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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ve Feb 14. 2021

세상의 모든 독자와 주인공과 작가에게

웹 소설 <전지적 독자 시점>을 읽고

* 인용글은 모두 웹 소설 <전지적 독자 시점>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의 세계가 멸망하고, 새로운 세계가 태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 세계의 결말을 알고 있는 유일한 독자였다.


 나는 세상 모든 사람이 독자도, 주인공도, 작가도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누군가는 글 읽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독자가 될 자질이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혹은 삶이 너무 평범해서 주인공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하얀 종이에 글을 쓰는 게 너무 막막하고, 글을 쓰더라도 그 내용이 별로 재미가 없어 작가가 될 재능이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좀 더 쉽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싶다.


 어릴 때 나는 만화 보는 것을 좋아했다. 내가 한창 빠져있던 만화들에는 대부분 ‘괴도’가 등장했고, 나는 그 캐릭터들이 멋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이 나오는 만화가 지닌 ‘이야기’에 집중했다. 만화였는데도 내게 ‘그림’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성격으로 인한 말이나 행동에 집중했고, 그들이 만드는 서사를 깊게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그 이야기를 공유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그들과 함께할 수 있도록 나에게 ‘설정’을 부여했다. 나는 ‘괴도의 여동생’이 되기도 했고, ‘괴도의 친구’가 되기도 했고, ‘괴도의 조수’가 되기도 했다.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와 함께할 수 있는 설정을 만들어내고, 마침내 그들의 이야기 속에 나를 넣을 수 있었다. 원래의 이야기에서 내가 더 나은 역할을 해서 캐릭터들이 더 나은 상황에 있기를 바랐고, 내가 만든 이야기에서 나는 그럴 수 있는 역할이었다. 내가 상상하는 새로운 이야기 속에서 캐릭터들과 내가 움직였고, 원작과는 다른 이야기로 끊임없이 흘러나갔다.

 어떤 사람은 내가 글 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것을 즐길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조차 잊고 있던 어린 시절에는 분명 나와 같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만난 어린이들은 나름의 역할놀이 하는 것을 좋아했고, 그 역할놀이를 위한 자신의 배역과 이야기에 관해 말하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다시 그때의 기쁨을 떠올린다면 아마 누구든 독자나 주인공, 작가가 한 번쯤은 되고 싶어질 것이라고 믿는다.


 새삼스럽게 나에게 독자와 주인공과 작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한 웹 소설이 바로 <전지적 독자 시점>이었다. 간단하게 줄거리를 말하자면 주인공인 ‘김독자(金獨子)’는 설정만 가득하고 굉장히 길어 인기가 없던 웹 소설인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통칭 ‘멸살법’)을 유일하게 완독한 ‘독자(讀子)’이다. 그가 ‘멸살법’ 작가에게 웹 소설이 ‘유료화’가 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을 때, 그가 사는 세상의 ‘장르’가 완전히 뒤바뀌게 된다. 그는 현실이 된 ‘멸살법’의 세계에 적응하며, 그 지식을 이용해 멸살법의 ‘에필로그’를 보고자 한다.


 나는 이 웹 소설을 주변의 추천으로 보게 되었다. 당시 나는 현대를 배경으로 한 판타지 소설을 거의 읽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상당히 흥미로웠다. 연재가 진행되던 당시에 추천을 받았는데, 워낙 다들 이 작품을 좋아하고 있어서 꼭 연재가 종료된 다음에 읽고자 마음먹었다. 그리고 나는 정말 연재가 종료된 이후, 바로 전편을 결제해서 읽었다.

 현대 판타지 장르이기 때문에 판타지적 요소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웹 소설 <전지적 독자 시점>은 다른 현대 판타지와 다르게 ‘이야기’에 관련된 모든 것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드는 부분들이 많다. 나는 그 점이 이 작품의 매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부분에 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이미 다 아는 이야기를 왜 다시 읽어요?」
 「다시 읽으면 분명 다른 이야기가 될 거야.」
 「……싫어요.」

 또다시 그 박탈감을 느끼는 게 두려웠던 나는 고집을 피웠다.
 그러자 어머니가 말했다.

 「그럼 같이 읽어 볼까?」

  그렇게 나는 ‘다시 읽기’를 배웠다.
 처음에는 주인공의 입장만 보였던 것이, 두 번째 읽을 때는 조연의 입장이 보였고, 세 번째 읽을 때는 적의 입장이 보였다.
 읽을 때마다 달라지는 이야기.
 이야기는 끝났으되 끝난 게 아니었다.
 독자가 그 이야기를 포기하지 않는 한,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 것이다.


