그저 다른 선택지를 만들어주는 게 내가 할 일이야. 그렇지 않아?”


 유리는 자신이 현대에서 사용하던 탐폰을 만드는 것에 성공한다. 그것에 대한 대량 생산이나 판매에 대해서 의논하는 과정에서 쎄시아는 말한다. 많이 만들 필요는 없지만, 이런 물건을 여왕이 쓰고 있는 것만 알려주면 된다고. 사람들은 변화를 싫어하고 낯선 것은 더욱 싫어하는 법이었다. 그러니 그런 것이 있고, 나라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 쓰고 있다는 것만 알려두라는 말이었다. 선택할 수 없던 부분에 있어 다른 선택지가 생긴다면, 그 선택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생긴다는 의미였다.


 나도 여성이다 보니 여성 운동에 대한 소식을 접할 기회가 많은 편이다. 대부분 취지는 괜찮은 편이라고 생각하지만, 어떤 부분에 있어 너무 급진적인 부분도 있다고 생각했다. 급진적인 사람 중에서는 극단적인 사람들도 있어 종종 다른 사람과 마찰이 일어나는 듯했다. 나는 그런 극단적인 사람들이 한 번쯤 차분하게 이런 점을 생각해보는 것이 어떨까 싶었다. 우리는 결국 여성이라는 집단으로 묶인다. 그들이 하는 여성 운동도 분명 같은 여성들이 더 나은 사회에서 살기를 원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지만 그것을 통해 같은 여성을 공격하는 건 본질이 흐려지는 것이라 생각한다. 선택조차 할 수 없는 사회에 선택지를 늘리자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 선택을 강요하는 것은 또 다른 폭력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처음에 그 선택지를 선뜻 선택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다른 선택을 하는 사람을 보며 자신도 그것을 선택할 수 있다고 믿음을 주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닐까 싶다. 그러면서 나도 주변이 변하지 않는다고 답답하다 생각하지 말고, 그들을 기다려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내 소신을 굽히지 않고, 그것을 선택하며 이런 선택을 해도 괜찮다는 걸 인지하게 해주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쎄시아는 결혼을 하고 싶지 않아 정복 여정을 나섰고, 기어코 승리하여 왕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아주 뛰어난 능력을 갖췄지만, 자신의 성별로 인해 그것이 폄하 당하는 와중에도 꿋꿋하게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한다. 그러면서 유쾌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은 다 한다. 그녀는 그래도 괜찮을 것이다. 작품 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인물이니 말이다.

 허구의 인물일지라도 나는 쎄시아를 동경한다. 그 자신도 아주 멋진 사람인데 그늘진 곳에 있는 사람을 위해서 잠 줄여가며 일하는 이를 누가 동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쎄시아 같은 인물들이 현실에 아주 많이 있지만,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언젠가 그런 이들이 빛을 받아 세상을 위해 공헌한 이들이라 당당하게 일컬어지는 것이 보고 싶다.

 이 웹 소설을 읽은 누군가가 자신의 신념이 틀리지 않았다고 위로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자신의 신념 때문에 주변을 둘러보지 못했다면, 지금이라도 둘러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자신이 바라는 바를 모두 이루고, 곁에 있는 이들이 힘들지 않게 되길 바란다. 그렇기에 나는 이 웹 소설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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