 주인공인 김독자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죽을 것’이라는 운명을 받게 된다. 그래서 일행들과 그가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가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한다. 김독자는 모종의 이유로 부활할 수 있었는데, 그 부활하기 전의 의식 속에서 자신의 어머니인 ‘이수경’과의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나는 1년에 한 번씩 꼭 보는 영화가 있는데, 바로 ‘토이 스토리’ 시리즈이다. ‘토이 스토리 1’의 마지막에 우디와 버즈는 친한 친구가 된다. 그리고 ‘토이 스토리 2’에서 새로 나온 제시와 불스아이가 앤디의 장난감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토이 스토리 3’이 나오기 몇 년 전까지 토이 스토리 1과 2를 시시때때로 챙겨보았다. 토이 스토리의 주인공들은 갈등이 있고, 위기에 처하지만 결국 해피 엔딩을 맞이한다. 그렇지만 나는 그들의 해피 엔딩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들의 감정에 공감하고, 그들의 위기에 숨을 참고 보기도 하고, 그들의 행복을 진심으로 축복했지만, 그들은 나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 어쩐지 서러웠던 적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잊지 않고 토이 스토리 시리즈를 봐왔던 것 같다. 그런 나와 같은 사람들이 많았기에 토이 스토리는 3편이 나오고, 4편이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우디의 이야기로 보았던 것이, 버즈의 이야기가 되고, 더 나아가 슬랭키와 Mr. 포테이토 헤드와 렉스와 포의 이야기가 되고, 그들의 적이었던 시드와 알, 랏소 베어, 개비 개비의 이야기가 되었다. 처음 볼 때와 두 번째 볼 때가 달랐고, 나이를 먹어가며 보는 것은 극적일 정도로 이전과 다른 감상을 느끼기도 했다. 그 이야기를 수도 없이 생각하고, 그 이야기를 중심으로 다른 이야기를 계속해서 가지를 만들듯 상상하기도 했다. 나는 그들처럼 장난감이었고, 그들의 조력자였고, 그들의 위협이 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결국 그들의 끝없는 행복을 바라는 한 명의 관람자였다.

 그래서 나는 작품에서 부분을 읽을 때, 한참 시간을 들여 반복해서 읽게 되었다. 이야기를 사랑해보았고, 사랑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무척 공감이 가고 마음을 울리는 부분이었다.


 【<스타 스트림>은 모든 존재의 삶을 기승전결로 만들려고 하지. 하지만 본래 삶이란 기승전결이 아니다. 기에서도, 승에서도, 전에서도. 언제든 끝날 수 있는 부조리한 것이지. 그러니 이곳에서 내 삶이 끝나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이 장면은 ‘멸살법’의 주인공인 ‘유중혁’과 ‘은밀한 모략가’의 대화에서 나온 것이다.

 은밀한 모략가는 유중혁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유중혁에게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그는 유중혁에게 1863번을 회귀한 사람과 1863번의 삶 동안 기억도 없이 죽음만 반복한 아이 중 어느 쪽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것은 유중혁이 그에게 보이는 동정은 의미도, 가치도 없다는 말이었다. 김독자의 영향을 받은 두 존재는 회귀하는 삶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은밀한 모략가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대학생 때 교양으로 드라마와 영화에 관련된 수업을 들은 적이 있었다. 꽤 예전에 들었던 수업이지만 아직도 유난히 기억에 남는 부분이 있다.

 교수님께서 하루는 일 때문에 대학교 후문으로 가는 길에, 그 근처에 있던 정자에 앉아 울면서 전화하는 여성을 봤다고 하셨다. 그 여성은 울면서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가 있어!’ 라고 전화에 대고 따지고 있어서, 사랑싸움이라도 하는가 보다 하면서 지나갔다고 하셨다. 교수님께서 몇 시간 뒤 다시 학교로 돌아오는데, 그 길을 지나가면서 그 여성을 또 보았다고 하셨다. 그런데 그 여성은 처음 봤을 때와 똑같이 울면서 똑같은 말을 전화에 대고 말하고 있었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말씀하시길, 이게 드라마나 영화였다면 욕먹을 만한 연출이자 시나리오지만, 현실에서는 이런 개연성 없는 일들이 종종 일어난다고 하셨다.

 이 부분을 보면서 작가가 삶과 죽음에 대해서, 그리고 이야기와 개연성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왔는지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은 개연성이 없고, 부조리한 현실을 살아가면서, 이야기에서 개연성 없이 벌어지는 일은 말도 안 되는 것이라며 질책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개연성 없이 벌어지는 현실에 개연성을 부여하기 위해 자신의 머릿속에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교수님께서 울면서 전화하고 있는 여성을 보며 사랑싸움을 한다고 생각했던 것과 같이 말이다. 그렇지만 이 작품에는 개연성이 없는 그 삶도, 죽음도 존중하는 느낌이었다. 그것에 굳이 이유를 담지 않아도 그것으로 괜찮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물론 전체적으로 작품의 대화를 읽었을 때 이 대사를 이렇게 해석하기는 어려울 수 있겠지만, 나는 그냥 그런 느낌을 받아 위로가 되었다.


 웹 소설의 초반은 주인공인 김독자가 현실화된 ‘멸살법’ 속에서 자신이 읽었던 ‘멸살법’을 기억하여 위기를 극복하는 내용이 많다. 그렇지만 뒤로 갈수록 이야기를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와 가치관에 관해 이야기한다. 한없이 가볍게 소비하던 글들에 대해 다시 한 번 고민하게 되고, 세상을 새삼스러운 눈으로 다시 보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주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작품을 누구라도 즐겁게 읽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어떤 이야기를 아주 사랑해본 사람과 어떤 이야기를 써본 사람들이 더욱 깊은 감정을 가지고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의 이야기는 등장인물의 이야기이자 독자의 이야기이고 작가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작품에서 절절하게 이야기를 사랑하는 독자 때문에 울었고, 그 독자의 영향을 받은 주인공과 등장인물 때문에 울었고, 이야기를 가볍게 여기지 않는 작가 때문에 울었다. 그러니 독자와 주인공, 작가인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이 작품을 한 번쯤 읽어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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